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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받고 각성 더!-171화 (171/240)

-171-

-60장. 던전 시스템#3-

시야 가득 빛이 들어찼다.

조금 전까지 지나왔던, 함정이 가득 도사리고 있던 그 공간도 빛이 가득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완전히 결이 달랐다.

질서정연했다.

그러면서도 매우 복잡했다.

푸른빛으로 이어진 선이 공간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사각형과 삼각형, 그리고 원형의 도형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도형과 도형은 선으로 이어지고, 모인 선이 어디론가 뻗어 나가는가 싶다가, 다시 또 다른 도형으로 이어진다.

그것들이 거대한 공간을 가득 채운 채 끊임없이 빛을 뿜어냈다.

일관성도, 패턴도 없었다.

선과 도형을 제멋대로 뿌려 놓은 것 같았다.

한마디로 무작위였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준혁이 느낀 감정은 ‘편안함’이었다.

무언가 특별한 점을 확인했기에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이 어지럽기 짝이 없는 의미 불명의 도형들이 편안했다.

저 속에 이대로 몸을 던지고 쉬고 싶다는 충동이 불쑥 솟구칠 정도였다.

‘참아!’

스스로를 향해 그렇게 외쳤다.

대원칙.

저것은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흐름이었다.

이 편안함의 정체도 그것이리라.

이대로 몸을 던진다면 린디웨의 말대로 ‘무아’의 상태가 될 것이 뻔했다.

준혁은 애써 정신을 날카롭게 벼리며 복잡한 문양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집중하면 할수록 오히려 정신이 아득해졌다.

‘제길!’

아득하게 가라앉는 정신으로 저것을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

으득!

준혁은 그대로 혀를 짓씹었다.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비릿하게 넘어오는 피 맛에 번뜩 정신이 깨는 기분.

준혁은 혀를 깨문 채 다시 한 번 복잡한 도형에 정신을 집중했다.

도형은 마치 거대한 종이에 그려 놓은 것 같은 형태였다.

그런데 그런 종이가 한 장이 아니었다.

한 층 들어가면 또 다른 형태의 복잡한 문양들이 새롭게 나타났다.

그리고 또 한 층.

다시 한 층.

모든 층이 선과 도형으로 구성된 복잡한 문양이었다.

하지만 층이 바뀔 때마다 그 배열이 변했다.

으드득!

준혁은 다시 한 번 혀를 깨물었다.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마치 의식이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도대체 얼마나 더 올라가야…….’

욕구가 솟구쳤다.

반드시 이 끝을 보아야 한다는 강렬한 욕망이 준혁의 뇌리를 가득 채웠다.

그럼에도 준혁이 ‘사고’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혀를 깨문 고통과 냉철하게 가다듬은 이성 덕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올라갔을까.

‘어?’

무언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언가가 보였다.

‘끝? 아닌데?’

강렬한 직감이 그렇게 말했다.

아직 끝을 본 것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 저 멀리 눈에 들어오는 저것은 지금까지와 다른 무언가였다.

‘여섯? 아니, 일곱 층?’

그 정도만 더 올라가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한 층 올라갔다.

‘역시!’

달랐다.

준혁이 수없이 많은 층을 오르며 보아 왔던 문양들은 모두 푸른빛으로 그어져 있었다.

하지만 저것은 뭔가 달랐다.

겹겹이 쌓인 다른 문양들이 모두 파랗게 빛나고 있기에 그 영향으로 아직 명확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것은 뭔가 다르다.

‘끄윽!’

그러나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안 돼!’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었다.

몸과 의식이 분리되고, 어디론가 완전히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

‘젠장!’

위험하다.

날카로운 직감이 준혁의 뇌리를 두드리며 거센 경고를 보냈다.

준혁은 아득해지는 의식 속에서 아쉬운 마음으로 문제의 그것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냉정한 판단을 해야 할 때.

-적사!

“크악!”

준혁이 비명과 함께 번뜩 정신을 차렸다.

동시에 무릎에 힘이 쑥 빠지며 몸이 뒤로 넘어갔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준혁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더욱 이상한 일은 피곤함이었다.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준혁의 수준은 혼원급을 넘어 무급까지 올라가 있었다.

맨몸으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아도 지치지 않는 체력이었다.

그런데 지금 무지막지한 피로가 온몸의 근육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뭐지?’

가장 이상한 점은, 준혁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던전 시스템의 코어를 들여다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온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저절로 눈이 감겼다.

이 정도의 피로는 만상만투와 싸웠을 때도 느껴 보지 못했다.

게다가 한참이나 숨을 몰아쉬었는데도 호흡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때 린디웨의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피곤하냐?]

-어. 왜 이렇게 몸이 피곤하지?

[당연하지.]

-당연하다고?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렇게 힘든 게 말이 되나?

[대원칙을 들여다봤잖아.]

-그게 무슨?

준혁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체력이 소진되는 게 당연하다니.

[대원칙이 뭔지는 기억하지?]

-물론.

[그건 우주가 움직이는 법칙이라고 했던 말도 기억하지?]

-그러니까 내가 그거 보러 간 거잖아.

[뭐, 일단 적사가 안전장치가 되어 준다니 놔두기는 했는데……. 생각해 봐. 넌 우주, 아니 그냥 차원의 법칙을 들여다본 거야. 인간의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그, 그래서?

[이 차원 전체를 보면 인간의 존재는 티끌만도 못하다고. 그런데 차원의 법칙을 보았어. 그 중압감이 어느 정도일 거라고 생각해?]

설명을 들은 준혁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왜? 놀랐냐?]

-놀랐지.

[하긴 충분히 놀랄 만한…….]

-아니.

[응?]

-그걸 알면서도 말도 안 해 줬다는 게 놀랍다고.

[응?]

-허, 그 정도로 위험했으면 말을 했어야!

[뭐래? 말렸어도 들여다봤을 거잖아.]

그건 그랬다. 하지만 분명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알고 시작하는 거랑 모르고 시작하는 거랑 같냐?

[처음에는 말릴까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쩌면 너는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

-왜?

[무급.]

-그게 왜?

[우리 추측이 맞는다면, 너는 승격을 준비하고 있는 상태야. 그렇다면 견딜 수 있을 거라고 봤어.]

-그게 뭐야? 결국 확신은 없었던 거잖아.

준혁이 여전히 따지듯 물었다. 하지만 린디웨는 아무런 메시지도 띄우지 않았다.

마치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린디웨의 모습이 떠올라 준혁도 더는 따지지 않았다.

-어쨌든 무사하니…….

[알지? 내 상태?]

-응?

[소멸이 시작된 거 봤잖아.]

-어? 어떻게 알았냐?

준혁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되물었다.

[내가 시스템 아바타인데 그 정도도 못 느꼈을까? 근데 아는 척도 안 하더라?]

-험험! 뭐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대견하네? 그런 다정함도 있고?]

-뭐래?

난데없는 칭찬에 준혁이 퉁명스럽게 한마디 툭 뱉었다.

[뭐, 아무튼 그래서 그랬어.]

-무슨 말이야?

[네 말을 듣고 보니 뭔가 이상했어. 법칙을 건드릴 수 없는 존재가 법칙을 건드렸다. 뭔가 하나 빠진 것 같지 않아?]

-법칙을 건드릴 수 있도록 도와준 누군가?

[그렇지. 역시 이럴 땐 이야기하기 편하다니까? 즉, 이 일은 생각보다 아주 스케일이 커.]

-젠장! 신수 새끼들 날뛰는 것보다 스케일이 크면 지구가 아니라 우주급 스케일이네.

[그럴 가능성이 있지. 그래서 필요했던 거야. 내가 소멸한 후에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자가. 그리고 현재 지구상에서 그게 가능한 사람은 너밖에 없고.]

-그게 대원칙을 들여다보는 거랑 무슨 관계라도?

[이해 못했지?]

맥락 없이 던지는 질문에도 준혁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대원칙?

[응.]

-당연히 이해 못했지. 온통 선에 네모, 세모, 동그라미만 있는데 뭘 이해해?

[흐음, 탐색이라는 걸로 보면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네? 어쨌든 이렇게든, 저렇게든 이해 못하는 건 당연한 거고.]

-근데 왜 물어봐?

[성과는 있었거든.]

-무슨 성과?

[상태창부터 열어 봐.]

-어?

린디웨의 말대로 상태창을 연 준혁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뭐냐?

[나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 다만, 네가 대원칙을 들여다보는 사이에 생긴 변화인 건 확실해.]

상태창에는 오직 한 가지만이 바뀌어 있었다.

등급과 스탯, 스킬은 모두 그대로인데 딱 하나만 바뀌어 있었다.

클래스.

‘심안의 관찰자’가 ‘진리를 엿본 심안의 관찰자’로 바뀌어 있었다.

-거, 이름 참 길기도 하네.

[어때? 뭔가 있는 것 같지?]

-그럼 뭐 하냐? 그 ‘뭔가’가 뭔지 모르는데.

[일단은 네가 대원칙을 들여다봐서 생긴 변화야. 차차 밝혀지겠지.]

시스템 메시지와 생각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거칠던 호흡이 가라앉고, 체력도 빠르게 회복되었다.

자세를 고쳐 앉은 준혁이 말을 이었다.

-그거야 두고 봐야 아는 거고. 아, 그런데 뭔가 이상한 걸 봤다.

[이상한 거?]

-들어가서 본 건 아까 말한 대로 선, 네모, 세모, 동그라미 이런 것들이 막 나열된 거였거든?

[그런데?]

-이게 뭐랄까? 종이에 무슨 설계도 그려 놓은 것 같은 느낌? 그런 거였는데……. 어쨌든 이 종이가 한 장이 아니더라고. 겹겹이 쌓여 있어서 그걸 다 보려고 한 층씩 타고 올라갔단 말이지.

[흠, 타고 올라가도 계속 그런 설계도 같은 것만 보였겠지.]

-그랬지. 그랬는데……. 뭔가 다른 게 있더라고. 명확하게 보이지는 않았는데, 분명 다르게 보이는 게 있었어.

[이상한데?]

잠시 멈칫한 린디웨가 빠르게 메시지를 이어 붙였다.

[일단 나도 좀 살펴봐야겠다. 잠깐 기다려.]

-그래.

지난번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 준혁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뒤이어 옅게 울리는 바람 소리와 함께 사방이 적막으로 물들었다.

그런데 저번에는 금방 되돌아왔던 린디웨가 이번에는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 이상한 걸 확인하고 있나?’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제 가자.]

-하, 너도 양반은 못 될 듯.

[응? 내 생각 하고 있었냐?]

-그걸 다 알아듣네? 한국 사람 다 됐네.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일단 돌아가자.]

-알았다.

***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소파에 죽은 듯 쓰러져 있던 린디웨가 번쩍 눈을 떴다.

“후우! 알아낸 것 같다.”

“뭘?”

“니가 봤다는 거.”

“그래? 그게 뭔데?”

“음……. 아무래도 시작된 것 같아.”

“뭐가?”

“시스템 융합.”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네가 본 거……. 영력이야.”

준혁이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영력?”

“생각해 봐. 너 탐색 사용하면 기운이 눈에 보이는데, 색깔이 다르다고 했잖아.”

“그랬지.”

“니가 본 게 무슨 색이었는지 떠올려 보라고.”

“아!”

금방 이해한 준혁은 눈을 감고 그때의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복잡한 도면들을 쉴 새 없이 지나쳐 문제의 그것이 보일 때쯤의 기억에 도달했다.

“아!”

확실하게 떠올랐다.

“맞네. 빨간색!”

당시에는 푸른색 도면에 휩싸여 제대로 구분이 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차분하게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것은 분명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전에 링크에 대해서 말했지? 배면계에서 던전 시스템을 향해서 통로가 뚫렸다고.”

“그랬지.”

“아무래도 그 통로를 통해 영력이 흘러 들어오는 것 같아. 그리고 내 생각에는 그게…….”

“시스템 융합의 징조라는 말이지?”

“그렇지.”

하지만 준혁은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준혁의 반응에 린디웨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뭔가 이상해서.”

“뭐가?”

“영력은 근원인 ‘기운’에서 파생되는 에너지잖아. 그리고 규칙을 타고 흐르는 그 에너지는 엄청 강했단 말이지. 그러면 보통 영력이 ‘기운’으로 환원돼. 더 강하고 원류인 기운에 물들어서 파생된 성질들이 사라진다고.”

준혁의 설명에 린디웨의 표정이 돌변했다.

“어? 그, 그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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