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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장. 적색#4-
“대통령님, 급한 소식입니다.”
“급한 소식?”
“네. FBI 보고에 의하면……. 아, 그게…….”
급히 대피소로 뛰어 들어왔던 보좌관이 갑자기 멈칫한다.
부자연스러운 행동에 바일레어 대통령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보좌관의 눈동자가 슬그머니 한쪽으로 움직였다.
보좌관의 시선 끝에는 책상 위에 식빵 자세로 앉아 있는 흑호가 있었다.
이 정도 신호를 주는데 눈치를 채지 못하면 그게 바보다.
바일레어 대통령은 의자에 몸을 묻으며 고민에 잠겼다.
그 모습이 이상해 보였던 걸까?
흑호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더니 바일레어 대통령과 시선을 마주친다.
가늘게 좁혀지는 눈에서 신경질적인 감정이 물씬 풍긴다.
“헙!”
그 시선에 바일레어 대통령은 순간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흑호는 지금 소형화한 상태였다. 즉, 작은 검은 고양이의 모습이다.
언뜻 보기에는 귀여운 고양이 한 마리의 모습으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바일레어 대통령의 뇌리에 남아 있는 흑호의 모습은 거대한 검은 호랑이였다.
흑호가 슬쩍 몸만 일으켜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였다.
그러나 보좌관의 표정은 아주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가능하면 흑호의 눈을 피해서 말하고 싶어 했다.
‘음…….’
바일레어 대통령이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띵!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알림음을 울렸다.
문자 메시지, 발신인이 눈앞의 보좌관으로 되어 있는 문자 메시지였다.
「메시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좋은 생각이다.
저 고양이, 아니 호랑이가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글자는 절대 못 알아볼 것이다.
「좋습니다. 말씀하세요.」
「FBI 국장의 보고입니다. 로건 베런즈의 딸을 살해한 범인의 신병을 확보했습니다.」
「로건 베런즈? 마약 중독으로 사망한 게 아니었습니까?」
「FBI의 조사에 따르면, 주 경찰의 부실수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강 짐작이 갔다.
로건 베런즈의 딸은 거리의 콜걸로 지냈고, 마약 중독자였다.
딱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는 사건이다.
관심이 없었을 것이고, 제대로 수사하지 않고 사건을 마무리했으리라.
노숙자나 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 대한 처우는 대부분 그런 식이다.
거주나 인간관계가 불명확하고, 대부분의 현장이 증거를 채취하기 힘들다.
깊이 파고 들어가면 골치만 아프다. 연고자도 없고, 딱히 의혹을 제기할 사람도 없다.
그러니 대충 결론 내고 끝내는 것이다.
「이걸로 로건 베런즈와 거래가 가능할 것 같습니까?」
「그것까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만, 카드로 들고 있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중에 실패하더라도, 뭐든 패를 들고 있는 건 나쁘지 않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김준혁.’
일단 보좌관이 굳이 문자 메시지라는 번거로운 방법을 이용한 이유는 이해가 갔다.
일단 어떤 패가 손에 들어왔는지 알려 주는 것까지가 보좌관의 일이었다.
그 후,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하는 것은 바일레어 대통령의 일이었다.
그 선택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 번거로운 방법을 택한 것이다.
‘생각을 좀 해 봐야겠군.’
바일레어 대통령은 일단은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어쨌든 남이 모르는 패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바일레어 대통령이 가볍게 손을 들어 이해했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
하지만 보좌관은 아직 보고할 사안이 하나 더 있었다.
“그리고 CIA에서 들어온 첩보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메시지를 사용하지 않고 구두로 보고를 했다.
준혁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라는 뜻이었고, 바일레어 대통령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내용이죠?”
“한국에 ‘서클 제로’로 보이는 자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서클 제로?”
언젠가 한 번 들어 본 적 있는 코드명이었다.
바일레어 대통령은 보좌관의 말을 되뇌며 머릿속을 더듬었다. 그리고 묵혀 놓았던 기억 중 하나를 바로 끄집어냈다.
“로스 시르쿨로스?”
“네,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보좌관이 휴대폰에 사진 한 장을 띄워 바일레어 대통령에게 내밀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책상이 놓여 있었기에 휴대폰은 자연스럽게 책상 위로 건네졌다.
그리고 책상 위에는 흑호가 앉아 있었다.
자연스레 흑호의 시선이 휴대폰 화면으로 향했다.
“헉!”
휴대폰을 건네받으려면 바일레어 대통령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엎드려 있던 흑호가 갑자기 펄쩍 뛰어오른 탓이었다.
휴대폰이 책상 위에 떨어지고, 흑호는 준혁을 불렀다.
-주인님.
-왜?
곧장 되돌아오는 준혁의 목소리에 흑호는 대답 대신 ‘시야 공유’를 펼쳤다.
-당장 데리러 와라.
-네, 주인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흑호가 도약을 펼치며 사라졌다.
“무, 무슨 일이?”
바일레어 대통령이 불안한 표정으로 흑호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고민을 할 시간도 없이 또다시 공간이 열렸고, 이번에는 준혁이 나타났다.
“음? 미스터 김?”
갑자기 등장한 준혁의 모습에 바일레어 대통령이 저도 모르게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불과 몇 분 전, 로건 베런즈에 관한 이야기를 숨기기로 결정한 탓이었다.
준혁은 대답 대신 성큼성큼 다가가 책상에 놓인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휴대폰의 사진에는 공항으로 보이는 장소에 한 남자가 서 있는 모습이 촬영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 남자가 준혁도 아는 얼굴이라는 점이었다.
“이놈 누군지 아십니까?”
사진 속의 남자는 미구엘 페레스, 5인 위원회의 적색이었다.
“미스터 김이 아는 사람입니까?”
바일레어 대통령 입장에서도 꽤 당혹스러운 이야기였다.
준혁이나 로건 베런즈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대통령께서 알고 계신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만?”
준혁의 말에 보좌관이 슬쩍 앞으로 나섰다.
“그는 로스 시르쿨로스의 보스로 추정되는 남자입니다.”
“로스 시르쿨로스?”
“‘Los círculos’. 멕시코 최대 마약 카르텔의 이름입니다.”
순간 준혁의 눈꼬리가 꽤 격렬하게 떨렸다.
“자세히 말씀해 보시죠.”
“말씀드렸다시피 멕시코 최대 마약 카르텔입니다.”
보좌관의 설명은 꽤 길었다.
그리고 설명을 듣는 준혁의 표정은 꽤 심각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보좌관의 설명에 따르면 로스 시르쿨로스는 마약 외에도 인신매매, 매춘, 무기 밀매, 청부업까지 손대지 않은 범죄가 없는 조직이었다.
그리고 그런 마약 카르텔에 대해 미국의 대통령이 관심을 두는 이유는, 로스 시르쿨로스가 멕시코만이 아닌 남미 최대의 마약 카르텔이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규모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미에 존재하는 각 지역의 마약 조직들도 이 로스 시르쿨로스의 허락을 받아야만 사업을 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 대가로 매달 거액의 상납금을 바치는 실정이었다.
남미 마약 카르텔의 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로스 시르쿨로스가 이렇게 강력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엄청난 수의 각성자들을 조직원으로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C급, D급 수준이 아닌 최소한 B급 각성자에 S급 각성자까지 존재했다.
흔히 ‘빌런’이라 통칭되는 존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다른 조직들도 제대로 반항할 수가 없다고 한다.
설명을 들은 준혁이 휴대폰을 내밀며 물었다.
“그럼 이 사진의 인물이 그 보스입니까?”
“확실치 않습니다. 그 조직이 무서운 이유 중 하나가 보스가 누군지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DEA와 FBI, 그리고 CIA까지 정보를 공유하며 조사한 결과 가장 유력한 인물입니다. 아직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아 ‘서클 제로’라는 코드명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DEA에 FBI, CIA까지 달라붙었는데 실체가 파악되지 않았다고요?”
“확실한 물증이 없습니다. 정보기관에서는 대역의 존재를 강력하게 의심하고 있습니다만…….”
“대역?”
물증이 없다는 사실과 대역의 존재 여부는 쉬이 연결되기가 힘들었다.
“정확한 물증 확보가 힘든 결정적인 이유가 그의 ‘알리바이’를 깰 수가 없습니다.”
“알리바이요?”
“네. 그는 샌디에이고의 본인 저택 울타리를 나서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저택 내부를 돌아다니니 항상 저택에 머무는 모습은 관측이 되고 있지요.”
“로스 시르쿨로스의 보스가 등장한 것으로 보이는 일이 있을 때 항상 이놈은 저택에서 지내고 있었다는 말이군요?”
“맞습니다.”
“흐음!”
준혁은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로스 시르쿨로스의 보스는 코드명 서클 제로, 미구엘 페레스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알리바이?
대역 따위가 아니었다. ‘게이트 오픈’이다.
게이트를 통해 움직이고, 볼일이 끝난 후 돌아오면 알리바이는 확실하게 완성된다.
게다가 그는 S2등급의 각성자였다. 거느리고 있는 각성자에 본인의 힘을 더하면, 남미 마약 카르텔 전체를 장악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개새끼였네?’
분명한 사실이었다.
마약을 다루는 것부터 이미 용서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인신매매에 매춘이 포함이다. 당연하지만 아동과 관련한 범죄 또한 어마어마한 비율을 차지하리라.
이게 분명하다면 놈에 대해 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준혁이 바일레어 대통령을 향해 물었다.
“이놈, 제가 제거해 드리죠.”
“네?”
“서클 제로, 아니 미구엘 페레스 이 자식 제가 손봐 드리겠다고요.”
“하지만 물증도 없이……. 게다가 보스는 다른 놈일 수도 있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따로 확인해 보고 진행하도록 하죠. 그런데…….”
준혁이 슬쩍 말꼬리를 길게 늘어트렸다.
그 모습에 바일레어 대통령의 얼굴에 궁금증이 떠오르는 순간 준혁이 다시 말을 잇는다.
“문자 메시지로 어떤 대화를 주고받으신 겁니까?”
“헉!”
“설마 저 녀석이 그걸 모를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바일레어 대통령의 시선이 천천히 흑호에게로 향했다.
마주친 흑호의 눈이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준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은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상대는 미국 대통령이라고 딱히 우대를 해 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이럴 때는 빠르게 인정하는 편이 서로를 위해 좋다.
“확실치 않은 이야기라 정확한 판단을 위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물론 약간의 변명 또한 필요하다.
준혁도 굳이 미국의 대통령을 또다시 협박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군요.”
“네. 로건 베런즈의 딸 에이미 베런즈의 죽음과 관련한 새로운 사실이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서두를 꺼낸 바일레어 대통령이 준혁에게 대강의 내용을 이야기해 주었다.
“음, 그 이야기는 일단 나중에 자세히 하는 것으로 하죠.”
새로운 사실이기는 했으나, 준혁은 크게 무게를 두지 않았다.
그가 만나 본 로건 베런즈는 딸을 죽인 범인에게 복수할 수 있다는 정도로 계획을 멈출 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는 카드는 가지고 있는 편이 좋기는 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미구엘 페레스였다.
그리고 준혁은 흑호를 시켜 미구엘 페레스에게 ‘표식’을 달아 놓았었다.
-백효.
-넵!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흑호한테 설명 듣고, 미구엘 페레스라는 놈 감시 좀 해 봐라.
-알겠습니다.
이미 심증은 굳어졌지만, 일단은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확인이 된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관리자 권한 두 개를 가지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정도.
잠시 흑호의 모습이 사라졌고, 뒤이어 백효의 보고가 이어졌다.
-지금부터 감시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