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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장. 던전 시스템#2-
“상황!”
탕, 타탕!
다급한 외침과 어지러운 총소리가 한데 울려 퍼졌다.
그 직후 내려앉은 것은 고요한 적막이었다.
사람의 장막에 싸여 있는 바일레어 대통령, 매캐한 화약 냄새, 총을 겨눈 경호원들, 날카로운 날붙이를 찔러 넣은 각성자 경호원까지.
그리고 민망한 표정의 준혁이 서 있었다.
찌그러진 탄두가 어지럽게 바닥을 굴렀다.
“음…….”
준혁이 민망한 신음을 입에 문 채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 제가 좀 갑자기 찾아왔군요.”
“미, 미스터 김?”
바일레어 대통령이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준혁을 불렀다.
“다음부터는 미리 전화라도 드리겠습니다.”
터벅, 터벅.
준혁에게 칼을 찔러 넣었던 각성자가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 발소리에는 짙은 허무감이 배어 있었다.
“제 실수니 옷값은 청구하지 않겠습니다. 하하하!”
민망함을 감추려 농담을 던져 보지만 누구도 웃지 않을 농담이었다.
칼을 회수한 각성자가 풀어진 동공으로 입을 벌렸다.
“몬스터…….”
각성자는 S급 딜러였다.
VIP가 위험한 상황에서 그는 고민하지 않았다.
훈련받아 몸에 각인된 지침 그대로 행동했다.
갑작스레 공간이 일그러지고,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몸을 날렸고, 가장 강력한 스킬을 펼쳤다.
그런데 준혁의 몸에 긁힌 상처 하나 만들지 못했다.
‘어떻게?’
자괴감마저 몰려온다.
준혁이 인간을 초월한 강자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만약 대통령을 해치려고 마음먹었다면?
마음먹은 대로 일이 흘러갔을 것이다.
바일레어 대통령이 급히 상황을 수습했다.
“손님일세.”
그 한마디에 경호팀장도 급히 입을 열었다.
“상황 해제.”
바일레어 대통령이 대피해 있던 지하 벙커가 빠르게 안정되고, 잠시 후 두 사람은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았다.
“현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로건 베런즈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으로 모으는 겁니다.”
“하지만 그는 얼굴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지 않나요?”
“CIA가, 미국의 정보 통합체가 변장에 굴복할 정도로 정보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는 준혁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정보 관리는 넬슨 국장의 소관이니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대답하는 바일레어 대통령은 표정 관리에 모든 전력을 쏟아부어야 했다.
존 넬슨은 준혁에게 가는 정보를 통제하려 했었다.
무슨 수를 쓰든 준혁에게 많은 것을 얻어 내기 위함이었다.
그 사실을 바일레어 대통령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모두 쓸모없는 짓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일본의 괴물을 쓰러트리는 모습을 보았었다. 준혁이 정말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감하지는 못했었다.
그걸 깨달은 것은, 자신을 경호하는 S급 각성자의 칼이 겨우 준혁의 옷만 찢었다는 것을 본 직후였다.
단순히 ‘아는 것’과 ‘실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시급을 다툽니다.”
“알고 있습니다. 모든 자원을 거기에 쏟아부으라 명령하죠.”
“네. 그럼 저는 따로 조사할 것이 있어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준혁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사실 지금의 상황은 준혁의 의도였다.
존 넬슨을 만난 후, 그가 정보를 다 주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
직접적으로 협박하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알아서 깨닫게 하는 편이 훨씬 더 잘 먹히기 때문이다.
날아오는 총알과 S급 각성자의 공격을 다 받아 준 것 또한 의도한 행동이었다.
힘의 우위를 확실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준혁은 거기에 쐐기를 박았다.
“아, 저 녀석은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대통령님의 안전을 확실하게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얌전히 웅크리고 있던 흑호가 거체를 일으켰다.
“저, 저 호, 호랑이 말입니까?”
흑호의 덩치는 바일레어 대통령이 몸을 숨기고 있는 벙커의 천장에 머리가 닿을 정도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다.
-야, 소형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흑호가 몸집을 줄여 검은 고양이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 정도면 부담이 덜하시겠죠?”
이미 거대한 덩치를 본 이후였다. 작아진다고 크게 바뀔 건 없었다.
그저 시각적인 위압감이 줄어든 정도.
하지만 지금 이곳에 준혁에게 ‘노’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흑호는 저를 데려다주고 다시 여기로 돌아올 겁니다.”
게이트를 열어 이동할 수도 있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집과 회사는 편하게 오갈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게이트 오픈’은, 관리자라는 사실은 일단은 숨기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폴짝 뛰어온 흑호가 ‘도약’을 준비했다.
준혁은 흑호와 함께 이동하기 전 한 번 더 강조하듯 말했다.
“완벽하게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 대통령님의 안전은 저 녀석이 책임질 겁니다.”
이 정도면 대놓고 협박이었다.
***
“리쉬옌, 고민이라도 있어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리쉬옌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시커먼 하늘만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던 유민섭이 복잡한 표정으로 방향을 틀었다.
조금 걸어가니 피워 놓은 화톳불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은 일행들이 보였다.
“뭐래요?”
유민섭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강이찬이 물었다.
대답할 것이 없는 유민섭은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할 뿐이었다.
“으음, 문제네요. 향수병이라도 난 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강이찬의 목소리에도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뭔가 이상해요.’
그렇게 말한 이후 벌써 5일이 지났다. 그동안 리쉬옌은 단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곳에 머문 지도 당연히 닷새째다. 그동안은 수련도, 사냥도 하지 않은 채 우두커니 시간만 보냈다.
답답하기는 하지만 리쉬옌의 성격을 알고 있기에 일단은 기다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누군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사냥.”
확실히 필요한 일이었다.
저장해 놓은 식량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그것도 이제 슬슬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같이 가자.”
유민섭도 따라 몸을 일으켰다.
현실과 이곳의 시간차는 어마어마했다.
현실의 하루가 배면계에서는 거의 60일 정도의 시간이었다.
당연히 그동안 사냥법을 비롯한 기본적인 생존 방법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숙지한 상태였다.
그렇게 두 사람이 어디론가 움직이려 할 때였다.
“어? 잠깐만요!”
강이찬이 갑자기 두 사람을 불러 세웠다.
“왜?”
물어보는 유민섭에게 강이찬이 한쪽을 가리켰고,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리쉬옌의 모습이 보였다.
고민스럽던 조금 전까지의 표정과 달리 지금은 무언가 결심한 듯한 얼굴이었다.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다.”
유민섭과 최유나가 재빨리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환경이 변하고 있어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단은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며칠 전에 갑작스러운 위화감이 느껴졌어요. 그런데 위화감이라는 게……. 뭔지 정확하게 밝히기 전까지는 그 실체를 알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그걸 관찰하고 있었어요.”
지난 5일간 꼼짝도 하지 않고 하늘만 보고 있던 이유가 그것이었던 모양이다.
“환경, 정확하게는 영력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배면계는 짙은 영력으로 가득 차 있는 세계였다.
리쉬옌은 거기에 변화가 생긴 것을 느낀 것이었다.
불쑥 내민 리쉬옌의 주먹 사이로 고운 흙이 떨어져 내렸다.
“배면계에는 이런 흙이 있을 수 없어요. 항상 풍부한 영력을 머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흙이 메마르기 힘들죠.”
거기까지 말을 들은 유민섭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 시스템 융합?”
리쉬옌은 고개를 저었다.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배면계의 영력 농도가 옅어지고 있어요. 확연히 느껴지는 정도는 아니지만, 꾸준히 옅어지고 있다는 건 확실해요.”
배면계 시간으로 5일은 현실에서의 2시간 정도였다.
즉, 5일 전은 지구에서 모든 각성자의 눈앞에 링크에 대한 공지가 떠오른 그 시점이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배면계에 있는 이들에게는 그 공지가 뜨지 않았다.
그렇기에 리쉬옌도 5일이나 관찰하고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백호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리고 리쉬옌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수련에 박차를 가해야죠.”
순간 최유나를 제외한 모두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
불안감이 있기는 했지만 지난 5일은 꽤 행복한 시간이기도 했다.
혹독하게 자신들을 몰아붙이는 리쉬옌의 폭거에서 해방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보다 더 박차를 가하겠다고 한다.
강이찬이 순간적으로 초점을 잃은 눈으로 중얼거렸다.
“난 죽었네.”
배면계에서의 리쉬옌은 내성적인 폭군이었다.
***
-여긴 어디냐?
준혁이 물었다.
대답은 준혁의 상태창에 들어온 린디웨가 했다.
[시스템 내부.]
-이전이랑 분위기가 다른데?
[다르지.]
과거에 들어왔던 시스템 내부는 우주의 축소판 같은 공간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었다.
곳곳에 날카로운 예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여차하면 준혁의 몸을 난도질할 기세였다.
[일종의 방어 시스템이야.]
-방어 시스템?
[저번에 네가 들어와서 난장판을 만들었잖아. 그러니 시스템이 그에 대한 대비를 한 거지.]
-그래?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준혁이 ‘탐색’을 펼쳤다.
“읍!”
옅은 신음을 흘린 준혁이 비틀거리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야, 뭐야? 왜?]
꽤 놀랐는지 급히 묻는 린디웨의 시스템 메시지 속 글자가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허, 이거 장난 아닌데?
[왜?]
-시스템이라는 거, 완전히 에너지의 집합체였네?
[그거야 당연하지.]
‘탐색’을 펼친 준혁의 눈에는 빛의 향연이 펼쳐졌다.
푸른빛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높은 광량의 푸른 입자들이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수억, 아니 수조에 달하는 빛의 입자가 어지러운 궤적으로 서로 뒤엉키는 장면은 멀미를 일으킬 정도였다.
혼원급까지 넘어선 준혁의 감각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흐름이었다.
-보통 놈이 아니라는 건 알겠네.
[그럼 보통이겠냐?]
-시스템이 괜히 ‘시스템’이 아닌가 봐?
[그렇지. 그리고 배면계 시스템도 만만치 않게…….]
-그건 됐고요.
단박에 린디웨의 말을 끊은 준혁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저쪽 방향으로 가면 되지?
[그건 또 어떻게 알아?]
-탐색으로 보면 전혀 다른 게 보이거든.
준혁은 ‘탐색’을 유지한 채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에너지의 흐름을 살핀 덕분에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함정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당연히 그 모든 함정을 피해 걸었고, 그렇게 이전처럼 보이지 않는 벽에 도착했다.
시스템 코어를 감싸고 있는 내벽이었다.
[자, 이제 눈 감고 쉬고 있어.]
지난번 왔을 때, 대원칙에 빨려 들어갈 뻔했었다. 그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린디웨가 당부했다.
하지만 준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응?]
-내가 다시 한 번 봐야겠다.
[내부를?]
-어. 사실 따라온 데는 그런 목적도 있었거든.
[미쳤어? 그냥 우주의 일부분이 되고 싶은 거냐?]
-당연히 보험은 준비해 왔고.
키하아아!
슬쩍 들어 올린 소매에서 적사가 머리를 내민 채 사나운 바람 소리를 내뿜는다.
[아냐. 그래도 이건 위험해. 그거 봐서 뭐 하려고?]
-탐색.
[응?]
-탐색으로 보면 뭔가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야, 안 돼. 너무 위험해.]
린디웨가 글자 크기를 최대로 키우며 격렬한 반대 의사를 내비쳤다.
하지만 지금 린디웨가 준혁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적사, 준비해라.
-배고파!
적사가 대답과 동시에 입을 쩍 벌렸다. 물론 입만 벌릴 뿐 이빨을 박아 넣지는 않았다.
준혁이 정말 위험하다는 느낌이 왔을 때, 고통을 주어 깨우기 위한 준비였다.
[야야, 하지 말라고!]
린디웨가 끝까지 말렸지만 준혁은 그대로 손을 뻗었다.
지잉!
이전에 그랬던 그대로 손바닥이 닿은 부분에서 푸른빛이 번지며 벽에 둥근 구멍이 나타났다.
준혁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탐색’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준혁의 눈에 또 다른 기묘한 세상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