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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장. 적색#2-
준혁의 배면계 직업은 ‘엽사(獵師)’다.
사냥꾼이라는 뜻이다.
원래의 의미는 배면계의 괴수, 영수, 신수를 사냥하라는 의미다.
하지만 준혁은 사실 인간 사냥에 훨씬 능숙하다.
배면계 신수는 각 개체마다 특성이 다르다.
하나 상대할 때마다 새로운 전술을 짜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이다.
사용하는 기술, 성격, 체형 등은 다르지만 ‘인간’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배면계는 보통 한 번에 100명을 소환한다.
국적이 제각각인 사람들이다.
당연히 성향이나 방식에 따라 파벌이 나뉜다.
이 파벌들이 다들 사이좋게 지낸다면 참 좋은 일이지만, 보통은 분란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괴물을 죽이기 위해 키운 힘을 사람끼리의 싸움에 쓰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다.
그리고 준혁은 그 파벌 사이의 전쟁에서 큰 활약을 했다.
당시에는 등급이 동등한 인간들을 상대했는데도 가장 많은 공을 세웠었다.
그리고 지금은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준혁보다 약하다.
그런 준혁이 처리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이미 결과는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시끄러운 총성으로 가득하던 시가지가 어느새 정적에 휩싸였다.
‘끝인가?’
기감에도 영력이 감지되지 않았고, ‘탐색’을 통해 보아도 영력을 쓰는 사람은 남아 있지 않았다.
작은 도시에 남은 사람은 모두 러시아 쪽 사람들이었다.
총을 든 군인, 그리고 각성자들이었다.
이들은 원래 국경 지대 방어전에 투입됐던 군인들이었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국가는 재난이나 국가 비상사태에 각성자를 동원할 수 있는 법이 제정되어 있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
전쟁 발발 시, 각성자들은 자동으로 군대에 징집된다.
지금 일반 군인들과 똑같은 전투복을 입고 있는 각성자들이 그런 경우였다.
방어전에서 패배한 이들은 끝없이 뒤로 후퇴를 반복했고, 결국 일부 소수만 남아 이 비어 있는 도시까지 밀려난 것이었다.
그마저도 조금 전의 전투에서 대부분 죽고, 살아남은 생존자는 겨우 다섯이었다.
각성자 2명, 일반인 군인 3명이 전부였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이지?”
두 명의 각성자가 불안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눴다.
처음 이 도시에 숨어들었을 때, 생존한 병력은 30명 정도였다.
아즈키스탄에서 동원된 이들은 분명 각성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쓰는 스킬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흔히 아는 각성자와는 전혀 궤가 달랐다.
그리고 그들의 강함 역시 완전히 궤가 달랐다.
그들의 기술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고 느꼈고, 한국의 김준혁이라는 헌터가 말했던 것을 떠올린 것은 며칠이 지난 후였다.
전투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밀렸고, 미친 듯이 도망쳐 마지막에 닿은 곳이 지금 이 소도시였다.
문제는 아즈키스탄 각성자들의 추적 또한 끈질겼다는 점이다.
러시아 군인들은 궁여지책으로 아예 땅을 파고 몸을 숨겼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실낱같은 기대와 달리, 바로 발각되었다.
어떻게든 맞서 싸워 봤지만 저들의 강함에는 속수무책, 결국 모두가 죽고 다섯 명만 남았다.
그런데 희롱하듯 자신들을 공격하던 아즈키스탄 각성자들의 공격이 갑자기 멈췄다.
멀리서 희미하게 비명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내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 이른 것이다.
“내다봐야 하는 거 아닐까?”
“아냐. 그 악마 같은 놈들이 우릴 가지고 노는 걸지도 몰라.”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 앉아 있자는 말이야?”
“다른 방법이 없…….”
쿠웅-!
“으, 으악!”
갑작스레 끼어든 소음에 두 헌터가 비명을 내지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주변은 다시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두 헌터는 서로 눈빛만 교환한 채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거기, 잠깐 나와 보시죠.”
숨어 있는 벽 너머에서 그들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고개를 내밀 엄두를 내지 못했다.
벽 너머의 목소리가 곧장 말을 이었다.
“한국의 김준혁이라고 합니다. 잠깐 나와 보시죠.”
두 헌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김준혁?’
‘지구 최강?’
말은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은 눈빛을 주고받는 것만으로 서로의 생각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다.
난데없기는 하지만, 만약 저 말이 진짜라면?
“하아!”
자칭 김준혁이 갑자기 한숨을 탁 뱉는다.
두 헌터는 또 한 번 시선을 교환했다.
‘뭐지?’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였다.
“이야기 좀 하자니까?”
갑작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온 건 두 사람의 정면이었다.
“으, 으악!”
이구동성으로 비명을 내지른 두 헌터가 동시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김준혁이다!”
“한국의 김준혁!”
TV에서 보았던 그 김준혁이 눈앞에 있었다.
“일단 근처에 있던 놈들은 전부 잡아 놨습니다. 저 벽 너머에 쌓아 뒀으니 알아서 하시고……. 그쪽 지휘관이랑 이야기를 좀 했으면 하는데, 방법이 없습니까?”
“지, 지휘관?”
“제가 도움이 좀 될 것 같아서 말이지요.”
두 헌터의 얼굴이 대번에 환하게 펴졌다.
아즈키스탄 쪽 각성자들의 공격에 그들은 말 그대로 속수무책이었다.
밀려난 부대는 자신들만이 아니었다.
모든 전선이 속수무책으로 뒤로 밀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일본의 그 괴물도 쓰러트린 준혁이 도와주겠다고 하니 기쁠 수밖에.
“잠시만 기다리십쇼!”
황급히 대답한 헌터가 뒤에 있는 군인을 향해 말했다.
“빨리 무전 보내.”
무전기를 메고 있던 병사 하나가 서둘러 통신을 시도했다.
치이익!
이내 회선이 확보되고, 누군가와 통신이 개시되었다.
***
“여기 전투복입니다.”
꽤 커다란 지휘관용 천막 안에서 한 군인이 준혁을 향해 전투복 한 벌을 내밀었다.
“이거면 되는 겁니까?”
“충분합니다.”
군인의 이름은 빅토르 노비코프였다. 러시아 중부 군구, 41군 예하의 84사단 사단장으로 계급은 별 두 개 소장이었다.
준혁을 대하는 빅토르 노비코프 사단장의 태도는 지극히 조심스러웠다.
군대에서 사단장, 그것도 장성급 군인이 자신보다 높은 계급이 아닌 사람에게 이렇게 공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노비코프 사단장의 상황, 84사단의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방증이었다.
사실 그들 역시 속수무책이었다.
전선은 시간 단위로 밀려났다. 전차와 자주포는 당연하고, 하늘에서 폭격까지 퍼부었었다.
하지만 적들은 건재했다.
상부에서는 벌써 핵을 사용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상황은 급박했다.
그러나 핵을 쓰는 것은 말 그대로 최후의 선택지.
노비코프 사령관은 단 며칠 사이에 얼굴이 눈에 띄게 야윌 정도로 극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구원자가 나타났으니 태도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빠르게 옷을 갈아입은 준혁이 노비코프 사단장에게 당부하듯 말했다.
“거듭 말하지만, 제가 끼어들었다는 사실은 비밀입니다.”
“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 도움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준혁은 간이 테이블에 놓인 무전기까지 확인한 후에야 방향을 틀었다.
“그럼 수시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놈들의 위치만큼은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정말 감사…….”
노비코프 사단장이 또 한 번 감사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준혁은 이미 천막에서 사라진 후였다.
***
“12조도 당했습니다!”
스미스의 경악에 찬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스미스의 보고를 받은 로건 베런즈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몇 번째죠?”
“여섯 번째입니다.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네. 그 사람이라고 봐야죠.”
확신에 찬 로건 베런즈의 말에 방 안에 침묵이 맴돌았다.
처음 전쟁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아즈키스탄군은, 아니 아즈키스탄군으로 위장한 무명회는 연전연승이었다.
진다는 것이 말이 안 되었다.
무명회의 구성원은 모두가 배면계 귀환자들이었다.
배면계 귀환자라는 말은 배면계에서 신수들을 봉인했다는 뜻이다.
그들의 등급이 최소한 외천급, 즉 S2등급은 된다는 뜻이었다.
아직 S급을 뛰어넘은 각성자도 드문 와중에 S2등급은 절대 상대할 수 없는 수준의 차이였다.
그런데 어제부터 갑자기 한 개 조씩 연락이 끊어졌다.
스미스는 급히 그 자리로 조사대를 파견했고, 아군 모두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 그 한 번이 아니었다.
벌써 여섯 개 조가 전멸당했다.
외천급의 각성자들의 전멸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말도 안 되는 인물이 등장해야 했다.
김준혁.
배면계 사상 최강의 엽사.
로건 베런즈조차 오르지 못한 혼원급에 오른 배면계 귀환자였다.
“김준혁은 끝까지 우리를 방해할 생각인 모양이군요.”
로건 베런즈의 말에 스미스는 할 말이 궁해져 그저 입술만 달싹거릴 뿐이었다.
“카잔의 상황은 어떻지요?”
“아직 멀었습니다. 200시간 정도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200시간이라…….”
말꼬리를 길게 늘어트리며 무언가를 고민한 끝에 로건 베런즈가 명령을 내렸다.
“일단 철수하십시오.”
“하지만 그랬다가는 카잔의 상황이…….”
“그렇다고 계속 우리 사람들을 죽게 할 수는 없죠.”
“하지만 방법이…….”
“제가 갑니다.”
“네? 김준혁을 상대하시겠다는 말입니까?”
스미스의 얼굴에 크게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김준혁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이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스미스 역시 배면계 귀환자 출신이었다. 귀환을 했다는 것은 배면계 신수들을 모두 봉인했다는 뜻이고, 그렇게 상대한 신수에는 만상만투도 포함되어 있었다.
치가 떨리는 괴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괴물을 김준혁은 단신으로 쓰러트렸다.
배면계 출신이기 때문에 준혁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훨씬 더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로건 베런즈도 강하다.
하지만 준혁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로건 베런즈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다.
스미스의 걱정이 무엇인지 아는 로건 베런즈가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어차피 시간만 끌 겁니다. 그를 진심으로 상대하는 건 아직은 무리입니다.”
“아…….”
“미스터 스미스.”
“네, 치프!”
“당신은 카잔의 일에 집중하세요. 누구도 눈치채서는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로건 베런즈가 빠르게 무장을 착용했다.
금이 가기는 했지만 기능만큼은 멀쩡한 메구탈을 쓰고, 갑옷과 붉은 무상곤을 챙겨 들었다.
“후우!”
여유만만한 평소의 태도와 달리, 로건 베런즈의 입에서 긴장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럼 다녀오지요.”
로건 베런즈는 곧장 게이트를 열어 발을 밀어 넣었다.
쉬우욱-!
게이트를 벗어나자마자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이닥쳤다.
콰콰콰쾅!
황급히 바스타드 소드 형태의 무상곤을 휘둘렀고, 맹렬하게 폭음이 울려 퍼졌다.
“어? 이게 누구야? 아무개새끼잖아?”
낯선 얼굴의 백인 남자가 로건 베런즈를 향해 반가운 듯 인사를 건넸다.
얼굴은 바뀌었지만 ‘아무개새끼’라는 이상한 호칭을 쓰는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김준혁.”
준혁이 피식 웃으며 느긋한 자세로 말을 걸었다.
“이제야 오다니, 부하들을 너무 소모품 취급 하는 거 아니냐?”
“그럴 리가요?”
“그래?”
“그러니까 제가 직접 온 거 아니겠습니까?”
로건 베런즈는 애써 여유로운 태도로 대거리를 했다.
하지만 이미 온몸의 영력과 마나를 잔뜩 끌어 올리고, 어떤 공격이든 대응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 로건 베런즈를 향해 준혁이 타이르듯 말했다.
“아, 그런데 너 말이야. 그 게이트 오픈 가능하면 안 쓰는 게 좋을 텐데?”
그 순간 로건 베런즈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황급히 표정을 지우며 물었지만, 준혁의 눈을 피하지는 못했다.
준혁이 싸늘하게 변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냐? 너 알고 있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