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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장. 위원회#3-
갑작스러운 소집 통보에도 준혁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던전 관리자가 되었을 때 이런 일 정도는 예상했었다.
또한 릴리안 우드에게 대략적이나마 이야기도 들어 두었다.
큰 고민 없이 결정할 수 있었다.
‘입장.’
수락과 동시에 누군가가 갑자기 머리채를 위로 쑥 잡아당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느낌만이 아니다.
실제로 아무런 저항감도 없이 몸이 위로 끌려 올라갔다.
이대로 하늘이라도 뚫을 기세로 솟구치던 몸이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정지했다.
실제로는 몸이 끌려 올라간 게 아니었다.
‘영혼? 아니, 그것도 아니고…….’
의식이었다.
사고와 오감만 몸과 따로 분리해 올라온 것 같은 느낌이다.
멈춘 곳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목소리의 성별과 나이를 변조할 수 있습니다.]
[현재 설정된 목소리는 ‘남자’, ‘70세’입니다.]
[설정을 유지하시겠습니까? 변경하시겠습니까?]
릴리안 우드에게 들은 바로는 야마모토 테츠야는 은색이었고, 노인의 목소리를 사용했다고 했었다.
그 야마모토 테츠야의 세팅인 모양이었다.
‘유지.’
[현재 회의 참가 인원은 0명입니다. 회의장으로 입장하시겠습니까?]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가서 기다리지, 뭐. 입장.’
또 한 번 의식이 어디론가 끌려가는 느낌이 들더니 눈앞의 광경이 변했다.
‘들은 대로네.’
게이트가 떠오르고, 그 게이트 너머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야마모토 테츠야가 죽기 직전에 산속에서 게이트 너머로 도쿄를 살펴보던 것과 비슷한 형태였다.
‘하나, 둘, 셋, 넷.’
게이트 너머로 네 개의 불 꺼진 게이트가 보였다.
준혁의 게이트까지 포함하면 모두 다섯 개.
금, 은, 적, 청, 녹의 다섯 개 게이트가 원을 그리며 동그랗게 모여 서 있다고 들은 것과 일치했다.
그리고 지금 빛을 뿜고 있는 게이트는 준혁의 은색 게이트 하나였다.
그리고 잠시 후, 다른 게이트들이 하나씩 빛을 뿜기 시작했다.
모든 게이트에 빛이 들어오자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늘 그렇듯 시작은 금색이었다.
「모두 모였군.」
그 말에 준혁을 제외한 세 개의 게이트가 동시에 말을 쏟아 냈다.
「금색, 당신의 소집이었소?」
「뭐 하자는 짓이야, 이거?」
「이런 갑작스러운 소집이 곤란하다는 사실 정도는 알 텐데요?」
비난 섞인 불만이었지만, 금색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들 한 번쯤 모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텐데, 새삼스러운 반응들이군.」
그 모습을 보며 준혁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릴리안, 평소하고는 좀 느낌이 다르네?’
준혁은 이미 그녀가 금색이라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을 확인한 후, 금색이 말을 이었다.
「도쿄에 괴물이 나타났잖아. 그것 때문에 이야기를 한번 해 봐야 한다고 생각들 했을 텐데?」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왔다.
「그것도 김준혁이 한 짓이 아닌가요?」
「일본은 은색의 땅이 아니었소?」
「그러고 보니 김준혁을 죽였다고 호언장담하더니, 멀쩡하게 살아 있더군. 아무튼 입만 산 것들은…….」
금색이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 괴물을 부른 것은 김준혁이 아니었다.」
「뭐? 전에 분명 그런 것으로 결론이 나지 않았소?」
「우리끼리의 짐작이었을 뿐이지. 누구 하나 확인하지 않았잖아.」
「그렇기는 했지. 하지만 금색, 당신은 어찌 그렇게 확신하시오?」
「만나 봤으니까.」
순간 금색을 제외한 네 개의 게이트가 동시에 뒤흔들렸다.
게이트는 이런 식으로 감정을 어느 정도 표현해 주는 모양이었다.
‘뭐, 뭐 하는 짓…….’
준혁도 당연히 놀랐다. 릴리안 우드가 이걸 이야기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아, 진짜. 여기서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고.’
그렇게 말했다가는 ‘나 김준혁이오.’라고 말하는 꼴이다.
‘아, 감응.’
소리 내지 않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
‘먹힐까?’
일단 지금은 의식만 이곳으로 건너온 상황이었다.
스킬을 사용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또한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 해도 릴리안 우드 역시 의식만 건너온 상태니 그 또한 적용되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고민할 시간에 시도하는 게 준혁의 성격이었다.
-아니, 뭐 하는 짓입니까? 미리 말이라도 해 줘야죠.
순간 금색의 게이트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준혁의 눈에 들어왔다.
-다, 당신? 어, 어떻게?
릴리안 우드의 당혹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릴리안 우드는 당연히 준혁이 은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놀란 것은 다른 부분이다.
-어떻게 스킬을 사용할 수 있죠?
-네? 이 상태에서는 스킬 사용이 안 됩니까?
-안 돼요.
-그래요?
곧장 되물으면서도 준혁은 직감적으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이것도 무급으로 승급해서인가?’
그 경우 외에는 다른 이들은 못하는 걸 준혁만 할 수 있는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뭐, 일단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죠. 어쨌든 갑자기 그걸 밝히면 어쩝니까?
-음,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두 가지?
-첫째는, 한 번은 사실관계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위원회의 구도를 언제까지 끌고 갈 수 없어요. 변화가 필요합니다.
준혁은 순순히 릴리안 우드의 말을 받아들였다.
릴리안 우드는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바람에 위원회는 잠시간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적색이 정적을 깼다.
「금색, 말을 해 보시오.」
「좋아. 일단 나는 김준혁을 만나 보았다. 그리고 시스템을 융합하려는 자가 김준혁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어떻게 확인했소?」
「도쿄에 나타난 그 괴물, 시스템 융합을 시도하는 자가 있다면 그 배면계의 괴물도 불러낼 수 있겠지?」
「그렇겠지.」
「나는 그 괴물을 불러내는 자를 직접 보았다. 그는 김준혁이 아니었어.」
확신에 찬 금색의 말에 모두들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금색의 말에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괴물을 불러낸 자는 우리 중 하나였다.」
「뭐라고요? 우리 중 하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거야?」
그런데 반응한 자가 청색과 녹색 둘뿐이었다.
그리고 적색은 의외로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괴물이 출현하던 그 순간 나는 도쿄에 있었소. 그리고 도쿄 인근에서 게이트를 사용한 사람이 셋이라는 건 알고 있지.」
청색이 급히 물었다.
「뭐? 도쿄에 있었다고?」
「다들 뭘 그렇게 모른 척이오? 은색이 일본 사람이라는 게 밝혀진 이상 다들 그를 조사하려고 일본으로 왔을 텐데?」
「흐응, 그건 그렇지.」
청색이 입을 닫자 적색이 말을 이었다.
「그 당시 분명 도쿄 인근에서 연거푸 게이트를 여닫은 사람은 셋이었소. 그렇게 생각하면 금색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지. 그런데 은색, 당신은 직접 보지 않았소? 그 바다 위에 당신이 있는 건 내가 확인했었는데 말이오?」
적색의 질문의 화살이 준혁에게로 향했다.
준혁이 대답을 하려는 찰나였다.
「잠깐!」
급히 대화를 중단시킨 것은 날카로운 젊은 여성의 목소리, 청색이었다.
「왜 그러시오?」
「은색이 아까부터 말이 없다는 거,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가 봐?」
「음? 그러고 보니…….」
「지난번의 태도로 보면 도쿄가 저렇게 된 것 때문에 길길이 날뛰었어야 정상이잖아? 안 그래, 은색?」
준혁이 자신을 추궁하는 청색에게 물었다.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야마모토 테츠야가 은색으로 나왔을 때 어떤 말투를 쓰는지도 이미 들었기에, 준혁은 최대한 그 흉내를 내 보았다.
「나만 이상하게 느끼는 건가?」
「무얼 말입니까?」
「당신, 은색이 아니잖아.」
준혁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물론 게이트만 보이니 누구도 그 사실은 알지 못한다.
‘로건 베런즈?’
로건 베런즈는 당시 야마모토 테츠야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또한 린디웨가 술법으로 추적을 하려 했다는 사실도 눈치챘었다.
즉, 야마모토 테츠야가 죽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는 사람이 곧 로건 베런즈일 가능성이 컸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일단은 시치미를 떼고 그렇게 물었다.
「흐음, 뭐 일단 한 가지는 인정해야겠군. 나도 당시에 도쿄에 있었던 건 맞아. 해일이 들이닥칠 때 게이트를 열고 대피했지. 그런데 말이야, 내가 피한 곳이 후지산이었거든. 일본, 높은 곳 하니까 떠오르는 곳이 거기밖에 없어서.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청색이 잠시 말을 멈췄지만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인 청색이 다시 입을 열었다.
「거기서 서쪽으로 빠르게 날아가는 뭔가를 봤어. 새하얀 새를 타고 날아가더라고. 김준혁이라는 사실을 눈치챘고, 새가 착지한 방면에 몰래 게이트를 열어서 봤지. 거기에서 뭘 봤을 것 같아?」
이 정도면 청색은 은색이 준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상관은 없지만…….’
준혁은 어차피 거리낄 게 없었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상황에 맞춰 대응하면 그뿐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처음 온 상황이라 일단은 이야기를 해 볼 필요가 있었다.
‘감응’으로 릴리안 우드에게 물었다.
-어쩌는 게 좋겠습니까?
-어차피 노리던 바였어요.
-네?
-우리 다섯 중에 시스템 융합을 도모하는 자가 있다고 알린 이상, 이 위원회는 예전 같은 방식으로는 유지할 수 없어요.
-아, 그랬었죠.
그제야 이 이야기가 나오게 된 원인이 금색이 말한 시스템 융합을 노리는 자의 정체였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준혁도 괜찮은 방법이 떠올랐다.
“뭐, 알고 있으니 숨길 필요도 없겠네. 그래, 내가 김준혁이다.”
준혁의 선언에 금색이 그 말을 받았다.
「맞아. 은색은 죽었고, 권한은 김준혁에게 이양됐지.」
그리고 잠시 찾아온 침묵을 준혁이 빠르게 깨고 나갔다.
「나는 이곳에 있는 다섯 중 둘을 만났다. 한 명은 금색이고, 또 한 놈은 색깔은 몰라. 하지만 그놈이 도쿄의 그 괴물을 불러내는 모습을 보았지. 또한 놈이 시스템 융합을 시도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 마지막으로 놈의 이름을 알고 있지.」
순식간에 주도권을 잃은 청색이 급히 물었다.
「그게 누구지?」
「당신 아닌가?」
「아니, 나는 아니야.」
당연히 부정한다. 준혁도 확신은 할 수 없었다. 정말로 그 순간에 후지산에 있었고, 준혁이 백효를 타고 날아가는 모습을 보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누구에게 물어도 자신이 그라고 대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이 판은 다른 방식으로 흔들어야 했다.
“놈의 이름은 로건 베런즈. 배면계 귀환자이며, 전직 CIA 요원이었던 놈이다. 나와, 로건 베런즈.”
또 한 번 정적이 흘렀다.
다들 숨을 죽이고 있는지 게이트의 빛이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준혁은 아직 던질 패가 남아 있었다.
“나는 김준혁이라는 걸 밝혔으니 로건 베런즈가 아니야. 그리고 금색은 내가 만나 보았기에 로건 베런즈가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어. 자, 그럼 셋 남았네. 적색, 청색, 녹색, 당신들 중 누가 로건 베런즈지?”
물론 여기서 내가 로건 베런즈라고 나설 사람은 당연히 없다.
준혁은 준비하고 있던 말을 꺼내 놓았다.
“더 이상 회의를 진행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뭐, 개인적인 연락 정도는 받아 주도록 하지. 다들 내 위치는 알고 있을 테니.”
그렇게 말을 마친 준혁은 곧장 회의장에서 나와 의식을 되돌렸다.
적, 청, 녹 셋 중 누가 로건 베런즈인지 밝혀낼 필요는 없었다.
저 중 누가 로건 베런즈가 아닌지를 밝혀내야 했다.
그리고 그 일을 할 사람은 준혁이나 릴리안 우드가 아니었다.
저들 자신이다.
저들은 이제 자신이 로건 베런즈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완벽하게 증명되면, 로건 베런즈가 어떤 색깔인지는 자연스레 밝혀진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로건 베런즈의 소재다.
그를 직접 없애야만 시스템 융합의 위험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원회의 다섯 중 어떤 색이 로건 베런즈인지만 밝혀내도 놈의 행동을 어느 정도는 제약할 수 있었다.
이제 준혁이 할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기다려 보면 알겠지.’
누군가의 접촉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