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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장. 링크#1-
불어온 바람이 온몸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바람에 묻은 채 날아온 무언가가 피부에 끈끈하게 달라붙는다.
흔히 생각하는 습기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밀도가 높고 무겁다.
그런데 묘한 건, 습기처럼 끈끈하게 피부에 달라붙는데 불쾌한 느낌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단순히 불쾌하지 않다가 아니다. 오히려 아늑한 느낌까지 들었다.
따뜻한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몸을 담근 것 같은 포근함마저 느껴졌다.
“음…….”
유민섭은 처음 맞이한 그 낯선 감각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조금 더 이 감각을 있는 그대로 음미하고 싶은 느낌.
그때 귓전으로 리쉬옌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배면계에서 유일하게 좋은 점 하나가 이 공기죠.”
그제야 눈을 뜬 유민섭이 리쉬옌에게 시선을 돌렸다.
함께 온 일행들도 리쉬옌에게 시선을 집중한다.
리쉬옌이 손으로 마치 공기를 만지듯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배면계는 영력이 매우 짙은 세계예요. 그래서 공기 중에도 이렇게 손에 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영력이 배어 있죠. 하지만 그 외에는 보시다시피.”
리쉬옌의 말에 일행들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채색의 세상이었다.
온 세상에 두꺼운 재가 내려앉은 듯 잿빛으로 뒤덮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땅에 자란 풀과 나뭇잎마저도 탈색이 된 듯 회색을 띤 녹색이었다.
리쉬옌이 냉큼 몸을 날려 나무에 매달린 열매 하나를 따 왔다.
마치 사과처럼 생긴 주먹만 한 열매조차 탈색이 된 듯한 빛깔이다.
“공기나 물에 영력의 농도가 높으니 과일조차 영력을 품고 있죠.”
리쉬옌이 손으로 가볍게 과일을 쪼개 일행들에게 하나씩 내밀었다.
“먹어 봐요.”
아삭!
“오!”
“뭐, 뭡니까? 이거 겁나 맛있는데요?”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새큼하면서도 달고 맛있었다. 게다가 먹자마자 몸속에 상쾌한 기운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리쉬옌이 과일 하나를 다시 손바닥에 올리며 말했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먹으면 큰일 나요. 이건 방금 먹은 그 과일이랑 같은 과일인데…….”
리쉬옌의 손이 가볍게 과일을 갈랐다.
키에에엑!
괴성과 함께 손가락 두 개 굵기의 무언가가 바람처럼 솟구쳐 리쉬옌을 향해 날아갔다.
가볍게 손을 휘둘러 그것을 낚아챈 리쉬옌이 손에 들린 것을 내밀었다.
“으으! 누님, 이거 뭡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물은 사람은 강이찬이었다.
“과고(果蠱)라는 벌레예요. 꽃에 알을 낳고, 그 꽃이 과일이 되면 깨어나 과일의 속을 파먹고 잠들어요. 그러다 과일 껍질이 갈라지면 이렇게 튀어나와 사람 몸속에 파고들어 기생하는 놈이죠. 괴수의 일종인데……. 이놈의 숙주가 되면 진짜 위험합니다. 그러니 아무 과일이나 따지 마세요. 나중에 구분법을 알려 드릴게요.”
일행들은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과일 하나 따 먹는 데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니.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도 마찬가지예요. 어느 곳이든 흐르는 물은 먹을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물 밑에 뭐가 있을지 알 수 없으니, 함부로 물가에 갔다가는 큰일 날지도 모릅니다.”
새삼 리쉬옌이 했던 말이 실감이 났다.
공기가 유일하게 좋은 거라고 한 말이 이런 뜻이었던 모양이다.
“일단 상태창부터 확인해 봐요.”
리쉬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나같이 그 말에 따랐다.
“나는 술사네요. 어, 이거 신기한데? 상태창 스탯이 던전이랑 배면계랑 각각 따로 나오네요.”
“나는 투사입니다.”
다들 입을 열어 자신의 직업을 이야기했다.
대부분 던전 각성에서 얻었던 클래스와 같은 계열의 직업이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이가 있었다.
김준석이었다.
“준석 씨는 뭡니까?”
유민섭의 물음에 김준석이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엽사…….”
유민섭이 저도 모르게 실성을 흘리며 말했다.
“허, 형제는 형제네요.”
“하하! 잘 모르겠습니다.”
“오오! 흑태자 형님의 형님도 엽사입니까? 역시 피는 못 속이네요.”
“우리는 엽사만 믿고 가면 되는 건가요?”
잠깐 가벼운 이야기들이 오간다. 다들 준혁에게 큰 도움을 받아서인지 김준석에게도 자연스레 호감을 갖고 대했다.
그때 리쉬옌이 다시 끼어들었다.
“너무 들뜨지 마세요. 엽사가 성장하기 가장 힘든 직업이기도 하니까. 자, 일단 기본적으로 숙지해야 할 것부터 알려 드릴게요.”
리쉬옌의 입에서 술술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기본적인 사항들을 모두 알려 준 리쉬옌이 가볍게 박수를 치며 말했다.
“자자, 그럼 잠깐 쉬었다가 이동할 테니 편하게들 앉아요.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요.”
“넵!”
이구동성으로 대답한 사람들이 주변으로 흩어져 각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리고 리쉬옌이 갑자기 진이 빠진 표정으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크게 한숨을 내쉬는 리쉬옌의 표정은 꽤나 지쳐 있었다.
“잘하셨습니다.”
유민섭이 리쉬옌 옆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아니요. 정말 힘들었어요.”
리쉬옌은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탈진할 정도로 힘이 들었다.
그 모든 것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사람들을 자신이 이끌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다.
“인사치레가 아닙니다. 훌륭했습니다. 앞으로 쉬옌만 믿고 가면 되겠어요.”
유민섭의 칭찬에도 리쉬옌은 길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하아! 내가 여기를 또 오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듣고 보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유민섭도 딱히 해 줄 말이 없었다.
그 원인이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리쉬옌도 추가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올 필요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 추가 성장이 굳이 필요하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던전 시스템으로도 한 번 더 각성을 했기 때문에 배면계가 아닌 그쪽을 성장시켜도 되었다.
즉, 이곳에 온 이유 중 일행들을 위해서라는 것이 최소 50퍼센트의 지분은 차지하고 있었다.
“으음…….”
한국 남자로 따지면 군대를 두 번 가는 기분이 아닐까?
유민섭이 각성한 게이트 발생 초기 시절에는 아직 법이 정비되지 않았었다.
그 탓에 각성자들도 병역 의무를 이행해야 했고, 유민섭도 그에 따라 입대를 했었다.
그리고 군대라는 건 각성자든 보통 사람이든 좋은 곳은 아니었다.
“으으윽!”
그 생각을 하고 나니 한층 더 몸서리쳐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새삼 미안한 감정이 짙어졌다.
“저도 보조할 테니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 말밖에는 없었다.
“많이 도와주세요.”
“진심입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실제로 리더의 위치가 되니 잘하시네요.”
유민섭이 그렇게 격려를 건네자 리쉬옌도 그제야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네. 최선을 다할게요.”
그렇게 배면계에서의 첫 번째 날이 시작되었다.
***
“왜 하필 러시아를?”
준혁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굳이 이름도 들어 본 적 없는 나라를 장악하고 저렇게 쳐들어갈 만큼 러시아에 ‘무언가’가 있는 것인가.
준혁의 의문에 릴리안이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러시아가 아니라 ‘아즈키스탄’이 핵심일 것 같아요.”
“네?”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대체로 독재국가들이죠.”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국가에서 독재자가 등장하는 것은 매우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실제 현재에는 안정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조차 과거를 뒤져 보면 대부분 독재자가 존재한다.
당연시 되어서는 안 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종의 흐름인 셈이다.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은 대부분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면서 국가 자체가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독재자의 출연은 어쩌면 꽤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준혁 또한 잘 알지는 못해도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독재국가는, 해당 독재자만 완전히 통제할 수 있으면 나라를 집어삼키는 건 손쉬워집니다. 그리고 로건 베런즈에게는 그런 힘이 있죠.”
독재자들은 당연히 무력을 가지고 있다.
과거에는 군대가, 그리고 현재에는 각성자가 그 무력이었다.
하지만 로건 베런즈와 그가 이끄는 배면계 귀환자들이라면, 던전 시스템의 각성자는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하지만 독재국가는 중앙아시아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아프리카에도 많고, 남미 쪽에도 그 잔재가 심하게 남아 있잖습니까?”
“아프리카는 주변으로 확장이 쉽지가 않아요. 남미 쪽은 로건 베런즈가 미국인이니 미국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고……. 대신 중앙아시아는 힘만 있다면 확장이 용이합니다. 그리고 그 힘을 배면계 귀환자로 충족시킨다면…….”
“중앙아시아가 꽤 먹음직했겠군요.”
“그렇죠.”
긴 시간 정보를 축적해 온 덕분에 릴리안 우드는 전체를 읽어 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우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릴리안 우드의 물음에 준혁이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일단 저 전쟁부터 중단시킬까요?”
준혁이라면 저기에서 배면계 귀환자들만 골라서 없앨 수 있다.
그러면 전쟁은 빠르게 중단될 것이다.
하지만 릴리안 우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좋지 않아요.”
“네?”
“누가 뒤에서 조종했다 해도 국가 간의 일이에요. 개인이 개입하기에는 모양새가 좋지 않죠. 아즈키스탄의 배면계 귀환자들이 사라지면 러시아가 가만히 있지도 않겠죠. 그때 또 개입하는 건 문제가 많아요. 특히 김준혁 씨가 국가 간의 분쟁에 개입한 선례가 남으면 김준혁 씨의 입지나 이미지도 좋지가 않습니다.”
“듣고 보니 그런 문제가 있기는 하네요.”
꽤 일리가 있는 말이기에 곧바로 수긍했다.
그러다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러시아를 치는 이유는 뭘까요?”
“글쎄요? 그건 로건 베런즈라는 사람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서 추측이 안 되네요.”
“아.”
준혁이 저도 모르게 탄식을 터트렸다.
여러 일들이 있었던 탓에 까맣게 잊고 있던 게 지금 생각난 것이다.
미국이었다.
미국에 로건 베런즈에 대한 정보를 부탁했는데, 그걸 잊고 있었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데?’
일정 이상 정보가 모였다면 연락을 주었을 것 같은데, 지금까지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의구심에 준혁이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뭔가 있나?’
고민해 봐야 여기서는 답을 알 수가 없다.
‘오랜만에 미국이나 가 봐야겠군.’
지난번에는 미국을 가려면 비행기를 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흑호가 가 본 적이 없는 곳이기에 ‘도약’으로 건너가는 게 불가능했던 탓이다.
하지만 지금 준혁에게는 ‘게이트 오픈’이 있었다.
준혁이 아무리 미숙해도 드넓은 미국 대륙 어딘가에는 닿을 수 있으리라.
마음먹은 준혁이 릴리안 우드를 향해 말했다.
“일단 이쪽에 관한 정보는 꾸준히 수집해 주십시오. 혹시나 문제가 생기면 연락 주시고, 전화 통화 안 되면…….”
“회의를 소집하죠.”
“네, 그러면 되겠네요. 그럼 부탁합니다.”
“알았어요.”
말을 마친 준혁은 다시 게이트를 열고 몸을 밀어 넣었다.
***
“여긴?”
게이트를 열고 나와 보니 주변이 메마른 황무지였다.
위치를 확인하려면 휴대폰의 지도 앱을 사용하면 되지만, 문제는 로밍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데이터를 받을 수 없으면 위치는 표시되더라도 지도가 나오지 않는다.
상관은 없었다.
-흑호.
준혁의 부름에 흑호가 공간을 열고 ‘도약’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몸에 밴 듯 납작 엎드려 준혁이 등에 탈 수 있도록 대기했다.
준혁은 멀찌감치 보이는 아스팔트 도로로 가, 길을 따라 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렸다.
정확한 위치는 몰라도 이곳이 미국인 건 분명했고, 워싱턴 D.C.는 미국 동부에 있었다.
방향 잡고 달리다 보면 차 한 대는 지나갈 것이고, 운전자를 잡고 물어보면 워싱턴 D.C.까지는 금방 도착할 수 있으리라.
콰아아아아-!
굉음과 함께 미국 서부 네바다 사막 위에 길고 긴 먼지 궤적이 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