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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장. 시스템 속의 위원회#2-
이번에도 푸른색 빛으로 가득 찬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음?’
하지만 뭔가 묘하다.
선과 도형으로 구성된 복잡한 도안 같은 느낌이라는 점까지는 똑같았다.
바닥에 그런 도안이 펼쳐져 있고, 그 위에 이중으로 겹친 두 개의 원 위에 각각의 게이트가 떠올라 있었다.
준혁의 지식으로 해당 도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건 당연한 일.
그럼에도 준혁은 강력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거 뭐지?’
시스템 코어에서 본 도안이나 지금 보고 있는 도안이나 이해 못하는 점은 똑같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차이점이라면 다섯 개의 게이트가 도안 위 허공에 떠 있다는 정도.
릴리안 우드와 적색, 청색 사이에 대화가 이어졌지만 준혁은 ‘탐색’을 통해 보이는 광경에만 집중했다.
이 위화감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뒤로 가야…….’
도안 전체를 한눈에 담아 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리를 더 벌려야 했다.
하지만 지금 준혁의 상태는 위원회 회의를 위해 의식만 빠져나와 있었다.
몸을 움직인다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
‘어, 어어!’
준혁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놀란 외침을 억눌렀다.
뒤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갑자기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이런 게 가능하다고?’
신기한 현상에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도안과 거리가 멀어졌다는 사실 외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
준혁은 일단 도안의 형태를 한눈에 담은 채 정신을 집중했다.
‘저게 시스템으로 이어지는 건가?’
게이트 아래, 두 겹의 원에 서로 마주 보는 두 개의 선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복잡한 선과 도형들 사이로 한참 이어지더니 갑자기 작아지는 방향의 나선을 그렸다.
그런데 그 나선은, 다른 게이트의 원에서 빠져나온 선들도 한데 엉켜 있는 다섯 겹의 나선이었다.
그리고 나선의 중심에서는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저건가?’
준혁은 다시 문제의 나선을 자세히 보기 위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이번에도 의식이 갑자기 앞으로 쭉 전진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나선의 중심 바로 위에 도착했다.
‘어? 이거?’
무언가 있었다.
푸르게 빛나는 선 속에 무언가가 있었다.
‘뭐지?’
준혁은 집중력을 한껏 끌어 올려 선을 살폈다.
‘흐른다.’
무언가 흐르고 있었다.
준혁은 바짝 눈을 갖다 댄 채 그것을 관찰했다.
‘글자?’
강렬한 빛 때문에 명확한 형태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왠지 글자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는 문자는 아니었다.
고대 문명 어쩌고 하며 보았던 고대 문자 같은 느낌이었다.
‘읍!’
뒤이어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듯한 섬뜩함이 몰려왔다.
육체가 없는, 의식만 떠올라 있는 상태에서 그런 것을 느낀다는 게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준혁은 직감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급히 ‘탐색’을 중지했다.
「이봐, 김준혁 씨. 말을 해.」
「우리를 무시하는 것이오?」
정신을 차리자마자 귓속으로 적색과 청색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위…….”
위험하다고 말을 하려던 준혁이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지금 이 자리에는 녹색, 로건 베런즈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놈이 눈치채지 못하게 상황을 풀어놓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몰랐을 때는 당연히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알고 나니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아니, 무서웠다.
‘미친!’
이 정도의 공포는 배면계에서 신수를 처음 만났을 때 이후 처음이었다.
그리고 공포의 깊이는 신수를 마주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난 얼굴 보고 얘기하는 게 취향에 맞으니 알아서들 연락해라.”
준혁은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대로 회의를 빠져나왔다.
“헉, 헉헉!”
의식을 되돌리자마자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창백하게 질린 낯빛이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다.
게다가 온몸이 경련이라도 난 듯 쉴 새 없이 떨렸다.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내가 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겁을 먹은 걸까?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엉뚱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안도감이었다.
그곳에서 빠져나왔다는 사실에 그의 본능이 안심하고 있었다.
그때 정신을 차린 릴리안 우드가 황급히 다가왔다.
“무슨 일이죠?”
릴리안 우드 역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본 준혁은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관리자라는 초월적인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도저히 범접할 엄두가 나지 않는 괴물이었다.
그런 괴물이 이렇게 겁에 질린 표정을 지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준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대답하는 것은 고사하고 릴리안 우드와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왜?’
릴리안 우드는 떠오르는 의문과 함께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눈앞의 괴물을 겁먹게 할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무섭게 다가왔다.
릴리안 우드는 연신 시선을 피하는 준혁에게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조심스레 준혁의 어깨를 감싸 쥘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을 숨을 몰아쉰 끝에 준혁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내뱉은 첫마디.
“회의에 가지 마십시오.”
“네?”
“게이트만 떠 있는 회의 공간, 그곳에 두 번 다시 가지 마세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릴리안 우드가 눈을 끔뻑거렸다.
하지만 준혁으로서도 지금 이 이야기는 꺼내기가 힘들었다.
명확한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관찰자’로 시작한 클래스에 대해 설명하는 것부터 ‘진리를 엿본 관찰자’가 된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준혁이 느낀 것은 막연한 공포였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 그저 막연한 공포였다.
그 감정으로 타인의 이해를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일단은 제 말에 따라 주십시오. 그리고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준혁은 바로 게이트를 열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잠시 멈칫했다.
회의 공간에서의 그 감정을 떠올리니, ‘게이트 오픈’이라는 관리자 스킬을 사용하는 것도 꺼려졌다.
한 번쯤 괜찮겠지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몰랐으면 모르되, 알게 된 이상 단호하게 끊어야 했다.
준혁은 흑호를 불러 ‘도약’으로 공간을 뛰어넘었다.
***
“문자?”
“어, 그게 뭐랄까? 상형문자? 아니, 그건 아니고. 아무튼 처음 보는 거였는데 느낌은 글자 같더라고.”
“흐음.”
린디웨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준혁도 의자를 끌어와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 지금 있는 방은 준혁의 집에 있는 준혁의 방이었다.
린디웨는 김준석의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고, 이세연이 준혁의 방을 임시로 내어 준 것이다.
그런 탓에 문밖에서 지유와 청랑이 말도 못한 채 숨죽이고 앉아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는 준혁의 표정이 워낙 심각한 탓에, 어린 지유조차 어리광을 부리지 못하는 것이다.
“글자……. 문자…….”
생각에 몰두해 있던 린디웨가 갑자기 중얼중얼 소리를 내며 말하기 시작했다.
준혁은 린디웨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고 가만히 그 모습을 주시했다.
“문자……. 문자……. 정보……. 정보?”
한참을 중얼거리던 린디웨가 두 눈을 번쩍 떴다.
준혁이 다그치듯 물었다.
“알 것 같으냐?”
“음, 그게……. 확신은 없어. 없는데……. 문자의 용도는 말을 표시하기 위한 거잖아. 그리고 말을 전하는 것은 정보의 전달.”
“정보의 전달?”
“어. 그리고 이 경우는…….”
린디웨가 하려던 말을 준혁이 급히 마무리했다.
“정보 탈취?”
“그런 느낌이야. 좀 막연하기는 한데, 관리자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가 빠져나간다면……. 게다가 너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빠져나가는 거라면 몰래 정보를 수집하는 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걸 모아서 뭘 하는데?”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준혁이 그 침묵을 참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미치겠네!”
무언가 단서가 잡히고, 그것을 토대로 추론을 했다.
하지만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추론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인지 범위로 시스템을 이해할 수 없는 탓이다.
지금 이런 과정만 몇 번째 반복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불만이 실체가 되어 튀어나온 것이다.
린디웨가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그거 써 볼 수 있어?”
“쓴다고?”
“네가 봤다는 그 문자.”
“음? 음……. 그릴 수는 있지.”
알지 못하는 문자는 그저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준혁은 곧장 종이와 펜을 꺼내 자신이 보았던 문자들을 하나하나 그려 보았다.
강력한 빛에 휩싸여 있었기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것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무리다.
하지만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문자의 형태를 몇 개 정도 그려 내는 건 가능했다.
준혁이 그려 준 문자를 확인한 린디웨가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알지 못하는 문자야.”
“쳇!”
“하지만!”
린디웨가 손가락을 하나 불쑥 들어 보인다.
“응?”
“나는 시스템 내부를 엿볼 수 있지. 그러면 이 문자에 대한 정보를 확인해 볼 수 있을지도?”
“아!”
린디웨는 언제든 시스템에 접속하기 위해 뒷문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로 들어가 이 문자에 대한 정보를 찾아낼 가능성이 있었다.
“힘들어도 꼭 좀 알아봐.”
“그래야지. 아, 그런데 이건 확신은 없는데……. 아무래도 네가 겁을 먹었다는 게 좀 신경이 쓰이거든.”
“나도 인간인데 겁 좀 먹을 수도 있지.”
“인간의 감은 의외로 정확할 때가 많아. 특히 너처럼 인간의 격마저 넘어선 존재가 느끼는 감이라면 정확하다고 봐도 돼. 그런데 방금 말했듯이 너는 인간의 격을 뛰어넘었어.”
“그래서?”
“그런 존재가 본능적인 공포를 느낀 거잖아.”
“어? 그렇게 봐야 하나?”
이렇게 이야기를 들으니 그 상황이 새삼 더 무섭게 다가왔다.
“던전 시스템, 그 안에서 뭔가 정말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해.”
“흐음.”
“그러니 네 감이 말하는 대로 위원회 회의는 직접 만나서 해.”
그렇잖아도 그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린디웨의 말을 들으니 한층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홀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한 준혁이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겠네.”
준혁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챈 린디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로건 베런즈, 그자가 가장 끝에 있는 단서일 가능성이 커. 놈을 잡아서 추적해 들어가는 수밖에. 그러니…….”
“그래. 그놈을 잡아야지.”
해 볼 수 있는 걸 한다.
가만히 넋 놓고 있는 것보다는 그러는 쪽이 훨씬 나았다.
“그래야겠네.”
뭔가 한참을 돌고 돌아 결국 원점인 것 같았지만, 준혁은 오히려 힘이 솟았다.
지금은 뭐라도 하는 쪽이 아까 느꼈던 공포를 희석시키는 데 좋았다.
그런 무서운 무언가에게 맞설 단서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의욕도 생겼다.
가볍게 손목을 턴 준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준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장형준입니다.)
“알죠. 무슨 일이시죠?”
유민섭이 자리를 비운 동안 장형준이 혼원 길드 내부를 관리하기로 했었다.
(회사에 준혁 씨를 찾는 전화가 왔습니다.)
준혁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혼원 길드로 걸려 오는 전화의 절반 이상이 준혁을 찾는 전화였다.
그래서 준혁을 찾는 전화가 실제로 준혁에게 연결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장형준이 이렇게 따로 전화를 했다는 건 그럴 이유가 있다는 의미.
“누구죠?”
(그것이 좀 애매한데……. 레드 게이트라고 전해 달라더군요.)
장형준은 던전 관리자들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뭔가가 있나 싶어서 준혁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한 것이다.
레드 게이트, 자신을 그렇게 칭할 사람은 준혁이 아는 한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던전 관리자 중 ‘적색’이다.
“당장 바꿔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