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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장. 이변#3-
“스으으으읍.”
끊어질 듯하면서도 끈질기게 이어지는 호흡을 따라 미약한 숨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메웠다.
숨소리의 주인은 리쉬옌이었다.
결가부좌를 틀고, 포갠 두 손을 아랫배 앞에 두고 눈을 감은 채 끊임없이 호흡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리쉬옌 앞에는 준혁이 마주 앉아 바쁘게 눈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되는구나.’
지금 준혁은 ‘탐색’을 펼친 상태로 주변의 에너지를 살피고 있었다.
꾸준히 ‘탐색’을 사용한 덕분인지 10이었던 스킬 숙련도가 어느새 30까지 올랐다.
그렇게 숙련도가 오른 덕분에 준혁의 ‘탐색’은 보다 깊은 영역의 에너지를 가시화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준혁의 눈에 보이는 것이 바로 그 장면이었다.
‘탐색’의 심도를 올린 결과 준혁의 눈에는 공기와 함께 세상에 퍼져 있는 미세한 푸른 점들이 보였다.
만상만투의 심장 안에서 만났던 그 근원의 에너지였다.
특별히 정해진 명칭이 없는 그 에너지를 준혁은 기(氣)라는 익숙한 단어로 명명했다.
그리고 홀로 사유하며 기에 대한 성질을 탐구해 들어갔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기의 움직임을 조사했다.
보통의 사람들.
많은 동물은 물론 식물들까지 차근차근 살피며 기의 작용을 살폈다.
그리고 몇 가지 결론을 내렸다.
기는 공기처럼 세상에 그냥 존재하는 에너지였다.
모든 생명체는 숨을 쉬면서 기를 몸속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기의 에너지를 이용해 몸을 구성하는 세포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나이가 어릴수록 기를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는 효율이 높았다.
반대로 나이가 많을수록 효율이 떨어졌다.
인간의 노화에도 기의 작용이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건강한 사람은 기의 흡수 효율이 뛰어났고, 병약한 사람은 반대였다.
어떤 측면에서는 인간의 생명 활동의 근원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기가 각성자의 몸속에서는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살펴보고 있었다.
마나 운용을 모르는 각성자에서 시작해 마나 운용을 깨우친 각성자, 그리고 S1급이 된 최유나, 마지막으로 지금 리쉬옌을 살피고 있었다.
‘확실히 효율이 올라가네.’
보통 사람들이 호흡을 통해 받아들이는 기를 자신의 몸속에 수용하는 비율은 최고 20퍼센트 정도였다.
어리고 건강한 사람들은 20퍼센트 정도, 늙고 병든 사람들은 5퍼센트 남짓이었다.
하지만 기를 받아들여 그것을 임의의 에너지로 치환해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 즉 각성자들은 100 중 최소 60을 흡수했다.
그중 20은 보통 사람처럼 생명 활동을 위해 온몸으로 퍼졌고, 나머지 40이 단전으로 가 마나로 치환되었다.
이것이 마나 운용을 모르는 각성자들이 기를 흡수하는 효율이었다.
그리고 유민섭이나 백호진, 강태웅처럼 마나 운용을 깨우친 이들은 그 효율이 대폭 상승되었다.
100 중 80을 흡수했고, 20을 제외한 60을 마나로 변환하여 단전에 저장했다.
하지만 S1급에 오른 최유나로 올라가니 이 효율이 급속도로 올라갔다.
100 모두를 흡수했고, 20을 제외한 80을 단전에 담았다.
그리고 리쉬옌의 경우는 기의 사용 방법이 달랐다.
100을 흡수하고, 100 전부를 영력으로 변환해 단전에 담고 있었다.
생명 활동에 기가 작용하는 게 아니라 영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체질이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몸에 담고 있는 마나나 영력의 절대량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자동차에 주유하는 것과 같은 맥락인가?’
받아들이는 만큼 사용해서 소모하는 기운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몸속에는 항상 일정량의 마나가 유지되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S1급 이상이 되면 단전의 크기 자체가 확연하게 달라진다.
보유한 영력이나 마나가 많아지니, 그것을 채우기 위해 기를 흡수하는 효율을 높이는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됐어.”
준혁은 리쉬옌에게 그만해도 좋다는 신호를 보낸 후 몸을 일으켰다.
“일단 나가자.”
“네.”
문을 열고 복도를 따라 걸으며 준혁은 고민에 잠겼다.
‘기를 받아들이는 것 말고, 등급을 올리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수련하는 방법은 준혁도 알고 있었다.
정석도, 거칠지만 속성으로 익히는 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의 작용과 원리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니었다.
단전은, 자동자에 비유하면 엔진과 연료통의 역할을 동시에 한다.
단전이 커질수록 담을 수 있는 영력이나 마나가 커지고, 그 영력과 마나가 낼 수 있는 위력 또한 커진다.
준혁이 알고 싶은 것은 그것이었다.
‘탐색 숙련도가 올라가면 나아지려나?’
그런 고민을 하며 복도를 지나 커다란 훈련장으로 들어섰다.
훈련장 안에는 배면계로 떠날 사람들이 모여 준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준혁에게 이론 강의를 듣기 위해서였다.
‘일단은 호흡법이라도 가르쳐 주면서 연구를 해야겠군.’
이 호흡법은 배면계 각성자들의 몸에 패시브로 적용되어 있는 방법이었다.
배면계는 각성만 했을 뿐, 보통 사람과 다름없는 상태로 임무를 시작하기에 이런 시스템은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결정을 내린 준혁이 입을 열어 설명을 시작했고, 모두들 학생의 마음으로 준혁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모인 사람들은 모두 마나 운용을 깨우친 사람들이기에 강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어차피 배면계 각성을 하게 되면 몸에 익게 될 호흡법이지만, 미리 이론을 알고 반복해 두면 좀 더 효과를 볼 수 있으리라.
“그럼 가는 날까지 최대한 열심히 해 봐요.”
수업을 마친 준혁이 훈련실 문을 열고 나섰다.
“어?”
하지만 이내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형수님?”
훈련실 밖에는 이세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 얘기 괜찮아?”
“괜찮죠. 그렇잖아도 형수님한테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올라가요.”
혼원 길드는 소속 헌터들에게 개인 사무실을 내주었다.
당연히 준혁에게도 개인 사무실이 있었다.
장식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삭막함을 물씬 풍기는 사무실이었다.
준혁의 사무실 소파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넘긴 이세연이 잔을 내려놓으며 준혁을 보았다.
준혁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형수님, 형 좀 말려 주세요. 형이 글쎄…….”
별장에서 바비큐 파티가 열렸던 그날, 김준석은 준혁에게 자신도 배면계에 가면 안 되냐고 말했었다.
그리고 준혁은 한마디로 그 요청을 거절했다.
배면계는 지옥이다.
준혁은 그곳에서 무려 10년을 버텼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형을 그곳에 보낼 생각이 없었다.
물론 이는 정당하지 않은 결정이었다.
이미 그곳에 가기로 결정된 9명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가겠다고 결정한 사람들이라는 핑계를 댈 수도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김준석 역시 스스로 가겠다고 말한 상황이었다.
약간은 내로남불의 상황으로 보이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준혁으로서도 이 부분만큼은 양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준혁을 향해 이세연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보내 줘.”
“네?”
“그 사람 원하면 그냥 보내 주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아니, 형수님까지 왜 이러세요? 거기가 얼마나 위험한데…….”
“나도 처음에는 말렸는데……. 준석 씨가 그러더라.”
차분한 이세연의 말에 준혁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항상 준혁이 신세만 졌다고. 지금도 청랑이나 흑호 데리고 다니면 도움이 될 텐데 우리 가족 때문에 그러지 못한다고. 우리 가족 때문에 준혁이가 안 좋은 일을 당하면 절대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거라고.”
“아니, 저 때문에 형이랑 형수님이 희생한 게 얼마나 많은데…….”
“알잖아. 준석 씨는 그런 사람이라는 거. 그리고 내 생각도 그래.”
이세연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지만 그 속에 묵직한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형편이 좀 더 쪼들리는 거, 생활의 사소한 불편이 늘어나는 거 이런 일들은 괜찮아. 조금 참으면 되는 일들이니까. 준혁이 너는 그 정도는 웃으면서 참을 수 있는 훌륭한 시동생이었고.”
김준석과 김준혁은 서로 끊임없이 배려하는 의좋은 형제였다.
준혁은 항상 형네 부부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었다.
그런 준혁의 모습을 알기에 이세연도 신혼집에 박혀 있는 시동생을 미워한 적이 없었다.
불편을 참는 정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준혁이 청랑과 흑호를 평상시 자신들의 가족에게 붙여 놓는 것은 불편을 참는 수준의 일이 아니었다.
이세연도 TV를 통해 똑똑히 보았었다. 준혁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괴물과 싸우는지를.
그렇기에 준혁의 안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청랑을 자신들이 데리고 있는 것이 신경이 쓰였다.
김준석의 결정 또한 그 맥락이었다.
자신이 강하다면 동생의 안전을 조금이라도 더 보장할 수 있지 않을까.
이세연도 그런 김준석의 말에 동의했기에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준혁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워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눈앞에 있는 이세연이었다.
김준석은 준혁이 배면계를 다녀온 후 고등학교 2학년 때 결혼을 했다.
그때부터 이세연은 형수이면서 어머니의 역할을 했었다.
이세연이 자신을 향해 ‘도련님’이라 부르지 못하게 한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준혁을 보며 이세연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준혁아.”
“네, 형수님.”
“그 사람도 보내 줘. 같이 가는 사람들이 전부 강한 사람들이잖아.”
이세연도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아직도 말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남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고, 의지를 꺾을 수도 없었다.
긴 시간 입을 다물고 있던 준혁이 결국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고마워.”
***
카일루아 비치는 하와이에서 아름다운 풍광으로 유명한 해변이었다.
바다에는 윈드서핑을 하는 사람들과 간단하게 경치를 즐기는 사람들, 물속에 몸을 담그고 즐겁게 노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주 붐비지는 않았다.
적당한 숫자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놀 수 있는 정도의 밀도였다.
수영복을 입은 한 남자가 해변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짙은 갈색 머리에 눈에 확 띄는 잘생긴 얼굴의 20대 백인 남자였다.
해변으로 들어서 주변을 둘러보던 남자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그리고 피식 웃어 보인 남자가 시선이 닿은 곳을 향해 발을 옮겼다.
남자가 멈춰 선 곳은, 백사장 끄트러미에 꽂혀 있는 눈에 띄지도 않을 작은 크기의 팻말 앞이었다.
팻말에는 ‘Green’, ‘Drop’이라는 두 개의 단어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팻말에 이어폰 하나가 걸쳐져 있었다.
뒤이어 남자의 손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들어가더니 난데없이 물건들이 튀어나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남자는 5인 위원회의 녹색이었다.
팻말은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청색이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인벤토리를 완전히 비운 녹색이 팻말에 걸쳐진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아아, 들려?』
이어폰에서 흘러나온 것은 중년 여성의 목소리였다.
녹색이 피식 웃으며 대답한다.
“잘 들립니다.”
『이거 생각지도 못한 미남이 나타났네?』
“마음에 들면 다행이죠.”
『해변 반대편으로 건너와.』
“알겠습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당연히 청색의 것이었다.
청색의 지시에 따라 해변 반대편에 도착하니, 그곳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서 있었다.
주위에는 10여 명의 각성자들이 완전히 무장한 채 여자를 지키고 있었다.
녹색이 이어폰을 빼는 동안 청색이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스스로 로건 베런즈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 봐.”
그 말에 녹색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싫습니다.”
“뭐? 지금 나를 상대로 장난하자는 거야? 지금 이쪽 전력이면 너 하나쯤은 바로 없앨 수 있어.”
청색이 으름장을 놓는다.
하지만 그 순간 녹색의 모습이 흐릿하게 변해 있었다.
촤아악!
깔끔한 소리와 함께 청색 앞을 지키던 헌터의 몸이 세로로 쪼개졌다.
소리는 한 번이 아니었다.
연달아 울린 소리가 거의 동시에 나왔기에 한 번으로 들렸을 뿐.
이미 청색을 지키던 10여 명의 헌터는 사방으로 피를 터트리며 몸이 분리된 이후였다.
동시에 청색의 회피가 발동되었다.
“뭐 하는 짓이냐!”
녹색의 손에는 어느새 한 자루 바스타드 소드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대답 대신 그 바스타드 소드가 날아들었다.
바스타드 소드는 녹색이 손가락에 낀 반지로 변해 있던 무상곤이었다.
즉, 녹색이 다름 아닌 로건 베런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