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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장. 적색#3-
준혁의 반응에 로건 베런즈가 반사적으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짧은 순간 뭔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다.
“글쎄요?”
슬쩍 고개를 외로 꼬는 모양새가 약 올리려는 의도다.
“하, 이 새끼 보게?”
준혁은 반사적으로 실소를 터트리며 자세를 풀었다.
아예 팔짱까지 낀 채 삐딱한 자세로 로건 베런즈의 위아래를 훑어본다.
“돌이켜 보니 말이지…….”
“네?”
“참 새삼스럽기는 한데…….”
“…….”
“언제 봐도 너 참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하!”
결국 로건 베런즈도 실소를 터트렸다.
“그렇죠. 저도 당신이 마음에 안 듭니다.”
“그건 익히 아는 이야기지. 자, 그러니 일단 말해 봐라.”
“뭘 말하라는 거지요?”
“하, 이 번거로운 놈.”
“원래 세상은 절차와 형식이 대부분이죠.”
“그게 군더더기다, 이 자식아.”
“글쎄요? 제가 워낙 보수적인 사람이라 전통을 중시합니다.”
“너무 보수적이라 세계 멸망을 계획했나 보다?”
준혁 나름대로 의표를 찌르는 한마디였으나, 로건 베런즈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말을 받았다.
“지구라는 행성, 세계라는 거대한 생태계를 보면 인간의 손에 망가지기 이전의 자연이 가장 오래되고 지켜야 할 전통 아니겠습니까?”
“하아! 진짜 다행이다.”
“뭐가 다행이죠?”
“내가 싸움은 너한테 이길 수 있어서.”
“그거야……. 사실이긴 한데, 그게 다행일 이유가 있습니까?”
“말로는 못 이길 것 같거든.”
만났을 때의 긴장감과 달리, 능글맞은 대화가 길게 이어졌다.
하지만 둘 다 각자의 속셈이 있었다.
로건 베런즈의 목적은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그 목적을 위해 상대가 알고자 하는 비밀을 꺼내 관심을 집중시키는 건 꽤 유용한 방법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했다.
절대 준혁에게 죽지 않는다는 전제 조건이다.
로건 베런즈는 준혁과 싸우면 필패였다. 하지만 싸워서 진다는 것과 죽는 것은 별개였다.
절대적으로 몸을 빼 도망칠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최대한 시간을 끌며 대화를 이끌어 갔다.
준혁도 당연히 자신만의 속셈이 있었다.
‘탐색’이었다.
대화를 이어 가는 중에도 준혁은 ‘탐색’을 이용해 로건 베런즈가 지닌 에너지의 흐름을 살폈다.
로건 베런즈가 가진 힘은 큰 틀에서 봤을 때 준혁과 비슷했다.
붉은색의 영력과 노란색의 마나를 동시에 지니고 있고, 그것이 꽈배기처럼 꼬여 몸속의 맥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똑같은 점은 딱 거기까지였다.
준혁의 하단전과 중단전은 영력을, 상단전은 마나를 베이스로 형성되어 있었다.
반면 로건 베런즈는 영력과 마나가 하단전에 동시에 존재했다.
준혁은 그 꼬여 있는 영력과 마나의 흐름에 집중한 채 대화를 이어 갔다.
그렇다고 대화를 건성으로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너 알고 있는 게 뭐냐?”
“아까부터 묻는데 뭘 말하는 겁니까?”
“게이트 오픈……. 아이, 그게 아니지. 위원회의 회의, 거기 게이트 떠 있는 그 판 아래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이쪽에서 알고 있는 패를 너무 쉽게 내보이는 행동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준혁은 개의치 않았다. 아니,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저쪽이 꾸민 그 ‘무언가’는 꽤 오래전부터 진행된 일이었다.
그 중간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 준혁을 포함한 배면계 귀환자들의 봉인 해제였다.
그 일은, 정확하게 말하면 로건 베런즈가 자신들의 힘을 되찾기 위해 귀환자 전체의 봉인을 해제한 덕분에 준혁도 덩달아 봉인이 풀린 상황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오랜 시간 진행해 온 계획은, 그 관성 때문에 방향을 바꾸거나 멈출 수 없다.
그러니 이쪽에서 안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 반응을 통해 계획의 저변에 깔린 목적을 파악하는 게 이득이었다.
로건 베런즈는 여전히 편안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저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하나 있거든요.”
“너도 이해 못하는 게 있었냐?”
“당연하지요. 그래서 이 질문에 답을 준다면 저도 힌트를 드리죠.”
“힌트? 그건 내가 손핸데?”
이쪽은 비밀을 밝히고, 저쪽은 힌트만 준다면 양쪽 매물의 가치가 맞지 않는다.
“아닌데요?”
“아니라니?”
“제가 아는 비밀은 아주 거대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비밀은 그 정도는 아니죠. 그러니 공평합니다.”
“이 자식 뭘 모르네?”
“뭘 모른다는 말이죠?”
“그런 건 규모로 값을 매기는 게 아니거든. 누가 더 그 정보에 목을 매는가 하는 게 중요한 거야.”
대화하는 분위기 자체는 아주 편안했다.
만담을 나누듯 피식거리기까지 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각자 저변에 깔고 있는 속셈만큼, 주고받는 말속에 숨겨진 한 수 한 수도 치열하고 날카로웠다.
로건 베런즈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요.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보아도 김준혁 씨가 훨씬 더 이 정보를 알고 싶어 하죠.”
“쓸데없이 예리한 놈일세?”
이번에는 준혁이 순순히 인정했다. 당연히 이 또한 나름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자, 그럼 네 그 고매한 자존심에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고, 내가 먼저 말을 해 주지.”
“저도 당신이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르되, 말을 꺼낸다면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서로 신뢰가 쌓이네?”
“저도 그 부분은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금은 느슨한 이야기가 들어오는 순간, 준혁이 기습하듯 말을 뱉었다.
“그래, 생각해 보니 말 못할 거 없지. 내가 시스템 내부 침입했던 거? 그거 내가 시스템이랑 친구라서 그래.”
“네? 시스템과 친구? 하아! 결국 이렇게 실망감을 주는군요. 조금 전의 대화가 무색하게도 시작하자마자 거짓말을 하다니.”
로건 베런즈의 대답이 나오는 순간 준혁은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얼굴 근육의 떨림, 눈동자의 방향, 대답이 나오기까지의 시간까지.
깊이 살펴보던 ‘탐색’까지 멈춘 채 로건 베런즈의 반응을 살피는 데 신경을 모았다.
‘동요했다!’
그 부분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준혁은 또다시 ‘탐색’을 펼치는 동시에 곧바로 말을 받았다.
“거짓말이라니?”
“시스템이 친구라니요? 그게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내가 언제 던전 시스템이라고 했냐? 내가 말한 건 배면계 시스템인데?”
거짓이 없는 사실이다. 다만 조금 덜 말했을 뿐.
“배면계 시스템과 친구? 그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기다렸던 반응이 나왔고, 준혁은 준비했던 한 수를 던졌다.
“못 믿을 건 또 뭐냐? 너도 던전 시스템이랑 짝짜꿍하고 있는데, 나도 할 수 있지.”
‘됐다, 이 새끼!’
너무나 분명하게 보였다.
로건 베런즈의 영력과 마나가 심각할 정도로 크게 뒤흔들리고 있었다.
인위적으로 운용하지 않을 때의 마나와 영력은, 그 사람의 무의식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편안하게 잠을 잘 때는 영력이나 마나도 고요한 흐름을 이룬다.
반면 흥분하거나 감정이 격해지면 마찬가지로 격류처럼 빠르게 흐른다.
몸의 생체 사이클은 물론 감정과의 싱크로율이 매우 높다.
당황하는 감정도 마찬가지다.
어지간하면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는 로건 베런즈가 이 정도로 감정의 동요가 생겼다는 건, 준혁이 건넨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는 의미였다.
즉, 로건 베런즈가 던전 시스템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막연한 생각이 사실로 확인된 셈이었다.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로건 베런즈를 보며 준혁이 느긋하게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네 차례.”
“제 차례라니요?”
“힌트.”
“아하, 힌트. 그런데 어떡하죠?”
“뭘?”
“제가 주려던 힌트가 바로 그거였거든요. 당신이 말한 표현을 빌리자면, 제가 던전 시스템과 친구라는 사실을 알려 주려고 했습니다.”
“이것 참, 상도덕이 없는 놈이네?”
로건 베런즈가 과장스레 제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흐음, 하긴 그렇게 되면 김준혁 씨가 좀 손해를 보기는 하는군요. 그럼 또 어떤 힌트를 드려야 균형이 맞을까요?”
꽤 여유 있는 모습이었지만, ‘탐색’을 통해 에너지의 흐름을 살피고 있는 준혁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놈은 지금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몇 번의 만남과 싸움이 있었고, 매번 로건 베런즈가 낭패를 당했었다.
하지만 놈이 이렇게까지 동요한 적은 없었다.
준혁은 말없이 생각에 잠긴 로건 베런즈의 마나 흐름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놈이 동요하고 있는 이 순간, 애써 감추고 있던 무언가가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음!’
무언가 있었다.
‘저거, 저거 뭐지?’
‘탐색’은 마나를 사용하는 스킬이었다.
이미 영력의 운용을 깨우치고 있는 준혁에게 마나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탐색’을 사용할 때 마나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준혁은 그 마나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가속했다.
맹렬한 마나의 가속과 함께 준혁의 시야가 돌변했다.
지금까지는 육안으로 보는 광경에 에너지의 흐름이 겹쳐 보이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마나를 가속하니 시야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것이 모조리 삭제됐다.
대신 드러난 것은 보다 분명한 에너지의 흐름.
‘글자!’
문자가 보였다.
준혁이 위원회 회의 도중, 시스템 깊은 곳에서 보았던 그 문자였다.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에서 물길처럼 흘러온 문자들이 로건 베런즈의 몸속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워낙 작고 미세한 흐름이라 쌓이는 속도가 거의 없다고 느낄 정도로 느렸다.
하지만 그 글자들은 로건 베런즈의 발에서 시작해 이미 허벅지 어림까지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글자가 쌓인 부위에서의 마나와 영력 흐름이 다른 곳과 달랐다.
글자들 사이를 한 바퀴 돌아 나온 마나와 영력은 그 색이 묘하게도 약간의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다.
‘저게 뭘까?’
문제는 여전히 저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윽!’
과도하게 마나를 운용한 탓인지 준혁은 갑자기 눈앞이 빙글 도는 느낌을 받았다.
적을 눈앞에 두고 빈틈을 보이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황급히 마나의 가속을 멈추고 ‘탐색’도 끊어 냈다.
다행스럽게도 로건 베런즈는 준혁의 순간적인 빈틈을 알아채지 못했다.
준혁이 건넨 말의 충격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탓이었다.
“네가 못 정하겠으면, 내가 궁금한 걸 물어보리?”
“좋습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당신이 말한 정보와 그 가치가 비슷한 질문이어야 합니다.”
“뭐, 일단 들어 보기나 해라.”
중요한 건 대답이 아니다. 이 질문을 던졌을 때 놈의 반응이었다.
“혹시 시스템이 네 몸뚱이도 손보고 있냐?”
“그건 또 무슨 황당한 이야기죠?”
준혁은 로건 베런즈에게 말로는 이기지 못하겠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이번의 대화는 명백한 준혁의 승리였다.
찰나의 순간이기는 했지만, 로건 베런즈의 눈동자가 심각할 정도로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지극히 짧은 순간의 변화였다.
로건 베런즈와 동급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빠른 변화.
하지만 준혁의 수준은 로건 베런즈를 까마득히 초월해 있었다.
아무리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도 놓칠 리가 없었다.
이 정도로 동요한다면 준혁이 던진 질문이 사실이라는 뜻이다.
준혁의 입가에 승자의 미소가 걸렸다.
“하, 오늘 아주 유익한 대화였다.”
대답은 듣지 않아도 이미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도통 모를 말씀만 하시는군요. 쓸데없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건 베런즈가 게이트를 열었다.
하지만 준혁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 놈을 잡을 생각은 없었다. 아니, 아직은 놈의 도주까지 막을 정도로 놈과의 격차를 벌리지 못했다.
그러니 굳이 잡지 않는다.
상관없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린디웨가 걸어 놓은 술법으로 놈의 위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놈이 지금까지 설친 건 던전 시스템이랑 손을 잡아서 그런 거라고 치고……. 그래도 여전히 뭘 꾸미고 있는 건지는 알 수가 없네.’
하지만 준혁은 실망하지 않았다.
오늘 알아낸 것만 해도 꽤나 만족스러운 수확이었다.
‘이 이야기는 린디웨하고…….’
그때였다.
-주인님.
갑자기 흑호가 준혁을 불렀다.
-왜?
준혁의 반응에 흑호는 말 대신 자신의 시야를 준혁과 공유했다.
빠르게 겹쳐지는 시야 속에 준혁의 광경.
그리고 돌변하는 준혁의 표정.
-당장 데리러 와라.
-네, 주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