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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장. 적색#5-
미구엘 페레스는 준혁의 말을 믿었다.
‘게이트 오픈’을 사용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말에 급히 여권부터 구했다.
공항을 이용해야 한다는 게 조금 찝찝하기는 했다.
미국의 눈이 자신을 감시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한국에 온 이유는 조직의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지 오늘로 꼭 보름째였다.
‘흐음…….’
무료했다.
“후우!”
짙은 시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천천히 떠올랐다.
멍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손은 버릇처럼 움직여 테이블에 놓인 와인 잔을 쥔다.
미구엘 페레스는 시가를 피울 때 포도주를 곁들이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천천히 시간을 들여 시가를 다시 한 모금.
그렇게 긴 시간을 투자해 시가 하나를 모두 피웠다.
“쯧!”
하지만 그의 얼굴에 남은 것은 짜증스러운 표정이었다.
보름 동안 집에만 머물다 보니 답답함에 짜증이 치솟았다.
평소에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자주 파티를 즐겼었다.
그는 의외로 주변의 이웃들과 왕래가 잦은 편이었고, 사람들을 집에 들이는 것도 꺼려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저택에는 그의 진짜 정체와 관련하여 나올 만한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사귄 친구들은 대부분 돈 많은 한량들이다.
그들을 잔뜩 초대하고, 여자들도 불러 그렇게 광란의 파티를 즐겼다.
하지만 그것도 열흘째가 되니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하루는 술에 절었고, 또 하루는 여자를 탐닉했다.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젠장!”
와장창!
옆에 있던 테이블이 통째로 날아가 산산조각이 났다.
“어떻게 생각해?”
흥분한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지른 그 끝에는 두 명의 여자가 있었다.
무릎을 꿇고 벌거벗겨진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두 여자는 질린 얼굴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왜 그깟 원숭이의 말에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데?”
물론 두 여자가 대답할 수 있는 말은 없다.
미구엘 페레스 역시 대답을 기대하고 묻는 게 아니다.
그저 소리가 지르고 싶을 뿐, 그저 이 무료함을 달래고 싶을 뿐이었다.
어떻게든 스트레스를 풀어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때 마침 미구엘 페레스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시가 커터였다.
쌍날을 가진 기요틴 형태의 시가 커터.
평소에는 시가 캡을 자르는 데 쓰는 물건이다.
미구엘 페레스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시가 외에 저 동그란 틀 안에 꼭 맞게 들어갈 수 있는 물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거였군.’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이 왜 이렇게 무료한지.
피를 봐야 했다. 피 맛을 보지 못해서 이렇게 짜증스럽고 무료했던 것이다.
일종의 금단증상이었다.
그리고 지금 저 시가 커터를 이용해 즐길 수 있는 작은 유흥이 떠올랐다.
“거기 너.”
미구엘 페레스의 지목을 받은 여자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너무 무서워 대답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미구엘 페레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성큼성큼 걸어 여자에게 다가가더니, 여자의 손가락을 불끈 쥐었다.
망설임도 없고, 여자를 겁주기 위해 뜸을 들이지도 않는다.
여자의 손가락이 그대로 시가 커터의 둥근 틀에 들어갔다.
“꺄아아악!”
자지러질 듯한 비명이 울렸다. 여자는 온몸으로 발버둥 치며 미친 듯이 저항했다.
하지만 미구엘 페레스는 이번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잠시 후면 저 놀란 비명이 고통에 찬 비명으로 바뀔 테니까.
기다리지 않는다.
커터의 날이 사람의 손가락을 자를 수 있을 만큼 날카로운지 아닌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부족한 예리함은 충분히 힘으로 보충할 수 있었다.
커터 양쪽에 끼워 넣은 손가락을 그대로 오므렸다.
서걱!
소름 끼치는 소음과 함께 허공으로 떠오르는 작은 토막과 허공에 흩뿌려진 붉은 핏줄기.
“꺄아아악!”
높은 비명이 저택 안에 크게 메아리쳤다.
즐거워야 했다.
메아리치는 비명, 선연한 핏줄기, 조금 전까지 인간의 몸 일부였던 손가락 마디까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미구엘 페레스의 감정은 분명 희열, 혹은 쾌락이어야 했다.
하지만 찢어질 듯 커진 미구엘 페레스의 두 눈에는 아주 낯선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공포였다.
바닥에 떨어진 것이 미구엘 페레스의 손가락이었기 때문이다.
“개새끼, 도저히 못 참겠네.”
짜증이 잔뜩 난 목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미구엘 페레스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쪽으로 향했다.
그 시야에 담긴 것은 보름 전에 만났던 그 얼굴이었다.
“김… 준혁?”
왜 저자가 여기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계속 미행하고 있었나?”
그게 아니고서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아!”
준혁은 짧은 한숨을 토하며 멍한 표정의 미구엘 페레스를 보았다.
어지간히 놀란 표정이었다.
잘려 나간 손가락은 포션을 이용하면 바로 붙이는 게 가능한데도, 그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잘 놀았냐? 서클……. 서클 제로?”
“뭐? 설마 마약 단속국?”
미구엘 페레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곳은 미연방 기관밖에 없었다.
“뭐, 상상은 알아서 하시고.”
“지금 이게 무슨 짓? 설마 나를 체포라도 하려고?”
준혁은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럼?”
“그냥 죽이려고.”
어떻게 그런 판단이 나왔는지는 모른다.
준혁의 말을 듣는 순간, 미구엘 페레스는 머릿속에 불꽃이 번뜩이는 느낌을 받았다.
저 괴물과 싸워 이길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살 방법은 있었다.
찰나보다 짧은 그 순간 상황을 파악하고 판단을 마쳤으며, 그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어느새 미구엘 페레스의 품에는 손가락이 잘릴 뻔했던 여자가 잡혀 있었다.
“죽이겠다고? 그럼 이 여자도 죽는 거야.”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게이트 오픈’을 쓴다고 저놈에게서 달아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인질을 잡는 게 현명했다.
“흐음!”
그리고 그런 미구엘 페레스를 보는 준혁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흥! 정의의 사도 행세라도 하시려고? 어차피 네 손에도 피가 잔뜩 묻어 있을 텐데?”
“아닌데?”
“뭐?”
“그냥 네가 하는 꼴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저벅!
준혁이 한 걸음 다가섰다.
“오지 마!”
버럭 소리를 지르는 미구엘 페레스의 손톱이 여자의 목을 움푹 파고 들어갔다.
S2급의 각성자라면 손가락 하나로도 사람의 몸뚱이를 꿰뚫어 죽일 수 있다.
여자는 공포에 질려 이제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상태.
“말했지? 더 오면 이 여자 죽어.”
“마음대로.”
“뭐?”
“말했잖아. 난 그냥 네가 하는 짓거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저벅!
또 한 걸음.
“멈추라고!”
“아, 그런데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해 두자면…….”
“흡!”
미구엘 페레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 눈앞의 시야가 변했다.
인질로 잡고 있던 여자가 지금은 시야 저 멀리 주저앉아 있었다.
그도 모르는 사이 ‘회피’가 발동된 것이다.
즉, 미구엘 페레스의 인지 범위를 벗어난 공격에 ‘회피’가 먼저 발동되었다는 이야기.
그런 미구엘 페레스를 보며 준혁이 하던 말을 마무리했다.
“죽이는 걸 그냥 두고 보겠다는 말은 아니야.”
흑호에게 두 여자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라고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준혁은 땅을 박찼다.
직선으로 뻗어 나간 주먹질에 자연스럽게 ‘회피’가 작용하며 미구엘 페레스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부우웅!
주먹이 허공을 후려치는 사이, 준혁의 감각은 날카롭게 미구엘 페레스의 마나를 분별해 냈다.
이 회피를 무력화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어렵다.
‘회피’로 몸을 피하게 되면, 새롭게 등장할 장소에 해당 인물의 마나가 먼저 자리를 잡는다.
갑작스러운 위치 이동으로 인한 부하를 줄이기 위해서다.
준혁은 릴리안 우드에게 그 특징에 대해 들었다.
파훼하기 위해서는 ‘회피’를 사용하는 인물의 마나 특성을 파악하고, 그 마나가 피어오르는 장소에 미리 공격을 가하면 된다.
방법 자체는 매우 간단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현재로서는 준혁과 로건 베런즈밖에 없었다.
부웅!
준혁의 주먹이 또 한 번 허공을 훑었다.
미구엘 페레스의 마나는 이미 충분히 인지했다.
이제 마지막이었다.
탁!
미구엘 페레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도 전에 준혁은 전혀 엉뚱한 장소로 날아가 주먹을 뻗었다.
꽈앙!
굉음과 함께 묵직한 동체 하나가 그대로 벽을 뚫고 날아갔다.
맞서 싸운다는 선택지는 생각하기도 전에 미구엘 페레스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미친!’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고, 황망함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저딴 괴물을 어떻게…….’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빠아악!
안면부를 강타한 충격에, 날아가던 몸뚱이가 핑그르르 돌았다.
빡, 빠박!
재차 이어진 주먹에 광대뼈가 함몰되고, 이가 몽땅 부러져 우수수 튀어 나갔다.
쾅!
땅에 처박히는 충격에 온몸의 뼈가 그대로 으스러지는 느낌이다.
미구엘 페레스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너무 거대한 충격에 성대조차 마비된 듯 온몸이 그대로 정지해 버린 느낌.
바닥에 널브러진 채 위를 쳐다보는 미구엘 페레스의 시야 속으로 준혁이 불쑥 들어왔다.
“재밌지?”
고막도 상했는지 소리가 웅웅 울려 명확하게 들리지가 않았다.
그사이 준혁이 어느새 꺼내 든 무상곤이 한 자루 칼로 변했다.
“그냥 깔끔하게 죽어.”
슬쩍 들리는 칼을 보며 미구엘 페레스는 의지를 놓아 버렸다.
압도적인 강함.
각성하기 전에도 미구엘 페레스는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멕시코 빈민가에서 자라며 어려서부터 온갖 일을 다 겪었다.
겨우 15살 때 한 마약 카르텔에 들어가 첫 살인을 했다.
악바리처럼 싸우며 바득바득 기어올라, 25살에는 조직의 중간 간부가 되었다.
그 10년의 시간 동안 그가 겪은 고생은 말도 못할 정도였다.
그의 근성에 질린 탓에 다른 조직에서조차 미구엘 페레스는 절대 건드리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준혁의 이 압도적인 힘 앞에서 그런 근성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
반항심은 고사하고 절망감조차 들지 않았다.
채 열 번이 되지 않은 타격인데도 의지를 꺾을 정도로 준혁의 강함은 압도적이었다.
정신이 점점 아득해졌다.
‘이대로 끝…….’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뭐지?’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시야에 갑자기 새하얀 빛무리가 떠올랐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잉-!
묘한 소음이 울리는가 싶더니 사라졌던 온몸의 감각이 갑자기 돌아왔다.
머릿속에서 폭발이 일어난 듯 거대한 충격에 순간적으로 시야가 암전됐다.
그리고 그 직후.
“허!”
웅웅 울리던 소리가 갑자기 선명하게 변했다.
처음 고막을 두드린 소리는 준혁의 허탈한 실소였다.
“이건 또 뭐지?”
준혁은 황당한 표정으로 미구엘 페레스를 보았다.
아니, 저것은 더 이상 미구엘 페레스라고 부를 수 없었다.
미구엘 페레스였던 무언가였다.
놈에게서 원래 인간의 모습이었던 무언가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빛으로 빚어 낸 인간 형상의 ‘무언가’였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주변을 휘감은 폭풍 같은 기운.
준혁은 반사적으로 거리를 벌리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다 튀어와!
‘감응’을 통한 부름에 흑호가 빠르게 움직였고, 어느새 흑호가 청랑과 함께 옆으로 내려섰다.
키하아아!
손목에 감겨 있는 적사도, 은신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던 백효도 전투 태세로 전환하며 준혁을 호위하듯 자리를 잡았다.
싸움이 절대 쉽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기가 죽지는 않는다.
싸워야 한다면 제대로 싸우면 그뿐이었다.
그때였다.
“엇!”
미구엘 페레스였던 빛 덩어리의 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바짝 긴장한 준혁이 다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는 동안에도 서서히 흐릿해져 가던 빛이 어느새 완전히 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허탈감이 준혁의 가슴을 휩쓸고 지나갔다.
“뭐야?”
공허한 질문만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