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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장. 이변#5-
“살짝 왼쪽으로 틀어.”
세찬 바람 사이로 린디웨의 목소리가 퍼졌다.
“너무 틀었다. 다시 오른쪽으로 약간. 약간만. 뭐? 까탈스럽다고?”
린디웨의 표정이 조금 사납게 변했다.
“야, 각도 조금 틀어지면 얼마나 빗나가는지 아는 놈이 그래?”
누군가와 말싸움을 하듯 대화를 주고받는다.
“옳지. 그렇게. 좋아. 이제 됐다. 이대로 가자.”
겨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린디웨.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준혁은 린디웨가 시스템 아바타였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린디웨의 대화 상대는 다름 아닌 백효였다.
계약자인 준혁도 ‘감응’ 스킬을 사용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없었다.
환수는 준혁의 말을 알아들었지만, 준혁은 환수의 말을 알지 못했었다.
추상적인 이미지와 감정의 전달이 전부였다.
그런데 저렇게 친구와 대화하듯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꽤 직접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준혁과 린디웨가 백효를 타고 날아가는 방향의 끝에는 로건 베런즈가 있었다.
방향은 남쪽.
흑호의 ‘도약’을 이용하면 편하지만, 흑호는 한 번이라도 직접 가 본 적이 있어야 ‘도약’을 할 수 있었다.
다른 방법으로는 준혁에게 ‘게이트 개방’이라는 스킬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익숙하지도 않고, 정확한 좌표를 알지도 못하기에 지금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백효를 타고 날아가는 것이었다.
준혁이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물었다.
“확실하냐?”
“언제는 내가 거짓말하든?”
“했지. 시스템 아바타면서 사람인 척했잖아.”
“사람이 아닌 건 아니잖아.”
곧장 응수하려고 입을 벌렸던 준혁이 이내 고개를 돌리며 입맛을 다셨다.
‘죽은 사람?’이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그 말을 했다가는 미친 듯이 욕을 먹을 것 같은 느낌이었던 탓이다.
“아무튼 확실한 건 맞지?”
“맞다니까?”
“그런데 이 정도로 정확하게 방향을 잡을 수 있으면, 진작 좀 알려 주지 그랬냐?”
준혁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구시렁거렸다.
로건 베런즈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으면, 그를 직접 찾아가 잡는 게 가장 빠르다.
위원회에서 놈을 잡겠다고, 세계 곳곳에 본의 아니게 난동을 부릴 일도 없었으리라.
하지만 린디웨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못해. 이건……. 위치 추적이 아니라 경보 체계니까.”
“경보 체계?”
“만상만투 나왔을 때 내가 그 자식이랑 일본 놈한테 술법 걸었던 건 기억하지?”
“로건한테는 실패했었지.”
도쿄 대재앙이 있던 그날, 린디웨는 로건 베런즈와 야마모토 테츠야에게 술법을 걸었었다.
위치를 추적할 수 있게 하는 술법이었다.
하지만 배면계 출신인 로건 베런즈에게는 술법이 실패했다.
배면계 출신인 로건 베런즈가 미약한 영력의 흐름을 잡아낸 탓이었다.
“그래서 차선책을 택했지.”
“그건 안 걸렸나 보네?”
“당연하지. 영력을 쓴 게 아니니까. 사실 지금 너한테도 걸어 놨다.”
준혁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린디웨를 보았다.
“뭐? 언제?”
“나는 시스템 아바타잖아? 그것도 배면계의.”
“어.”
“그리고 너도 그렇지만 로건도 배면계 각성자였고.”
“그렇지.”
“배면계 각성자가 배면계로 넘어오면 각각의 표식을 부여해.”
“표식?”
“잘 성장하고 있는지, 임무를 성공할 수 있는지 관찰해야 하니까.”
“아, 그래. 관음 시스템.”
준혁의 드립에 린디웨가 잠시 새침한 표정을 지은 후 설명을 이어 갔다.
“일종의 인식 코드? 구분 코드? 뭐, 그런 거야. 아무튼 배면계에서 일 끝내고 현실로 돌아오면 그 표식을 비활성화시켜.”
“지우면 되지, 뭘 또 남겨 둬? 전 남친이냐? 전화번호 안 지우게?”
배면계 시스템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불만이 아직은 좀 남아 있는 준혁이었다.
장난스럽게 말하기는 했지만, 그 속에 불만스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린디웨는 그것을 말끔히 무시한 채 말했다.
“아무튼 그걸 활성화시킨 거야. 이건 시스템의 영역이니 사람이 인지할 수 없는 거였고.”
“근데 위치 추적이 안 된다고? 배면계에서는 했었다며?”
“여기가 배면계가 아니라서 그런지 제약이 있더라고. 거리의 한계가 있어. 그래서 경보 체계라고 말한 거지.”
“그랬군.”
“레이더, 레이더 같은 거야. 일정 범위 내에 들어오면 위치를 알 수 있는 그런 거지.”
“그래, 정확하네.”
준혁의 감각에 강력한 영력이 걸려들었다.
정확하게 백효가 날아가는 방향의 정면 저 멀리.
“음?”
그런데 준혁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로건 그놈만이 아닌데? 또 하나 있는데?”
“음?”
“관리자. 관리자가 있다.”
백효는 빠르게 남쪽을 향해 날았고, 어느새 바다 위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리고 정면 저 멀리 보이는 것은 한반도 남쪽 바다 멀리 자리 잡은 제주도였다.
“먼저 간다.”
준혁의 말에 린디웨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준혁은 이미 게이트를 열고 있었다.
추상적인 위치는 마음대로 갈 수 없지만, 자신의 감각 안에 있는 장소에는 정확하게 게이트를 열 수 있었다.
“흑호 불러 줄 테니, 흑호 타고 은신해서 와라.”
그 말을 끝으로 준혁은 게이트로 몸을 밀어 넣었다.
“불청객이 있군요.”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들리는 건 로건 베런즈 특유의 존댓말이었다.
“어이, 아무개새끼. 오랜만이다.”
준혁이 한껏 여유를 부리며 게이트에서 완전히 몸을 빼냈다.
“전부터 물었는데 끝까지 대답을 안 해 주시는군요. 그거 욕 아닙니까?”
“굳이 알아서 뭐 하게?”
준혁이 피식 웃으며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30대로 보이는 여자가 꽤 낭패한 몰골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준혁이 여자를 보며 물었다.
“녹색? 청색?”
청색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빠르게 좌우로 움직였다.
“저 새끼랑 당신이랑 싸우는 동안 회의를 했고, 거기에 청색과 녹색이 안 나왔으니 둘 중 하나인 게 당연한 거 아닐까?”
대답은 의외의 곳에서 나왔다.
“녹색입니다.”
로건 베런즈였다.
“응?”
“제가 녹색, 저쪽의 마담……. 마담이라고 부르기에는 몰골이 상당히 좀 그렇습니다만. 어쨌든 저쪽이 청색입니다.”
준혁이 로건 베런즈에게 집중한 채 대화를 이어 갔다.
“하아! 이 새끼, 그렇게 순순히 말할 거 뭘 그리 감추고 다녔냐?”
“제가 순순히 알려 줄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그래, 뭐 그렇다고 치고. 그럼 오랜만에 푸닥거리 한번 할까?”
준혁이 피식 웃으며 물었지만, 로건 베런즈는 곧장 도리질을 쳤다.
“싫습니…….”
그리고 준혁은 로건 베런즈의 거부를 거부했다.
파앙-!
공기 터지는 소리와 함께 준혁의 신형이 쏘아져 나갔다.
위협이 닥쳐오는 순간 자동적으로 로건 베런즈의 ‘회피’가 발동되었다.
하지만 준혁은 릴리안 우드를 통해 이미 이 ‘회피’의 파훼법을 체득한 후였다.
그리고 관리자가 된 후에는 ‘회피’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졌다.
한 번 헛손질한 직후, 묵룡비가 한 점을 향해 날아갔다.
그 지점에서 모습을 드러낸 로건 베런즈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발동한 ‘회피’에 또 한 번 위치를 바꿨다.
그리고 다시 나타난 그 위치에 준혁이 이미 무상곤을 휘두르고 있었다.
빠아악!
“끅!”
로건 베런즈가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하지만 로건 베런즈 역시 배면계라는 수라장에서 살아남은 ‘엽사’였다.
순위를 매기자면 준혁 다음인 2위의 엽사.
단번에 치명상을 입는 수준은 아니었다.
황급히 몸을 일으킨 로건 베런즈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무기들을 꺼내 들었다.
순식간에 묵린갑을 착용한 것은 물론 준혁의 묵룡비와 비슷한 붉은 구슬을 띄워 올리고, 무상곤은 붉은 바스타드 소드로 만들어 쥐었다.
“후우, 후!”
급히 숨을 고른다.
하지만 싸울 생각은 없었다.
‘더 강해졌다.’
일전에 도쿄에서 만났을 때, 준혁이 성장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때의 충격은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도쿄에서 만났을 때보다 더 강해졌다.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던전 관리자가 되면서 각성을 한 번 더 했다고는 해도…….’
로건 베런즈도 두 번 각성했다.
하지만 던전 시스템의 각성은 성장이 쉽지가 않았다.
배면계 경험을 바탕으로 노력했고, 꽤 성장을 이루기도 했지만 일정 수준 이상은 힘이 들었다.
양쪽 시스템의 스탯을 더하면 딱 혼원급 언저리에 맞춰지는 수준이었다.
준혁이 던전 관리자가 된 것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정도의 성장이라니, 로건 베런즈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강해진 준혁을 상대로 제대로 싸울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목적은 어디까지나 게이트를 열어 몸을 빼낼 기회를 잡는 것.
준혁이 자신보다 강한 건 분명하지만, 한 수에 자신을 죽일 정도는 아니었다.
맞고 뒹굴더라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충분히 몸을 빼낼 수 있었다.
그때 준혁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어차피 싸울 생각도 없지?”
“네?”
“중간에 튈 거잖아.”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너 하는 짓이 늘 그렇지.”
준혁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러면 보내 줄 겁니까?”
“설마?”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준혁의 신형이 들이닥쳤다.
쾅, 콰콰쾅!
‘미친!’
청색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육안으로는 움직이는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 흐릿하게 움직이고, 굉음이 터져 나오며, 사방 곳곳에서 압력이 터져 나온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한국으로 온 건 잘한 것 같기는 한데…….’
만약 준혁이 오지 않았다면 절대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김준혁 저자도 안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지극히 조심성이 많은 청색의 입장에서는 준혁 또한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러는 사이 준혁과 로건 베런즈의 싸움은 순식간에 백여 합이 교환되었다.
결과는 준혁의 분명한 우위.
로건 베런즈는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되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준혁의 머릿속으로 린디웨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성공!
-알았다.
린디웨는 이미 흑호를 타고 은신한 채 주변에 대기하고 있었다.
준혁이 어차피 도망칠 걸 알면서도 로건 베런즈를 몰아붙인 이유가 린디웨 때문이었다.
싸움 때문에 로건 베런즈의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린디웨가 술법을 걸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지금 그것이 끝났다.
준혁은 기다렸다는 듯 다시 몸을 날렸다.
부웅-!
날아드는 무상곤을 보며 로건 베런즈가 격렬하게 허리를 꺾었다.
간발의 차이로 로건 베런즈의 머리 위를 스치는 무상곤.
그리고 과도하게 힘을 준 탓인지 바로 궤적을 바꿔야 할 무상곤이 조금 더 나간 후에야 방향을 틀었다.
로건 베런즈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틈.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틈이 생겼다.
아주 약간의 틈이었지만, 로건 베런즈 역시 인간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초인이었다.
찰나보다 짧은 틈이지만, 몸을 빼내기에는 충분했다.
곧장 ‘게이트 개방’을 사용하는 동시에 준혁을 향해 비수를 날렸다.
콰콰쾅!
준혁이 반사적으로 휘두른 무상곤에 비수가 부딪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고, 시간을 번 로건 베런즈가 게이트로 몸을 밀어 넣었다.
“쳇!”
준혁이 짐짓 아까운 척하며 허공에 무상곤을 휘둘렀다.
멀찍이 서서 이곳을 보고 있는 청색의 눈을 속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린디웨와 빠르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떠냐?
-확실하게 잡혀. 이제 언제든 추적 가능. 당장 쫓아갈까?
-아니.
-왜?
-그놈 도망치는 것 하나는 기가 막혀. 이건 결정적일 때 써야지.
-알았어.
린디웨와 대화를 마친 준혁이 청색을 보며 물었다.
“이봐, 청색 씨.”
“네.”
“이제 이야기를 좀 해 볼까?”
준혁이 여유롭게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하지만 청색은 황급히 뒷걸음질 치며 외쳤다.
“오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