-179-
-63장. 카잔#1-
“허!”
입에서 허탈한 바람 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황망한 표정으로 미구엘 페레스가 사라진 자리를 본다.
배면계에 끌려갔을 때도 이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지는 않았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허탈하고, 당황하는 와중에도 준혁은 본능적으로 ‘탐색’을 펼쳤다.
‘음…….’
조금 전 미구엘 페레스가, 정확하게는 빛으로 빚은 인간의 형상이 서 있던 그 자리에 흔적이 남아 있었다.
푸르게 빛나는 입자들, 즉 에너지의 근원인 ‘기운’이 아직 흩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흩어지지 않고 남아 있던 기운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뭐야?’
준혁의 얼굴에 짙은 의혹이 떠올랐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힘이라는 건, 에너지라는 건 그런 식으로 사라질 수 없다.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던 자동차는 갑자기 멈출 수 없다.
브레이크를 아무리 세게 밟아도 시속 100킬로미터에서 90킬로미터, 80킬로미터로 속도가 줄어드는 과정을 거쳐 0의 상태가 된다.
섭씨 100℃로 끓던 물도 갑자기 0℃가 될 수 없다.
타는 장작에 물을 끼얹어 불을 끄더라도, 그 장작에 남아 있는 열기 또한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다.
기운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곳에 뭉쳐 있는 기운은 서서히 주변으로 퍼지면서 옅어질 뿐, 기운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방금 전 한곳에 뭉쳐 있던 그 기운은 갑자기 사라졌다.
그것도 준혁이 ‘탐색’으로 확인하는 순간, 준혁의 시선을 감지하기라도 한 듯 딱 그 순간에 사라졌다.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준혁이 느끼기에는 마치 자신을 놀리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명백히 어떤 ‘의지’가 작용한 현상이었다.
그리고 풀리지 않는 또 하나의 의문이 있었다.
‘마나가 아니라고?’
준혁의 눈에 보인 것은 푸른색 빛이다.
영력, 혹은 마나가 되기 이전의 순수한 기운 그 자체.
마나를 사용하는 미구엘 페레스가 사라진 자리에, 마나가 아닌 순수한 에너지의 잔향만 남아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휘발유로 움직이는 자동차가 흘린 연료가 갓 뽑아 올린 원유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뭐야,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이런 일에 관여할 정도의 권능은 하나밖에 없었다.
‘시스템.’
그 외에 생각나는 게 없었다.
-흑호.
-네.
-미구엘 페레스, 위치 확인되냐?
흑호는 미구엘 페레스에게 ‘표식’을 달아 놓았었다.
대답은 빠르게 돌아왔다.
-사라졌습니다.
예상대로였다.
시스템이 한 짓인지, 아닌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 일을 벌일 수 있다면, 흑호의 ‘표식’ 정도는 충분히 지울 수 있으리라.
‘이거 스케일이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커지는데?’
시스템과 특정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놈만 벌써 두 번째다.
로건 베런즈와 미구엘 페레스.
하지만 어떤 관계인지, 무엇을 하는지,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가 없다.
명확하게 밝혀지는 건 없고, 의혹만 자꾸 커지는 느낌이었다.
결정적으로 지금 가장 의문스러운 것 하나.
‘일단 물어봐야겠다.’
이럴 때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는 상대는 하나밖에 없었다.
준혁은 불러낸 환수들을 모두 데리고 장소를 옮겼다.
***
“그럼 놀고 있어.”
준혁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현관문을 닫았다.
문을 닫는 순간,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네 마리 환수의 모습은 과감하게 무시했다.
지유는 꽤 오랫동안 자신과 놀아 주지 않은 삼촌에게 잔뜩 골이 나 있었다.
그런 와중에 또 집에 오자마자 린디웨와 나가려고 하니 참아 왔던 서운함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조카를 달래기 위해 네 마리 환수를 제물로 던지는 것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었다.
준혁은 공원의 벤치에 자리를 잡자마자 질문을 던졌다.
“시스템이 자신만의 의지를 가지는 게 가능하냐?”
“음?”
“시스템이 자신의 의지와 목적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게 가능하냐고.”
“그건…….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해. 하지만 가능할 수도 있지.”
“무슨 소리야?”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의 준혁을 보며, 린디웨가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켰다.
“나.”
“응?”
“가끔 잊는 것 같은데, 나는 시스템의 아바타야. 그런데 내 의지를 가지고 있지. 그럼 이건 시스템의 의지일까, 아니면 아바타라는 독립된 개체인 내 의지일까?”
알 듯 모를 듯 한 질문에 준혁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알아들을 수 있게.”
“음……. 우선 시스템은 정해져 있는 법칙에 따라서만 움직여. 법칙으로 정해진 것 이외에 스스로 목적을 설정할 수는 없지.”
“그럼 너는?”
“나도 그 틀 안에서 존재하는 거야. 즉, 법칙의 일부분이지.”
“뭐라는 거야?”
바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린디웨라는 자아가 독립적인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데, 법칙의 일부분이라는 말은 어딘가 모순되어 보였다.
“시스템의 기본은 이런 거야. 어떤 상황이 주어지면, 그 상황에 맞춰서 미리 정해진 행동을 하는 거. 내 경우도 마찬가지야.”
“배면계 시스템이 공격을 받은 것에 대한 대응?”
“정답. 외부에서 공격이 들어오니, 아바타를 만들어서 공격에 대해 맞서게 만든 거야. 그래서 나는 내 의지를 갖고는 있지만, 배면계 시스템을 공격할 수는 없어.”
“결국 능동이 아닌 사동이라는 말이지?”
스스로 판단해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 어떤 일을 하게끔 정해져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그 의문이, 준혁이 린디웨를 찾아온 진짜 이유였다.
“그럼 던전 시스템은 지금 어떻게 된 거지?”
“무슨 말?”
“그러니까…….”
준혁은 자신이 겪은 일과 자신의 생각을 린디웨에게 풀어놓았다.
“음!”
린디웨는 미간에 잔뜩 주름을 접은 채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대원칙.
시스템이 자신만의 의지와 목적을 갖는 것은 그 대원칙을 어기는 일이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존재 의의를 부정하는 꼴이다.
시스템이 그렇게 되었다면 답이 나오지 않는 모순에 빠진다. 이는 결국 소멸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그런데 던전 시스템은 지금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말이 안 돼.”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이기도 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린디웨가 준혁을 향해 말했다.
“이 문제는 당분간 덮어.”
“뭐?”
준혁이 날카로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꽤 심각한 문제로 보이는 한편, 어쩌면 모든 사태를 정리할 근본적인 문제일지도 모르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덮자고 한다.
“지금은 안 돼.”
“왜?”
“일단 뭔가 할 거라면……. 배면계에서 사람들 돌아온 이후에.”
“아!”
“우리가 뭔가를 시도했다가… 나한테 문제가 생기면? 그러면 그 사람들 영원히 못 돌아올 수도 있어. 그건 막아야지.”
시스템에 대한 생각에 마음이 급했지만, 이 부분은 어쩔 수가 없다.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때까지는 아무것도 하면 안 되는 거냐?”
“아니지.”
“그럼?”
“로건 베런즈, 미구엘 페레스. 그 두 놈을 잡아야지. 직접 파고들지는 못해도 단서는 잡아야 하지 않겠어?”
“알았다.”
대답과 함께 몸을 일으킨 준혁의 얼굴에 짙은 긴장감이 어렸다.
로건 베런즈를 잡는 것은 준혁으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미룰 수도 없다.
생각을 굳힌 준혁이 다시 흑호를 불렀다.
***
크워어어!
거대한 포효가 사방에서 휘몰아치며 귀를 어지럽혔다.
“정면부터!”
큰 소리로 명령을 내리는 사람은 양태군이었다.
양태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앞으로 튀어 나간 사람은 강태웅이었다.
세찬 바람 소리와 함께 날아든 것은 거대한 압력이었다.
거인, 아니 거대한 원숭이였다.
키가 10미터는 족히 될 것 같은 원숭이가 강태웅을 향해 주먹을 내리꽂고 있었다.
주먹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세찬 바람이 한 점에 모이며 그 풍압이 그대로 강태웅을 내리찍었다.
“간(干)!”
뻗어 올린 영패를 중심으로 반투명한 방패의 형상이 떠올랐다.
꽈아앙-!
주먹과 방패가 부딪치고, 그 충격으로 흩어진 압력의 파편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 휘몰아치는 압력의 소용돌이를 뚫고 솟구치는 그림자가 있었다.
퍼엉!
뭔가 터지는 듯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거대한 원숭이의 목이 꿰뚫리고, 시뻘건 핏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원숭이의 목을 뚫은 이는 최유나였다.
생각보다 허무하게 쓰러진 거대한 원숭이 괴물은 배면계의 영수(靈獸)였다.
생긴 그대로 거원(巨猿)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거대한 원숭이는 주로 바람을 다루는 영수였다.
크기와 능력에 비하면 꽤 약한 축에 드는 영수였지만, 이놈들의 가장 무서운 점은 무리 생활을 한다는 것이었다.
쿠웅-!
최유나에게 목이 꿰뚫린 한 마리가 그대로 쓰러졌지만, 남아 있는 거원이 아직도 50여 마리는 더 있었다.
“망할! 해도 해도 끝이 없네!”
버럭 소리를 지른 강이찬이 쉴 새 없이 양손을 움직였다.
그 손길을 따라 다섯 개의 술석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거센 불길을 일으켰다.
화르륵!
불이 만들어 낸 거대한 소용돌이의 기세에 거원들이 주춤거리며 몸을 웅크린다.
잠깐의 멈칫거림.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백호진과 리처드 개런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서걱, 서거걱!
휘두르는 날붙이에는 짙은 영력이 잔뜩 맺혀 있었다.
키아아악!
거원들의 비명이 메아리친다.
순식간에 다섯 마리의 거원이 목숨을 잃고 거체를 바닥에 누인다.
“이 망할 원숭이 새끼들!”
현을 튕기는 듯한 소음이 울리는 듯하더니, 수십 개의 화살이 솟구쳐 올랐다.
잔뜩 솟아오른 화살들이 정점에 도달했다 싶은 순간, 급격히 방향을 비튼다.
소나기처럼 쏟아진 화살들이 거원의 몸뚱이에 박혀 들었다.
꽝, 꽈광!
한 대 한 대 박힐 때마다 묵직한 충격이 거원의 거대한 몸뚱이를 뒤흔들었다.
김준석이 쏘아 올린 화살이었다.
김준석이 배면계로 각성하며 얻은 직업은 준혁과 똑같은 엽사였다.
그리고 형제라 같은 재능을 갖고 있는지 성장 또한 빨랐다.
엽사는 성장이 어렵다고 했던 리쉬옌의 말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빠른 성장이었다.
거기에 던전 쪽 각성에서 김준석의 클래스는 보조형 마법사, 서포터였다.
그 힘을 자신에게 사용해 양쪽의 스킬을 섞으니 위력 또한 제법 강한 편이었다.
화살의 충격에 거원들이 속절없이 밀려나는 순간, 팀에 있는 모든 딜러가 앞으로 쏟아져 나갔다.
쿵, 쿠웅!
하나씩 하나씩 거원의 몸뚱이가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거원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허억! 헉!”
양태군의 리딩, 그에 따른 팀원들의 환상적인 호흡으로 피해 없이 거원들을 몰살시킬 수 있었다.
털썩!
가장 먼저 쓰러지듯 주저앉은 사람은 강이찬이었다.
“기절하겠네.”
말뿐이 아니라는 듯 아예 바닥에 드러누울 기세였다.
그때 빠르게 일행들을 향해 달려오는 그림자가 하나.
리쉬옌이었다.
그녀는 싸움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은 채 일행의 전투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해도 좋을 정도로 모두가 꽤 성장한 덕분이었다.
“다들 수고했어요. 이제 제가 굳이 이야기를 안 해도 될 정도가 된 것 같아요. 이대로만 쭉 가면 되겠어요.”
하지만 칭찬을 하는 리쉬옌의 표정이 밝지가 않았다.
그 때문에 팀원들도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가만히 리쉬옌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결심한 듯 리쉬옌이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다들 모여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