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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장. 이변#2-
“이렇게 사람 불러낼 때가 아닐 텐데?”
준혁이 게이트 너머로 보이는 금, 적, 청, 녹 4개의 게이트를 보며 비웃듯이 말했다.
먼저 반응한 사람은 적색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말이오. 우리가 당신에게 그런 걸 증명할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뭐, 지금은 그렇겠지.”
준혁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민섭과 이 부분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길이길이 흑역사로 남을 뻔한 일이었다.
「우리를 협박할 수단이라도 있다는 말이군. 그게 무엇이오?」
“나는 말로 안 해. 그냥 행동으로 보여 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위협적인 준혁의 말에 다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들 준혁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자리에서 그 힘을 행사할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강자의 말은 어떤 상황에서든 위압감을 가지는 법이었다.
“더 할 말이 없는 것 같으니 나는 이만.”
말을 끝낸 준혁이 서둘러 회의에서 벗어났다.
계속 말을 섞다 보면 다른 실수를 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준혁이 나간 다음은 금색, 릴리안 우드였다.
「나도 지금으로서는 뭘 할 수가 없군. 알아서 살 궁리를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어.」
뒤이어 무안해진 적색이 말도 없이 회의를 빠져나갔고, 남은 것은 청색과 녹색이었다.
이 둘은 이전에 한 번,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참 재수 없는 사람이네요.」
「그리고 위험하지.」
「그런데 혹시 청색 당신이 로건 베런즈 아닌가요?」
「그렇게 묻는 녹색 너는?」
「저는 당연히 아니죠.」
「증명할 수 있어?」
「물론이죠. 하지만……. 당신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잖아요.」
「음!」
이내 두 개의 게이트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런 식의 대화는 영원히 끝이 나지 않는다.
긴 침묵 끝에 녹색이 먼저 말했다.
「사실 이건 어쩌면 김준혁의 계략일지도 몰라요.」
「계략?」
「로건 베런즈라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혹은 금색이 로건 베런즈이고, 김준혁과 손을 잡았을 수도 있죠. 그저 우리를 이간질시키고, 우리 스스로 참지 못하고 정체를 드러내게 하려는 술수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제가 먼저 증명하죠.」
「어떻게?」
「당신이 정하는 시간과 장소에 비무장으로 나가도록 하죠. 당신은 병력을 끌고 와도 좋아요.」
「너무 자신에게 불리한 조건을 말하니 오히려 의심스러운데?」
「그만큼 결백하다는 증거죠. 애초에 우리는 쉽게 잡히지 않잖아요.」
녹색의 마지막 말에 청색도 더 이상은 말을 받아치지 못했다.
던전 관리자들은 쉽게 죽지 않는다. 패시브 형태로 항상 적용되어 있는 회피 기술이 있는 덕분이다.
수틀린다 싶으면 바로 도망칠 방법도 있기에 어지간한 위험은 무릅쓸 수 있었다.
청색은 한참 고민한 끝에 녹색의 제안을 수락했다.
「사흘 후, 정오, 장소는 하와이의 오아후 섬 카일루아 비치. 반드시 수영복을 입을 것.」
「철저하게 대비하는군요?」
수영복을 입으라는 건 무기를 숨기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카일루아 비치는 세계적으로도 아름다운 해변으로 아주 붐비지는 않지만 적당히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허튼짓을 못하게 하겠다는 의도였다.
「준비는 항상 철저하게 해야지.」
「좋아요.」
「그곳에 알아보기 쉬운 표시를 해 놓을 테니, 인벤토리도 비워.」
수영복을 입고 인벤토리를 비우면 무기를 숨길 곳이 없다.
게이트를 열어 꺼낼 수는 있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둘 다 관리자이기에 게이트가 열리는 낌새를 바로 눈치챌 수 있기에 대비가 가능했다.
「물론이죠. 그럼 그날 그곳에서 만나요.」
「좋아.」
그렇게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두 개의 게이트가 빛을 잃었다.
***
“졌습니다!”
장민호는 큰 소리로 외치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런 장민호의 주변에는 기절한 듯 쓰러진 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장민호와 가까운 곳에서부터 유민섭, 강이찬, 양태군, 최유나, 리처드 개런, 리쉬옌, 백호진, 강태웅이었다.
그리고 장민호 외에 두 발로 서 있는 사람이 또 한 명.
“항복한다고 봐주는 거 없다. 어차피 동료들 다 죽으면 너도 죽는 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준혁의 손이 날아갔다.
퍽!
“꺽!”
가볍게 내지른 손짓에 장민호가 그대로 쓰러졌다.
준혁이 그렇게 쓰러진 9명을 훑어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흐음, 이 정도면 배면계에서 죽지는 않겠네요.”
쓰러진 이들은 리쉬옌을 제외하고는 추가로 배면계 각성을 할 이들이었다.
그리고 준혁은 이들의 배면계 생활을 좀 더 여유롭게 만들어 주기 위해 훈련시키는 중이었다.
이 무리에 리쉬옌이 포함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가이드였다.
이미 배면계를 경험해 본 리쉬옌이었다.
그런 리쉬옌이 무리를 이끌면 위험이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다.
두 번째는 리쉬옌의 성장이었다.
그녀의 등급은 현재 천원급이었다. 그런데 이쪽 세계에서는 영력을 올리고 성장을 도모할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신수를 사냥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신수가 등장해야 하고, 준혁이 신수를 사냥한 후 리쉬옌을 불러야 했다.
결정적으로 리쉬옌이 신수의 근원을 통해 영력을 받아들이는 게 가능한지도 확인해야 했다.
불확실한 게 너무 많았다.
그러니 차라리 다시 배면계로 돌아가 그곳에서 성장을 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그래야 나중에, 혹시라도 일이 잘못돼 신수가 등장하더라도 준혁을 도울 수 있었다.
“일단 다들 일어나 봐요.”
준혁의 말에 쓰러져 있던 9명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다들 마나 운용을 깨우쳤지만 아직은 어설픕니다.”
이 말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딱 2명이었다.
배면계 각성자인 리쉬옌, 그리고 준혁의 도움으로 단숨에 성장하여 S1급이 된 최유나였다.
나머지 7명은 각각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아직 마나 운용이 미숙한 편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 7명의 수련 방법이 정석이었다.
마나를 깨닫고, 그 마나를 운용하여 힘을 쓰는 원리를 이해하고, 그것의 반복을 통해 성장을 도모하는 방법이다.
최유나의 경우는 준혁이 꽤 거친 방법을 사용한 케이스였다.
비유를 하자면, 억지로 그릇을 넓힌 후에 단숨에 물을 채워 넣는 방식이었다.
최유나가 S급을 초월하는 순간에 폭주했던 것도 거친 성장 방법의 부작용이었다.
정석을 따라가면 진도는 느리지만 부작용 없이 성장할 수가 있었다.
세계의 모든 각성자들은 성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부작용이 심한 방법을 퍼트렸다가는 온 세상에 거대한 사고가 연달아 터질 우려가 있었다.
그렇기에 이들에게는 정석을 가르쳤다.
‘쯧! 확실히 느려.’
올바른 선택이기는 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아쉬움이 남았다.
배면계의 위험을 생각하면 가급적 빨리 성장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가기 전에 혹독하게 굴리는 수밖에 없겠네.’
할 수 있는 동안, 최대한 수준을 끌어 올릴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마나와 영력의 수련 방법은 똑같다.
미리 마나 수련법을 완벽하게 체득해 놓으면 배면계에서도 빠르게 성장할 수 있으리라.
“최유나를 빼면 현재 가장 진도가 빠른 사람은 강이찬과 양대장 두 사람입니다. 그 외 나머지는 다들 비슷비슷하네요.”
양태군은 교육받은 이들 중 가장 먼저 마나 운용을 깨우쳤다.
빠르게 시작한 만큼 진도 또한 가장 빨랐다.
그리고 강이찬의 경우는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그가 던전에서 카메라를 이용해 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본인도 깨닫지 못한 사이에 마나가 반응해 카메라를 보호했던 것이다.
마나 운용을 깨달은 후에는 그 운용만으로 마법을 쓰기도 했다.
마법 스킬을 사용하면서 그 원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역시 타고난 재능 덕분이었다.
이들을 포함해, 혼원 길드의 훈련에 참가했던 이들은 모두 마나 운용을 깨우쳤다.
양태군과 강이찬이 자신들의 방법을 말해 주고, 상의하면서 방법을 보완한 끝에 모두들 결실을 이룬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을 제외한 다른 참가자들은 각자 다른 길드를 초청해 같은 교육을 해 주고 있었다.
이렇게 몇 번 반복하다 보면 교육 센터가 설립되거나 하는 식으로 보편화될 것이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눈앞에 있는 이들을 교육시키는 것.
“장민호.”
“옙, 형님!”
“체력부터 보충시켜.”
장민호가 움찔 몸을 떠는 게 보인다. 하지만 준혁은 가차없었다.
“안 하냐?”
“지금 합니다!”
장민호의 스킬로 다들 말짱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킨다.
준혁이 그들과 눈을 한 번씩 맞추고는 말을 이었다.
“저녁에는 회식이 예정되어 있으니, 그때까지 힘 좀 냅시다.”
물론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았다.
이들은 일반 회사원이 아니었다. 아니, 일반 회사원들도 회식은 꺼리는 분위기가 아니던가.
하지만 위로가 되거나, 되지 않거나 준혁의 행동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시작!”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준혁의 신형이 흐릿하게 변했다.
그리고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
유민섭 소유의 별장.
한때는 유민섭이 언론을 상대하기 위한 본부로 사용했던 그곳에 시끌벅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빨갛게 달아오른 숯 위로 넓은 그릴이 얹히고, 그 위에서 소고기가 익어 간다.
식욕을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가 짙게 퍼지고, 그 주위에 선 이들이 웃고 떠들며 젓가락을 놀린다.
리처드 개런도 두 달 가까운 한국 생활 덕분인지 고기를 집어 가는 젓가락질이 매우 능숙하다.
술잔도 돈다.
유민섭이 그사이 모아 놓은 빈티지 시리즈를 자랑스레 꺼내 놓았고, 리처드 개런은 버번 위스키를 잔뜩 꺼내 놓았다.
리쉬옌도 제일 좋아하는 술이라며 중국의 마오타이주를 열 병이나 들고 왔다.
가장 의외였던 것은 최유나였다.
그녀가 가져온 술은 무려 75.5도짜리 럼주였다.
이 정도 도수가 아니면 술을 마시는 것 같지가 않다고 한다.
그리고 준혁은 늘 그랬듯 소주를 펼쳐 놓았다.
김준석의 가족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이세연과 지유는 바쁘게 손을 놀리며 잘 익은 소고기를 먹었고, 준혁은 오랜만에 형과 소주를 대작했다.
그리고 청랑이 넓은 테이블 위에 놓인 십여 개의 사발에 가득 따라진 술을 쉴 새 없이 들이켠다.
그렇게 한참을 웃고 떠들며 먹고 마시는 사이, 가장 먼저 항복을 선언한 것은 당연히 일반인인 이세연과 지유였다.
아직 어린 나이의 지유가 입에 소고기를 문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이세연이 인사를 하고는 먼저 별장으로 들어갔다.
남은 이들은 정원 한쪽에 피워진 모닥불을 중심으로 캠핑 의자에 눕듯이 앉아 가볍게 이야기를 나눴다.
정원 구석에는 다양한 술병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모두가 각성자였다.
가장 등급이 낮았던 김준석과 양태군도 꾸준한 수련으로 각각 A급과 B급까지 올랐기에 어지간해서는 취하지 않는다.
지금도 하나같이 손에 술병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다들 긴장이 풀린 표정으로 멍하니 망중한을 즐겼다.
혼원 길드의 교육을 받고, 그러던 중 종로의 괴물 습격 사태를 겪었고, 얼마 전에는 도쿄 대재앙이 일어나 거기에 지원을 갔었다.
별거 안 한 것 같은데도 엄청나게 바쁜 시간을 보낸 탓에 이런 느슨함이 싫지가 않았다.
그러던 중 김준석이 준혁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하는 것 보니 다들 어딘가 가는 모양이지?”
“어, 배면계.”
“배면계? 배면계는 너 고딩 때 갔다 왔다는 거기?”
“어, 거기.”
“어떻게?”
깜짝 놀라는 김준석의 물음에 준혁이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
“뭐, 다들 잘 다녀오겠지.”
“그래.”
고개를 끄덕인 김준석이 그대로 입을 닫고는 묘한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런 형의 태도가 이상해서 준혁이 말을 붙이려는 찰나였다.
꼴꼴꼴꼴!
갑자기 김준석이 소주병을 입에 물고 가득 차 있던 한 병을 단숨에 비웠다.
딱히 취기가 오르는 건 아니지만, 느낌만으로도 괜한 용기가 생기는 기분.
김준석은 그 느낌을 빌려 말했다.
“나도 보내 주라.”
“뭐?”
“배면계, 나도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