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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장. 대재앙#1-
준혁의 두 눈에 짙은 불신의 빛이 번졌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빠르게 날아와 발바닥을 받친 백효의 등에 선 채 준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물.
물이었다.
물의 벽이었다.
허리와 목을 부러질 정도로 뒤로 꺾어도 최상단이 보이지 않을 정도 높은 물의 벽이었다.
준혁의 시선이 빠르게 바닥으로 내려갔다.
망막에 연달아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지만 준혁은 그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백효의 날개 아래에 펼쳐진 도쿄만의 해수면이 격렬하게 낮아지고 있었다.
도쿄만을 채우고 있던 바닷물이 모두 저 물의 벽으로 빨려 올라가고 있었다.
만(灣)은 바다가 육지 속으로 밀고 들어온 형태를 일컫는 말이다.
즉, 바다의 일부다.
당연히 도쿄만도 바다, 거대한 태평양의 극히 일부분이었다.
땅으로 갇혀 있는 호수가 아니다.
도쿄만이라는 공간의 물이, 저 물의 벽으로 끌려 올라간다고 해수면이 낮아지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연히 만상만투의 권능이 작용한 일일 터.
“이 미친 짐승 새끼, 죽어서까지…….”
그때 준혁의 등장을 알아챈 린디웨가 술법을 이용해 준혁의 곁으로 날아왔다.
“야, 너 괜찮…….”
준혁이 ‘물아일체’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린디웨였다.
그 후유증으로 영력이 폭주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하여 급히 다가온 것이었다.
준혁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만상만투 짓이냐?”
멀쩡하게 질문하는 모습에 린디웨도 걱정을 접고 이야기를 이었다.
“어. 죽기 직전에 뭔가 한 방 날리고 죽었다.”
“이 망할 짐승 새끼.”
준혁이 짓씹듯이 말을 뱉는다.
하지만 지금 욕을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거대한 물의 벽.
저런 것을 관상용으로 만들어 놓고 갔을 리가 없다.
저것은 해일을 일으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해일이 노릴 곳은 뻔했다.
일본의 수도, 도쿄다.
물론 이는 죽기 직전 저 해일을 일으킨 만상만투의 의도다.
가장 사람이 많아 보이는 곳을 향해 거대한 재앙을 던져 놓고 죽은 것이다.
수벽은 그렇게 높이 솟구친 채 해수면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마치 거대한 절대자가 하찮은 미물을 오연하게 내려다보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준혁은 잠시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어 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일종의 경이에 대한 동물적인 본능이 만들어 낸 감정이었다.
저 해일이 자연이기에 드는 감정이리라.
생성 자체는 만상만투의 권능으로 인한 것이었지만, 지금의 저 모습만큼은 어쨌든 단순한 ‘자연’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자연을 이길 수 없는 탓이기도 했다.
준혁 또한 마찬가지다.
준혁은 저 해일을 직격으로 맞이한다 해도 뚫고 나아갈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이 저 해일을 없애거나 막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대자연이라는 진짜 절대자의 힘 앞에서는 초인의 힘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저걸 어떻게 막지?”
준혁의 중얼거림에 린디웨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미쳤냐? 저걸 어떻게 막아?”
“그렇지?”
“당연하지.”
“그럼 남은 건…….”
준혁이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도쿄를 내려다보았다.
극한까지 올라간 준혁의 감각은 도쿄 시내 곳곳을 눈앞에 있는 것처럼 관찰할 수 있었다.
아비규환이었다.
도로에는 차가 빽빽했고, 사람 또한 한가득이다.
한 걸음이라도 먼저 가기 위해 서로 밀고 당기며 곳곳에서 악다구니가 펼쳐진다.
“미친! 진작 도망 안 치고 뭐 한 거야?”
준혁이 어처구니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준혁이 만상만투와 싸운 시간은 꽤 길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나 도쿄에는 대피 시간을 꽤 벌어 준 셈이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도쿄에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있었다.
준혁이 벌어 준 시간이 아주 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고려한다 해도 남아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옆에 있던 린디웨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대피 경보가 너무 늦게 나오더라고.”
“음?”
“네가 그 이상한 공간에 갇혔다가 빠져나온 후에야 대피하라고 방송이 나오더라.”
“미친!”
만상만투의 몸길이는 무려 3킬로미터에 달한다. 그런 놈이 도쿄 앞바다에 등장했다.
만사 제쳐 놓고 일단 사람들부터 대피시키는 게 당연한 판단이다.
린디웨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대피령 내려지기 전에 미리 빠져나가는 사람들도 있기는 했는데, 대부분이 극소수였고……. 방송은 오히려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더라고.”
“허!”
어처구니가 없다 보니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헛웃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그때 준혁 바로 앞에서 갑자기 게이트가 열리며 누군가 불쑥 튀어나왔다.
“엇!”
등장한 사람은 얼굴에 가면을 쓰고, 치렁치렁한 후드로 체형까지 가린 릴리안 우드였다.
“뭘 하면 될까요?”
“네?”
준혁의 반문에 릴리안 우드가 저 멀리 도쿄를 가리켰다.
“저 사람들이요.”
“아!”
준혁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릴리안 우드를 보았다.
‘진짜였나?’
일전에 릴리안 우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80년을 살았으니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겠다는 욕심을 부릴 수도 있지 않느냐고 했던 그 말.
솔직히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준혁이 인간을 보는 관점은 모두 배면계에서 형성되었다.
그곳에서는 끝까지 서로를 도우며 함께했던 가족 같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위험한 전장에서도 서로를 시기하고 죽이려 드는 자들이 훨씬 많았다.
그렇기에 준혁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바운더리에 받아들인 사람 이외에는 잘 믿지 않았다.
릴리안 우드도 마찬가지였다.
던전 관리자로서 가지는 강력한 힘, 그리고 BR코퍼레이션을 통해 벌어들이는 돈과 막강한 영향력.
그 모든 것을 합치면 절대적인 권력자가 될 수도 있는 힘이었다.
그런 사람이 정의를 논하고, 헌신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믿을 수 없었다.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면 믿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가면과 옷으로 최대한 숨기기는 했지만, 그게 정체가 드러날 모든 가능성을 지워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을 구하러 왔다.
준혁이 아직 굳은 듯 멈춰 있는 물의 벽을 가리키며 물었다.
“게이트 열어서 저 물 전부 게이트 안에 쓸어 담는 건 안 되죠?”
“불가능합니다. 기본적으로 자연의 흐름은 게이트에 반응하지 않으니까요.”
“하긴.”
눈보라가 몰아치는 곳에 게이트가 생긴다고 해서, 그 눈보라가 게이트 안까지 들이치는 일은 없었다.
“흐음…….”
준혁은 턱을 쓰다듬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만한 자세로 도쿄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물의 벽.
도쿄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
도쿄만 해안에 길에 늘어서 있는 무수히 많은 헌터들.
그리고.
“저 개새끼…….”
눈동자가 풀린 채 물의 벽을 쳐다보고 있는 야마모토 테츠야가 있었다.
준혁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현실적으로 저 사람들 모두 못 구합니다.”
“그렇죠.”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 해도 모든 판단은 냉정하게 해야 했다.
“대신 구할 수 있는 만큼은 구해 보도록 합시다.”
“그래야죠.”
“게이트 만들 수 있습니까?”
“게이트?”
릴리안 우드의 반문에 준혁이 도쿄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들 통과시켜서 안전한 곳으로 옮길 수 있는 게이트.”
“한두 개로 될 일이 아니긴 한데…….”
“차도, 차도를 중심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차와 사람 모두 통과할 수 있도록.”
“하지만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도쿄는 이미 현세에 등장한 지옥과 같았다.
방송도 힘들다. 그리고 방송을 한다 해도 사람들이 그것을 귀담아듣고 그대로 따른다는 보장도 없었다.
“방법이 있습니다.”
준혁이 린디웨를 향해 말했다.
“너는 저 헌터들한테 가서 사람들을 도로 중심으로 모으라고 해라.”
“아! 그러면 되겠네.”
헌터들은 어쨌든 일반 사람들보다 강력한 이들이다.
위급한 상황이 되면 인간은 자신보다 강한 자를 따르는 법이었다. 헌터들이 나서서 사람들을 이끈다면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헌터라면 다치지 않는 선에서 사람들을 강제로 이끄는 일도 할 수 있었다.
“오케이!”
그때 릴리안 우드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저 도시는 너무 넓고, 사람 또한 과도하게 많아요. 혼자 저 도시의 도로들을 담당하는 건 무리예요.”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주십시오. 또 한 놈 있으니까.”
“네?”
고개를 갸웃거리는 릴리안 우드를 보며, 준혁이 한곳을 가리켰다.
야마모토 테츠야가 있는 곳이었다.
“린디웨.”
“응?”
“너는 헌터들한테 지시한 후에 저놈한테 얘기해라.”
“알았어. 그런데 너는?”
린디웨의 물음에 준혁이 거대한 물의 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도 일단은 할 수 있는 걸 해 봐야지. 최대한 시간은 벌어 볼게.”
지금 준혁이 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일은 저 물의 벽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라져!”
린디웨가 가볍게 대답을 남긴 후 해변으로 몸을 날렸다.
릴리안 우드 역시 빠르게 게이트를 통해 위치를 옮겼다.
“후우!”
그리고 준혁은 거대한 물의 벽을 보며 크게 심호흡했다.
아직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럴 때 뭐든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력의 근원을 흡수하면서 몸 상태는 물론 영력과 마나까지 충만했다.
무엇이 됐든, 무언가 해 볼 수는 있는 상황이었다.
-적사도 준비해라.
-배고파!
적사의 즉각적인 대답을 듣는 동시에 준혁이 스킬을 펼쳤다.
[천신강림]
준혁의 몸이 순식간에 거대한 거인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기다렸다는 듯 적사가 냉큼 이빨을 박아 넣었다.
이제 무엇을 해 볼 것인가?
가장 먼저 해 볼 수 있는 것은 물리적인 공격.
손에 들린 무상곤이 거대한 장봉으로 변했다.
그리고 준혁은 지체 없이 물의 벽을 향해 무상곤을 휘둘렀다.
“뛰어!”
“한 명이라도 더 구한다!”
“우리 손에 도쿄 시민의 목숨이 달려 있다!”
하시모토 타츠야를 필두로 한 일본 유수의 길드 소속 헌터들이 도쿄 도심을 향해 일제히 몰려 나갔다.
지방에서 싸우다가 버스를 타고 게이트를 통과해 온 헌터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도쿄는 물론 인근에 있던 많은 헌터들이 지금 이곳 해안에 모여 있었다.
만상만투의 등장 소식과 동원령을 접하고,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기 위해 모인 헌터들이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이곳에 왔다는 것은 그만큼의 사명감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당연히 사람들을 구하는데도 똑같은 무게의 사명감을 품고 있었다.
수백에 이르는 헌터들이 방사형으로 퍼져 나가며 고래고래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도로로 대피하십시오!”
“가급적 큰 도로를 향해 움직이십시오!”
“도로에 대피용 게이트가 열립니다! 도로로 이동하세요!”
그 모습을 확인한 린디웨는 빠르게 몸을 날려 야마모토 테츠야가 있을 곳으로 향했다.
야마모토 테츠야는 여전히 게이트에 반쯤 걸친 채로 앉아 있었다.
“야!”
린디웨가 다급하게 야마모토 테츠야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어이, 정신 차려! 사람들 구할 방법이 있어!”
그 말에 반응한 것인지, 야마모토 테츠야의 입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의……. 에도가…….”
‘에도’는 도쿄의 옛 지명이었다.
“이게 쳐 돌았나? 뭐라는 거야? 정신 차리라고!”
“나의 에도가…….”
하지만 야마모토 테츠야는 이미 충격에 반쯤 정신이 나간 듯 같은 말만을 되뇔 뿐이었다.
결국 참지 못한 린디웨가 버럭 고함을 쳤다.
“이 병신 새끼!”
그런데도 야마모토 테츠야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끊임없이 ‘에도’라는 말만을 되풀이할 뿐이다.
“하, 글렀다.”
린디웨가 절망감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 게이트는 이쪽에서 넘어갈 방법이 없었다. 눈앞에 두고 있어도 어찌해 볼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일.
린디웨는 황급히 도쿄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 시간 준혁은 찢어질 듯 크게 뜬 눈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망막에 뜬 시스템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