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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장. 적색#1-
불어오는 바람이 쉴 새 없이 방향을 바꿨다.
바람을 맞으며 선 자리, 발아래로는 서울의 북쪽을 두르고 있는 북한산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북한산 인수봉.
암벽 등반을 해야만 오를 수 있는 이 거대한 바위가 준혁과 적색의 약속 장소였다.
과거에는 전문 장비를 갖춘 2인 이상만 등반이 허락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금지된 장소였다.
고립 혹은 조난될 경우 구조가 어려운 지역의 출입을 통제하는 특별법이 제정된 탓이었다.
전문 기술을 갖춰야 진입할 수 있는 장소들이 그 대상이었는데, 인수봉도 거기에 포함한 것이었다.
“옛날에 바위 좀 탔었나?”
준혁은 혼자 바람을 맞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적색은 사람이 없는 장소에서 독대를 요청했고, 그 장소로 이곳 인수봉을 말해 준 사람이 장형준이었다.
얘기하자마자 이곳을 떠올린 걸 보면 그런 쪽으로 관심이 있었거나, 아예 취미로 암벽 등반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홀로 바람을 맞다 보니 괜한 상념이 찾아왔다.
‘거참, 멀리도 왔네.’
지리적인 장소를 뜻하는 게 아니었다. 지금의 상황을 두고 하는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봉인이 풀린 김에 돈 왕창 벌어서 가족들과 호의호식하는 정도가 준혁의 목표였다.
덤으로 생각하는 게 있다면, 거대한 괴물과의 전투 자체를 즐기는 정도.
그랬는데 갑자기 두 개의 시스템이 섞였고, 무명회가 등장했다.
시스템이 엮인 탓에 영수와 신수가 튀어나온 건 필연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난데없이 시스템 아바타가 튀어나왔다.
시스템 내부에 침입하기도 했고, 또 한 번 각성하기도 했다.
그뿐인가.
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등급이 올랐다.
던전 관리자가 되기도 했다.
처음의 목표와는 거리가 벌어져도 한참을 벌어졌다.
그렇게 한참 상념에 빠져 있던 준혁이 갑자기 홱 몸을 돌렸다.
“반가워.”
게이트에서 불쑥 튀어나온 남자가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적색?”
“그렇겠지? 호오, 사람 없는 데를 요구했더니 이런 장소를 골랐군.”
적색은 선글라스를 슬쩍 들어 올려 주변의 풍광을 구경했다.
“통성명은 해야 하지 않겠어?”
“아, 맞아. 그랬지. 내가 네 이름을 알고 있어서 깜빡했지.”
적색은 과장스러운 동작으로 선글라스를 벗어 흔들더니, 이내 준혁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훤칠하게 생긴 라틴 계열의 남자였다.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의 몸을 새하얀 슈트로 감싸고 있었다.
짙은 피부색에 뚜렷한 이목구비가 기가 막히게 조화되어 무척 잘생긴 얼굴이었다.
특히나 깊은 눈과 긴 속눈썹이 어우러져 같은 남자인 준혁이 봐도 감탄 한 번 터트릴 정도의 미남이었다.
적색이 불쑥 손을 내밀며 말했다.
“반가워, 준혁. 나는 미구엘 페레스. 미들네임은 복잡하니 그건 넘어가자고. 국적은 멕시코지만, 딱히 조국에 대한 애정 같은 건 없는 편. 또……. 그래, 여자들한테 인기가 아주 많지.”
묻지 않은 것까지 주절주절 늘어놓는데, 이상하게 마지막 말만 귀에 쑥 박혔다.
준혁이 내밀어진 미구엘 페레스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에 안 드네?”
절대 잘생겨서 그런 게 아니었다.
‘뭐지?’
누가 봐도 호감이 가는 외형이었다. 쓸데없이 말이 많아 보이기는 해도, 크게 거슬릴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았다.
말은 가볍게 하지만 생각보다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고, 은근히 위압감까지 느껴졌다.
그렇다고 그 위압감이 적대감을 느끼게 할 정도는 아니다.
그저 분위기 있다, 정도의 느낌이었다.
이런 사람은 보통은 첫인상부터 호감을 느끼게 한다.
준혁도 사람인 이상 그게 당연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은근하게 불쾌한 감각이 자꾸 뇌리를 건드렸다.
‘뭐지?’
재빨리 ‘탐색’을 사용해 보았지만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기분 탓인가?’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준혁은 지금 혼원급을 넘어 ‘무급’에 오른 사람이었다.
이미 혼원급일 때부터 예지가 꽤 발달해 있었다.
더블 각성을 한 후에는 그것이 한층 더 발달했다.
그렇다고 스킬인 ‘예지’처럼 생생한 미래를 보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막연한 느낌 정도의 수준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상할 정도로 잘 들어맞았다.
린디웨가 말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그런데 지금 미구엘 페레스에게서 불길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불길한 느낌이 아니라 불쾌감이었다.
혹시나 싶어 ‘예지’를 사용해 보았지만, 딱히 이상한 일도 없었다.
하지만 이 느낌을 마냥 기분 탓이라고 할 수 없었다.
‘조심해야겠군.’
이쪽은 드러났고, 저쪽은 드러난 게 없었다.
“자, 원하는 대로 찾아왔어.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미구엘 페레스의 질문에 준혁은 잠시 입을 닫았다.
‘안 되겠어.’
원래는 릴리안 우드를 만나러 가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불쾌한 느낌 때문에 그러고 싶지가 않다.
그렇다고 불러 놓고 다시 돌아가라고 할 수는 없는 일.
“같이 일 하나 하자.”
“일? 무슨 일을?”
원래 하려던 일이 있었다. 그 일을 하는 데 동원해서 이놈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놈 제법…….’
탐색을 통해 본 미구엘 페레스의 마나는 꽤 강력했다.
“제법인데?”
준혁의 말에 미구엘 페레스가 미간에 짙은 주름을 접었다.
“무슨 소리야? 일 하나 하자더니, 갑자기 제법이라는 건 뭐야?”
“제법, 아니 꽤 강하다고.”
미구엘 페레스의 얼굴에 잠시 놀란 표정이 스쳤지만, 그것은 극히 짧은 시간이었다.
이내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온 미구엘 페레스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눈썰미가 제법이네?”
순순히 인정하는 미구엘 페레스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준혁이 볼 때, 이 정도라면 자부심을 가질 만했다.
미구엘 페레스는 최유나를 넘어선 수준이었다.
배면계로 따지면 외천(外天)급이고, 던전 계열로 따지면 S2등급 수준이었다.
최유나보다 훨씬 앞서서 S급의 벽을 깼다고 볼 수 있었다.
‘천재로군.’
최유나보다 앞서 S급의 벽을 깼다는 것은, 홀로 깨닫고 수련해서 그 경지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그런 측면에서 적어도 각성자로서는 ‘천재’라는 평가는 과장이 아니었다.
물론 아무리 강해도 준혁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준혁이 말을 이었다.
“아즈키스탄과 러시아 사이의 분쟁, 거기에 녹색이 끼어들었다는 건 알고 있지?”
“얘기해 줬으니 알고 있지.”
“지금 거기 가서 판을 좀 뒤집어엎어야 하는데, 같이 갈까?”
준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구엘 페레스가 두 손을 흔들었다.
“오오, 노. 나는 평화주의자야. 싸우는 건 질색이라고.”
릴리안 우드가 들었다면 한참을 웃었을 이야기였다.
5인 위원회 내에서도 가장 강경한 주장을 하던 이가 적색, 미구엘 페레스였다.
“뭐, 싫으면 말고.”
준혁도 딱히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위원회의 다른 이들을 직접 보고자 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일단 경고 하나 하지.”
“경고?”
“게이트 오픈 사용 금지, 회의 소집 금지. 누가 회의를 소집하더라도 절대 응하지 말 것.”
미구엘 페레스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이번만큼은 나름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미구엘 페레스의 평정심이 깨어졌다.
“무슨 뜻이지?”
“뭔가 있어.”
“있다니?”
“나도 명확하게 말하기는 힘든데, 한 가지는 분명해.”
준혁은 그렇게 말을 끊으며 미구엘 페레스의 표정을 살폈다.
그와 동시에 ‘감응’을 이용해 흑호를 불렀다.
-흑호.
-네, 주인님.
언젠가부터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네, 주인님.’만 말하는 흑호였다.
-은신해서 여기로 넘어와.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놈 마킹해라.
-네, 주인님.
대답과 동시에 흑호가 ‘도약’으로 공간을 여는 것이 느껴졌다.
‘은신’을 해도 계약자인 준혁은 흑호의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있다.
흑호는 검은 고양이처럼 소형화한 상태로 살금살금 미구엘 페레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후 말을 이었다.
“이상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위험해.”
“그러니까 뭐가?”
“시스템.”
“응?”
“너와 내가 속해 있는 던전의 시스템 말이야.”
“이게 혹시 동양식 화법인가? 그게 아니라면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는데?”
“시스템을 마냥 믿지 말라는 소리야. 시스템 자체에 뭔가 함정이 있는 것 같거든.”
준혁의 말에도 미구엘 페레스는 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까지 질끈 감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사이 흑호가 ‘표식’을 마쳤는지 준혁에게 물었다.
-이제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어. 일단 가 있어.
-네, 주인님.
대화를 마친 준혁은 다시 미구엘 페레스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흑호가 그런 준혁을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말도 없이 ‘도약’을 펼쳐 바일레어 대통령 곁을 향해 공간을 뛰어넘었다.
그사이 생각을 마친 미구엘 페레스가 입을 열었다.
“넌 위원회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으니 모르겠지만, 위원회 위원 중에 시스템을 믿는 사람은 없어.”
5인 위원회의 위원들은 초기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었다.
도대체 시스템의 목적은 무엇이며, 자신들이 관리자가 된 이유는 또 무엇인가에 대해서.
답이 나올 수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기나긴 토론 끝에 5인 위원회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위험하다.’
최소한 그런 생각을 품고 있어야 한다.
호의로 이런 일이 생겼다는 가정은 힘들다.
언제나 조심하고, 경각심을 가지고 있자. 이상한 낌새가 느껴진다면, 그에 대한 것만큼은 숨김없이 이야기를 하자.
그것이 5인 위원회의 약속이었다.
그리고 지금 준혁에게 같은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미구엘 페레스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아는 걸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줄 수는 없을까?”
“아직은.”
“흐음…….”
“너를 어떻게 믿고 내 밑천을 보여 달라는 거냐?”
“그거야 뭐…….”
“일단 됐고. 우선은 내 경고를 명심해. 집으로 가는 길도 되도록 게이트를 사용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미구엘 페레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러지. 어쨌든 넌 나보다 훨씬 강하고,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보았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런 반응에 준혁은 또 한 번 미구엘 페레스를 살펴보았다.
‘뭐지?’
보통 이런 흐름이라면 준혁의 신뢰를 얻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라면, 준혁이 처음 제안한 일에 동참하겠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이다.
이들은 이미 시스템이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린 지 오래였다.
그런데 그들은 그 시스템에 가장 깊숙이 연결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준혁이 가진 정보에 큰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 흐름대로라면, 준혁의 신뢰를 얻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도 당연히 알 것이다.
그런데도 미구엘 페레스는 그 부분에 대해서 단호하게 잘라 냈다.
‘뭐지?’
일반적이지 않은 선택을 한다는 건 무언가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흑호가 또 좀 바쁘겠군.’
아무래도 철저하게 전담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지금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해야 했다.
“연락처라도 남기지 그래?”
준혁의 말에 미구엘 페레스가 피식 웃으며 제 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불쑥 건넨 것은 한 장의 명함.
준혁은 모르는 글자가 적혀 있었지만, 일단은 명함을 받아 들었다.
“그럼 나중에 또 연락하도록 하지.”
말을 끝낸 준혁이 그대로 땅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