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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장. 대재앙#3-
“제길! 시작했네.”
준혁이 물의 벽 상단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물의 벽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변의 물이 한층 거세게 물의 벽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에 반해 수벽의 아랫부분은 너울을 타고 서서히 해변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최상단이 무너질 것처럼 비스듬하게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털썩!
준혁이 백효의 등판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되어 있고, 볼이 움푹 파여 보일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만큼 사력을 다해 해일이 쏟아지는 것을 늦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 해일을 막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재앙은 시작되었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보니 도쿄에 있던 사람들이 처음보다 꽤 숫자가 줄었다.
도쿄 시민의 절반 정도는 대피한 것 같았다.
릴리안 우드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무엇보다 준혁이 벌어 놓은 시간이 빛을 발했다.
준혁이 벌어 준 시간이 무려 한 시간이었다. 그 한 시간 덕분에 절반이나마 대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었다.
도쿄는 일본에서 가장 넓은 평지인 간토평야에 자리 잡은 도시였다.
해일이 들이닥칠 때 가장 피해가 심한 지형이 다름 아닌 평야다.
해일이 들이닥치면 가급적 높은 곳으로 대피해야 하는데, 그런 높은 지대가 없으니 피해가 커지는 것이었다.
“마그누스 리커버리!”
준혁의 체력을 완전히 복구해 주는 장민호의 목소리에 기력이 하나도 없었다.
그 역시 지난 한 시간 동안 사력을 다해 준혁의 체력을 보충해 주었기에 체력이 바닥난 것이다.
부족한 마나는 마나 포션으로 채울 수 있지만, 체력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었다.
중간중간 스스로에게 ‘마그누스 리커버리’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럴 기력마저도 없었다.
“후우!”
준혁이 긴 한숨을 내쉬며 백효를 타고 유민섭과 장민호 곁으로 날아왔다.
유민섭이 먼저 물었다.
“괜찮습니까?”
유민섭은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 버프다. 따로 마나를 소모할 일이 없다.
그렇다고 준혁을 도와 물의 벽에 충격을 줄 수도 없다.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혼자서만 아주 멀쩡했다.
물론 준혁은 방금 장민호의 스킬로 멀쩡해지기는 했지만.
“이제 좀 괜찮네요. 와서 도와준 덕분에 꽤 시간을 벌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유민섭이 급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물의 벽 상단이 기울어지고 있다.
“도쿄로 가시죠.”
물의 벽이 워낙 거대하다 보니 최상단이 쓰러지는 데 의외로 시간이 걸린다.
저것이 넘어지고, 그 물이 주변의 바다를 휩쓸며 도쿄로 상륙하는 데까지 아직 약간의 시간이 있었다.
유민섭은 그때까지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상했던 모습이다.
준혁이 아는 유민섭은 이런 사람이었다. 이기(利己)보다는 이타(利他)가 더 큰 사람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려 들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준혁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빠지겠습니다.”
차가우리만치 단호한 대답이었다.
“네.”
유민섭도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것. 그 또한 유민섭이 가진 ‘이타’의 한 일면이었다.
그리고 준혁은 진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안다.
지금 자신이 달려가 구하게 될 사람의 수보다, 준혁이 물의 벽이 무너지는 것을 막으면서 구할 수 있었던 인명이 훨씬 많을 것이다.
하지만 준혁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저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
“할 일?”
“저 자식이요.”
준혁이 가리킨 것은 야마모토 테츠야였다.
그는 아직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
“그럼 나중에 한국에서 봅시다.”
준혁은 말을 마치자마자 백효를 타고 이동했다. 그러면서 흑호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 사람 위험하다 싶으면 니가 알아서 대피시켜라.
-네, 주인님!
이제 언제든 꼬박꼬박 주인‘님’을 붙이는 흑호였다.
유민섭과 장민호를 태운 흑호가 아예 ‘도약’을 펼쳐 도쿄로 향했다.
준혁 또한 빠르게 도쿄로 향하고 있었다.
린디웨를 찾기 위해서였다.
“탐색.”
‘탐색’은 아주 유용한 스킬이었다.
에너지를 가시화한다. 여기서 말하는 에너지는 지극히 한정적인 범위를 뜻한다.
준혁이 만상만투의 심장 속에서 만났던 그 ‘근원’의 기운을 일컫는 것이었다.
영력이 될 수도, 마나가 될 수도 있는 순수한 자연의 기운.
‘탐색’은 그 기운을 베이스로 한 에너지를 가시화하여 볼 수 있다.
즉, 지금 준혁은 마나를 사용하는 던전 각성자와 영력을 사용하는 배면계 각성자의 위치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매우 유용하게도 마나와 영력은 서로 다른 색으로 보였다.
베이스가 되는 순수한 기운이 푸른색으로 보인다면 마나는 노랗게, 영력은 붉게 보였다.
지금 도쿄 내에서 영력을 사용하는 개체는 딱 두 개체였다.
하나는 유민섭과 함께 다니는 흑호였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당연히 린디웨.
준혁은 곧장 린디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헉헉!”
린디웨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의 직업은 술사였다. 하지만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술법이 없다.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효율이 지극히 떨어지기 때문에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게 훨씬 나았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지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
“어? 뭐야?”
불쑥 나타난 준혁을 보고 린디웨가 놀라 물었다.
“시작됐다.”
준혁의 말에 린디웨가 물의 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반사적으로 터트린 탄성에는 안타까움과 함께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맺혀 있었다.
준혁이 빠르게 용건을 말했다.
“로건 베런즈는?”
“튀었지.”
“쫓을 방법은?”
“일단 가장 쉬운 건 실패했고, 플랜 B로 달아 놓은 게 있는데 잘된다는 확신도 없고, 그 방법은 지금 당장 사용하지도 못해.”
준혁은 미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집중해야 할 쪽은 로건 베런즈가 아니라 다른 쪽이었다.
“야마모토 테츠야는?”
준혁의 물음에 린디웨가 술석 하나를 꺼내 준혁에게 던졌다.
“이거.”
“무슨 효과?”
“술법 발동시키면, 알아서 그놈 있는 곳으로 안내할 거야.”
“그래?”
“어. 한 가지 조심할 게 있는데, 직선으로 날아간다.”
중간에 무슨 장애물이 있어도 상관없이 직선으로만 움직인다는 소리다.
물론 준혁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지금 야마모토 테츠야가 있는 곳은 도쿄만 상공이 아닌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어딘가였다.
그저 게이트를 통해 이쪽을 살펴보기만 하는 상태.
술법을 발동시키면 야마모토 테츠야가 숨어 있는 모처로 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일종의 추적용 술법이다.
준혁이 곧장 술석에 영력을 밀어 넣었다.
지이잉!
두둥실 떠오른 술석이 파삭 하고 깨지더니, 허공에 푸른 영력으로 뭉쳐진 화살표가 떠올랐다.
화살표를 본 준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취향하고는.”
뜬금없는 화살표 모양에 실소를 흘린 것이다.
“섬세함이라고 해 줘.”
“섬세함은 무슨…….”
그때 화살표가 팽그르르 돌더니 갑자기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는 곧장 그 방향을 향해 날아갔다.
“나 간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효가 화살표의 궤적을 쫓았다.
***
“저쪽, 저쪽이라고!”
하시모토 타츠야는 온몸이 땀으로 범벅된 채 쉴 새 없이 달리며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는 무력까지 동원한 상태였다.
영구적인 장애를 입는 게 아닌 한 다치는 한이 있어도 게이트를 통해 도쿄를 빠져나가는 것이 죽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이었다.
그때였다.
휘이이잉-!
갑자기 스산한 바람이 하시모토 타츠야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섬뜩할 정도로 불길한 그 느낌에 하시모토 타츠야는 반사적으로 발을 멈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시선이 향한 곳은 거인처럼 도쿄를 굽어보는 물의 벽이 있는 곳이었다.
“아!”
질끈 두 눈을 감은 하시모토 타츠야의 입에서 안타까움이 가득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드디어 시작되었다.
그때 누군가 불쑥 하시모토 타츠야 앞에 나타났다.
“헉!”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는 하시모토 타츠야 앞에는 흑호의 등에 올라탄 유민섭과 장민호가 있었다.
유민섭이 선언하듯 말했다.
“시작됐습니다.”
“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선택?”
“가급적 많은 사람들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뒤처져 대피를 시작조차 못한 이들을 구할 것인가?”
“그게 무슨…….”
유민섭이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바다 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뒤쪽에 아직 대피하지 못한 어린아이들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
하시모토 타츠야의 입에서 자책감 가득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워낙 급박한 상황이라 그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유민섭이 재빨리 하시모토 타츠야를 다독였다.
“정답은 없습니다. 보다 많은 사람을 살릴 것인지, 어린아이들을 먼저 살릴 것인지는 그저 선택의 문제일 뿐입니다. 적어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요. 저는 지금부터 대피하지 못한 아이들을 중심으로 구할 생각입니다.”
그때 또 한 사람이 그 자리에 불쑥 등장했다.
이번에는 게이트를 열고 나온 릴리안 우드였다.
커다란 후드와 가면으로 온몸을 가리고 있기는 했지만, 걸음걸이를 보니 그녀 역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언제 유민섭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곧장 본론을 꺼냈다.
“제가 바다와 가까운 쪽부터 훑어서 가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여기서 출발해서 아이들을 구해요.”
그 말을 남긴 릴리안 우드가 다시 게이트를 열고 훌쩍 사라졌다.
옳은 판단이었다.
세세하게 계획을 짜고 구역을 나눌 시간이 없다.
이제부터는 그냥 닥치는 대로 움직이는 수밖에.
“연락 돌리겠습니다!”
하시모토 타츠야가 급히 품에서 통신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유민섭은 흑호를 다독여 급히 바다 방향으로 내달렸다.
콰앙!
멀쩡한 집 벽이 터져 나가고,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간 헌터 한 명이 두 명의 어린아이를 안고 뛰어나왔다.
엘리베이터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밖으로 빼낸 헌터도 있었다.
“역, 역 앞 광장으로 가요! 게이트가 있습니다. 게이트로 들어가요! 아이들! 아이들을 데리고 가라고! 이 개자식들아!”
쓰러진 유치원 통학 버스에 갇힌 아이들도 있었다.
유치원 교사가 버스 안의 망치로 앞 유리를 열심히 두드려 대지만, 힘이 부족해 제대로 뚫을 수가 없다.
헌터가 달려와 급히 유리창을 뜯어내고 아이들을 구했다.
유치원 교사는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아이들을 통솔해 헌터가 말해 준 곳을 향해 달렸다.
“따라와요. 모두들 선생님이랑 같이 가는 거야. 알았지? 옆에 친구가 잘 있나 꼭 확인해야 해요!”
유치원 교사는 주기적으로 아이들에게 말을 건네며 걸음을 재촉했다.
교사의 얼굴에는 한 명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책임하에 있는 아이들을 구하겠다는 사명감이 가득했다.
하시모토 타츠야가 이끌고 온 헌터들은 그렇게 도쿄 시내 곳곳을 이 잡듯이 뒤졌다.
유민섭 역시 바쁘기 짝이 없었다.
정적만이 맴도는 길을 따라 달리며 낙오한 사람들을 찾는다.
혹여 다친 사람이 있으면 장민호가 나섰다.
그렇게 찾은 사람은 흑호가 도약으로 대피시켰고, 그사이 유민섭은 또 다른 낙오자를 찾아 헤맸다.
릴리안 우드 역시 쉴 새 없이 거리를 훑으며 사람들을 구했다.
그녀의 방법은 눈앞에서 게이트를 열고 직접 사람을 밀어 넣어 대피시키는 것이었다.
당연히 가장 많은 마나를 소모하는 일이었다. 게이트를 여닫는 데도 마나가 소모되는 탓이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모든 이들의 마음은 납덩이를 얹은 듯 무거웠다.
이렇게 노력해도 구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미친 사람처럼 도쿄 시내를 뛰어다녔다.
그리고 시간은 무심하게 흘렀다.
마침내 물의 벽이 쓰러졌다.
쏴아아아-!
웅장하면서도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거대한 바다가 도쿄 해안으로 들이닥쳤다.
콰르르르르-!
굉음과 함께 도시가 쓸려 나가기 시작했다.
해일이라는 것은 큰 파도가 육지를 덮치는 현상이 아니다.
바다의 해수면이 급격히 상승한 상태로 물 덩어리가 육지를 그대로 휩쓰는 현상이다.
만(灣)이라는 지형은 바다가 육지 속으로 파고든 형태이기에 어느 정도는 물이 갇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해일의 위험이 없다.
그러다 보니 도쿄 해안에는 해일에 대비한 그 어떤 방비책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설혹 있었다 해도 절대 막을 수 없는 규모의 해일이었다.
속수무책.
육지를 그대로 밀고 들어온 바다가 도쿄라는 도시를 밀며 돌격한다.
어지간한 건축물은 장난감처럼 터져 나갔다.
끼이이이이익!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됴코 타워와 도쿄 스카이트리가 고목처럼 그대로 넘어갔다.
일본의 수도, 무려 1,400만 인구가 살아 있던 거대 도시가 바다에 삼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