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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장. 이변#6-
“응?”
준혁이 발을 멈췄다.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확인하듯 되물었다.
“뭐라고?”
“오지 말라고!”
준혁은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가면?”
“뭐?”
“가면 어쩔 건데?”
“그, 그건…….”
“쯧! 제정신이 아니네.”
청색은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초점이 사라진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입에서는 단어가 되지 못한 단음절의 소리만이 연거푸 튀어나왔다.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던 준혁이 린디웨에게 물었다.
-이게 이럴 수가 있나?
-응? 무슨 소리야?
-저 정도로 멘탈이 약한 게 가능하냐고.
-왜?
-던전 관리자라는 게 뭐냐? 지구상의 게이트를 다 관리하는 놈들이잖아.
-그 ‘놈’에 너도 포함인데?
-아무튼.
-근데 그게 왜?
-그러면 멘탈이 약한 게 말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거기 점 찍는 거 한 번으로 그 지역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잖아.
던전 관리자는 많은 목숨이 걸려 있는 결정을 한 달에 한 번씩 해야 한다.
준혁을 제외한 던전 관리자들은 그런 일을 거의 10년 가까이 해 온 자들이었다.
어지간한 멘탈로는 버틸 수 없는 일이었다.
준혁의 물음에 린디웨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그런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지. 야마모토 테츠야, 기억 안 나냐?
-응?
-타인의 죽음은 괜찮지만, 자신의 피해는 싫은 거.
-흠, 그러니까 저 여자는 지금 자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멘붕이다 이거지?
-정확해.
준혁이 몇 번이나 고개를 주억거렸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그리고 린디웨의 추측은 매우 정확했다.
‘괴물!’
청색의 머릿속에서는 그 한 단어만이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다. 매우 흔하게 쓰이는 그 말이 지금 청색에게 엉뚱한 방향으로 다가왔다.
청색은 분명 TV를 통해 준혁과 만상만투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기에 준혁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고, 무서운 인간이라는 평가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눈앞에 두고 보니 체감이 달랐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섬뜩한 전율이 쉴 새 없이 뇌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 청색의 정상적인 사고를 막고 있었다.
‘도망쳐야 해!’
그래야 했다.
하지만 10여 년 가까이 해 온 ‘게이트 오픈’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 정도로 청색의 사고는 마비되어 있었다.
준혁은 여전히 어버버거리고 있는 청색을 보며 린디웨에게 말했다.
-쟤한테 술법 걸어 놓을 수 있지?
명확하게 말을 하지 않았어도 린디웨는 바로 알아듣고 대답했다.
-위치 추적?
-어.
-당연히.
-그럼 걸어 놔라.
린디웨는 별다른 대꾸 없이 곧바로 추적을 위한 술법을 걸었다.
그리고 준혁은 그대로 방향을 틀었다.
-어? 가려고?
-대화가 안 될 것 같은데 여기 있으면 뭐 하냐?
-그야 그렇지만.
-나중에 따로 불러내는 게 낫지. 죽이는 방법도 없는 건 아닌데, 다짜고짜 제거하는 건 취향 아니다.
말을 끝낸 준혁이 바로 게이트를 열었다.
아직 게이트 다루는 게 서툴기는 해도, 집과 회사 정도는 명확하게 찾아갈 수 있었다.
***
“아직 조용한 모양이네?”
린디웨의 물음에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건 베런즈와 청색을 만난 날, 준혁은 또 한 번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라고는 하지만 청색과 녹색이 빠진 회의였다.
금색인 릴리안 우드는 녹색이 로건 베런즈였다는 사실에 잠시 놀랐고, 적색은 로건 베런즈가 청색을 노렸다는 사실에 놀랐다.
별다른 이야기가 오가기 힘든 상황이었고, 회의는 그렇게 짧게 마무리되었다.
그 후, 다른 던전 관리자들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준혁 또한 배면계로 갈 사람들을 단련시켜야 하는 상황이기에 한동안은 신경을 쓰지 못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최대한 실력을 끌어 올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특히나 형이 포함된 후로는 더욱 기를 쓰고 그들을 몰아붙였다.
그렇게 일주일이 흐르고 마침내 배면계로 떠날 날이 되었다.
“다들 준비됐습니까?”
준혁의 물음에 모두가 묵직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두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한가득이었다.
평소에는 툭하면 준혁과 농담을 주고받던 유민섭조차 오늘은 표정이 굳어 있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다른 세계로 떠나는 일이었다.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 준혁은 상상을 초월한 강자였다. 그런 강자가 나온다는 건 그만큼 험난한 세계라는 의미.
긴장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특히 한 번 경험이 있어 그럴 것 같지 않은 리쉬옌이 오히려 가장 긴장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무시무시한 곳이라는 정도의 이미지지만, 리쉬옌에게는 수없이 생사를 넘나든 곳이었다.
더군다나 함께 가는 이들을 지켜 줘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까지 얹혀 있었다.
하지만 리쉬옌도 지금 린디웨를 통해 던전 시스템의 각성을 더한 상태였다.
각성한 클래스는 전사, 그중에서도 딜러 포지션이었다.
배면계 시스템은 탱커, 던전 시스템은 딜러인 공수 양면을 모두 겸비하게 된 셈이었다.
준혁이 슬쩍 김준석을 향해 ‘감응’을 사용했다.
-진짜 조심해라. 알았지?
-내가 언제 위험한 짓 하는 거 봤냐?
-그렇게 만만한 곳 아니라고.
-알았다.
김준석의 대답에도 준혁은 안심이 되지 않는 듯 거듭 당부했다.
-리쉬옌이랑 붙어 다니고,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귀환해.
-걱정 마. 내가 여우 같은 마누라, 토끼 같은 자식, 망할 동생 놈 두고 쉽게 죽을 사람으로 보이냐?
-농담 아니라고.
-그래, 그래. 절대 위험한 짓은 안 할게. 됐지?
여전히 안심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미 가는 것으로 결정됐는데 잡을 수도 없는 노릇.
준혁은 어쩔 수 없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갑자기 유민섭이 툭 말을 던졌다.
“거, 형제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아무 말 없이 눈빛을 주고받는 형제의 모습에 상황을 짐작하고 농담을 던진 것이다.
“뭐, 그렇게 부러우면 제가 한번 안아 줄까요?”
준혁이 장난스럽게 응수하자 유민섭이 더욱 과장스럽게 손사래를 쳤다.
“어이구, 참으시죠. 장난으로라도 남자가 안는 거 질색입니다.”
“그럼 그러시든가.”
실없이 주고받은 농담이었지만,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은 풀어졌다.
준혁은 모인 이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쳤다.
그렇게 한 번씩 눈빛으로 인사를 주고받은 후, 린디웨가 나섰다.
“자, 인사는 다 끝났지?”
준혁 앞에 선 린디웨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나눠 준 술석은 잘들 보관하고 있어. 언제든 위험하다 싶으면 그거 깨. 미련하게 버티다가 진짜 죽을지도 몰라.”
린디웨는 배면계로 떠나는 이들에게 조금 전 술석을 하나씩 나눠 주었다.
발동시키는 순간 배면계에서 바로 현실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만든 술석이었다.
린디웨가 24시간 사람들을 지켜볼 수는 없는 일이기에 준비한 물건이었다.
“괜히 인사 같은 거 한다고 버티는 것도 웃기니까, 바로 시작할게.”
사람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린디웨가 가볍게 손을 털었다.
그와 동시에 아무런 조짐도 없이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쿵!
뒤이어 린디웨가 거칠게 바닥으로 쓰러졌다.
“어? 야!”
깜짝 놀란 준혁이 황급히 린디웨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쓰러진 린디웨의 안색이 더할 수 없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짙은 색의 피부가 새파래 보일 정도로 핏기가 쑥 빠진 모습이었다.
준혁이 급히 안아 들고 린디웨의 사무실 소파에 눕혔다.
혹시나 싶어 코밑에 손을 대 보니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시스템의 힘을 끌어다 쓴다는 게 생각보다 많은 기력을 소모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이상 준혁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맞은편 소파에 앉은 준혁이 팔짱을 낀 채 긴 숨을 내쉬었다.
“잘하겠지?”
단단히 마음먹고 보냈는데도 형에 대한 걱정이 또 한 번 준혁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세연은 괜히 마음 약해질 것 같다며 집에서 간단하게 인사만 나누었다고 한다.
“잘하겠지.”
의문을 애써 확신으로 바꿔 생각하며 숨을 골랐다.
형을 믿고, 리쉬옌과 다른 이들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설마 큰일이 생긴다거나……. 에이, 아니지. 아니야.’
단단히 마음을 먹어도 쉽게 진정이 되지 않는다.
한참을 그렇게 궁상맞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준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어?”
화면에 떠오른 이름은 ‘릴리안’.
“여보세요?”
(릴리안이에요.)
“네. 말씀하시죠.”
(잠깐 여기로 와야겠습니다.)
“네?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중앙아시아 쪽의 정세가 심상치 않아요.)
“중앙아시아?”
준혁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야기가 너무 맥락이 없었다.
(일단 오세요. 자세한 설명은 오면 하도록 하죠.)
“어? 그런데…….”
(급합니다!)
릴리안 우드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심각했다.
준혁은 조금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린디웨를 보았다.
쓰러진 사람을 두고 가는 게 살짝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릴리안 우드가 이런 태도를 보일 일이라면 정말 급하다는 말이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일어난 준혁이 곧장 게이트를 열었다.
***
“무슨 일입니까?”
준혁은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물었다.
모니터 앞에 서 있던 릴리안 우드가 준혁을 손짓으로 불렀다.
모니터 화면에는 중앙아시아의 지도가 떠 있고, 그중 한 구역을 짙은 색으로 표시해 놓았었다.
“중앙아시아에 아즈키스탄이라는 국가가 있어요.”
“그런데요?”
“구소련에 포함되어 있다가, 소련이 붕괴되면서 독립한 국가인데……. 그 후로 쭉 독재자에 의해 통치되던 나라죠.”
모니터의 지도에 변화가 생겼다.
아즈키스탄에서 러시아 방향으로 붉은색 화살표가 떠올랐다.
“지금 그 아즈키스탄이 러시아 국경을 침범했어요.”
“네?”
준혁이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로 릴리안 우드를 보았다.
중앙아시아에서 벌어진 분쟁에 왜 이리 심각한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국가 간에 전쟁이 발발했으니 심각한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릴리안 우드의 태도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 보였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좀 해 주시죠.”
“이상하지 않아요? 절대 이길 수 없는 전쟁을 먼저 시작했다는 게.”
“그건 확실히 이상합…….”
고개를 주억거리던 준혁이 갑자기 말꼬리를 흐렸다.
릴리안 우드가 이렇게 묻는 거라면 다른 이유가 있다.
그리고 지금 떠올릴 수 있는 건 하나였다.
“설마 로건 베런즈가 이 일과 관계가 있습니까?”
“첩보에 의하면, 각성자가 아닌 자들이 각성자 같은 힘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각성자가 아닌 자가 각성자 같은 힘이라면 배면계?”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릴리안 우드가 만든 물건 중에는 일종의 감별기가 있었다.
에너지를 계측해 마나를 품고 있는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기계였다.
그런데 마나가 없는데 각성자 같은 힘을 썼다면 배면계 귀환자들밖에 없었다.
그때 모니터 화면에 메시지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역시!”
릴리안 우드가 터트리는 탄식에 준혁이 황급히 물었다.
“왜요? 무슨 일입니까?”
“아즈키스탄 대통령이 러시아를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는군요. 자신들이 보유한 군대는 일반적인 각성자와 다른 진짜 신의 군대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허!”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저기서 말하는 신의 군대라는 것은 아마도 배면계 각성자를 이르는 말일 터였다.
하지만 쉬이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그 의문이 준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도대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