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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장. 필멸#5-
만상만투는 여덟 개의 머리를 갖고 있지만, 그 여덟 개의 머리가 모두 똑같지 않다.
그중 물의 권능을 지닌 사두의 머리가 가장 크다.
당연히 그 송곳니도 가장 거대하고 단단하며, 또한 날카롭다.
찌이이익-!
이두의 목이 찢어졌다.
아직 살아 있는 이두가 고통에 몸부림치고, 사두 역시 송곳니를 뽑기 위해 발버둥 친다.
하지만 서로 발버둥 치면 칠수록 사두의 송곳니는 더욱 깊게 이두의 목으로 파고들었다.
끄어어엉!
고통에 찬 포효가 주변의 공기를 뒤흔들었다.
거대한 몸뚱이와 이두의 머리를 잇는 기다란 목, 그 목에서 촉수처럼 수만 개의 가느다란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이두의 권능은 다름 아닌 ‘뱀’의 권능.
돋아난 촉수는 그 하나하나가 모두 날카로운 뱀이었다.
이두의 몸에서 돋아난 수만의 뱀이 사두의 머리를 휘감는다.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고통에 반사적으로 권능이 발휘된 것이었다.
-정신 차려!
사두가 기겁을 하며 외쳤다.
하지만 이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신의 격에 오르게 되면 육체의 제약이 사라진다. 그저 뒤집어쓰고 있는 껍데기 그 이상이 아니다.
그렇기에 신수들은 육체의 고통에 초탈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지금 독이 되어 돌아왔다.
피부가 찢기고 살점이 갈라지는 ‘진짜’ 고통의 그 선명하고 직접적인 감각에 대한 내성이 없었다.
이런 통증을 느낀 때는 신의 격을 얻기 전인 ‘미물’ 시절이었다.
까마득히 오래전의 기억.
그 당시는 생각이 아닌 본능에만 의지해 살아가던 말 그대로 미물이었다.
그러니 그때의 기억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다시 말해, 이런 선연한 고통은 ‘처음’이었다.
이는 이쪽 세계로 넘어오면서 생긴 묘한 불일치와도 연관이 있었다.
신수는 분명 신의 격을 갖고 있었다. 이는 이쪽 세계로 넘어와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상만투가 말했듯 이들은 진짜 신이 되기 위해 이쪽 세계로 넘어온 것이었다.
그로 인해 여전히 격은 지니고 있되, 육체는 진짜 ‘생물’의 육체가 되었다.
즉 기본의 권능을 포함한 정신의 격은 신의 그것이지만, 육체가 생기는 바람에 물질적인 격은 떨어진 상태가 되었다.
이로 인해 생기는 모순이 만상만투에게 직격타가 된 것이다.
그 고통에 이두의 사고는 완전히 정지되어 있었다. 그저 고통에만 반응할 뿐이었다.
이두에게서 돋아난 수만의 뱀들이 길게 몸뚱이를 뽑아내 사두의 머리와 목을 친친 휘어 감았다.
단단하기 짝이 없는 신수의 육체라지만, 이두가 행사하는 권능 또한 신수의 육체를 이용한다.
꾸드드드득!
이두의 뱀이 사두의 몸뚱이를 짜부라트릴 듯 거세게 죄었다.
끄어엉!
사두의 입에서도 똑같은 고통에 찬 포효가 터져 나왔다.
고통에 대한 면역이 없는 것은 ‘만상만투’지 ‘이두’가 아니다. 사두 역시 거대한 고통 앞에서 이두와 똑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재앙의 이적이 벌어졌다.
그렇잖아도 사납던 바다가 흉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만상만투의 몸뚱이를 중심으로 거대한 물의 벽이 쉴 새 없이 솟구쳤다.
솟구친 물의 벽은 이내 거대한 너울이 되어 도쿄만 좌우의 땅덩어리를 덮쳐 갔다.
처음에는 그저 커다란 파도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너울을 타고, 파도에 파도를 더할수록 그것의 높이는 점점 높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해일의 수준으로 거대한 물의 벽이 육지를 향해 무너지기 시작했다.
꽝, 꽈앙!
하지만 준혁은 오직 만상만투와 싸우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할 뿐이었다.
육지 쪽의 상황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놈을 그대로 두면 더 큰 재앙이 들이닥칠 일이었다.
지금은 이 괴물, 이 짐승을 죽이는 데 집중해야 했다.
이두의 권능에 묶인 사두의 송곳니 하나가 마침내 부러졌다.
허공에서 그것을 낚아챈 준혁이 만상만투의 몸뚱이 한가운데 박아 넣었다.
푸우욱!
사두와 이두가 동시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머리 쪽의 고통은 각자의 것이지만, 공유하는 몸통의 고통은 공통의 것이다.
몸뚱이 전체가 발작하듯 뒤흔들리고, 마침내 두 개 머리의 권능이 한데 뒤섞였다.
육지를 향해 뻗어 가는 해일은 단순한 해일이 아니었다. 무시무시한 뱀 떼를 품고 있는 해일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준혁은 구멍 나 버린 만상만투의 몸뚱이로 파고들었다.
양손에 맺힌 영력을 벼리고 또 벼렸다.
날카롭게 날이 선 두 개의 수도(手刀)가 만상만투의 살점을 깎고, 깎는다.
만상만투의 살점, 내부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끊임없이 공격을 가해 왔다.
최후의 발악이었지만, 그것이 준혁의 진격을 멈출 수준은 아니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그곳.
만상만투의 잿빛 영력에 휩싸인 심장이 거대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준혁이 그 심장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간 순간이었다.
키아아아!
갑자기 인간 크기의 만상만투가 튀어나와 준혁을 덮쳤다.
하지만 ‘물아일체’와 ‘전이’까지 받은 준혁을 상대할 수준은 아니었다.
우드드득!
순식간에 여덟 개의 머리가 으깨졌다.
그리고 준혁은 뜸들이지 않고 그대로 만상만투의 심장을 갈랐다.
푸헉!
북 터지는 소리처럼 둔탁한 소음과 함께 거대한 심장이 너무나도 싱겁게 찢어졌다.
쿠쿠쿠쿠쿵!
동시에 준혁이 밟고 있는 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심장이 터져 버린 만상만투가 단말마의 발버둥을 시작한 것이었다.
“후우! 그래도 신수라 이거지?”
보통의 생명체였다면 즉사했을 상황이다. 하지만 만상만투는 아직 죽지 않고 있었다.
준혁은 만상만투의 거대한 심장을 크게 찢어, 그 안으로 발을 밀어 넣었다.
만상만투의 진짜 생명의 근원을 부수기 위해서였다.
아까부터 온몸의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강렬하게 전해져 오는 영력의 근원, 그것을 쫓아 만상만투의 심장 안으로 들어섰다.
허공에 뜬 채 희미하게 박동하고 있는 작은 빛 덩어리가 있었다.
‘이게?’
준혁은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거대한 만상만투의 몸뚱이를 생각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크기였다.
직경이 겨우 50센티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구체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끊임없이 뿜어져 올라오는 영력은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거대한 힘이었다.
“후웁!”
준혁은 저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켰다.
영력의 근원에서 퍼져 나가는 기운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수했다.
정제되고 정제되어, 더할 수 없이 순수한 영력 그 자체였다.
자연의 순수한 에너지 덩어리 그 자체다.
신수가 괜히 신의 ‘격’을 가진 게 아니라는 걸 가장 확실하게 알려 주는 증거였다.
“후우웁!”
준혁은 길게 호흡을 고르며 오른손에 영력을 모았다.
마나와 함께 꼬인 영력이 준혁의 주먹에 뭉치고, 또다시 뭉치기를 반복하며 압축되었다.
그리고 내지른 주먹질.
[폭류격]
퍽!
그 거대한 기운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작고 담담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뒤이어 영력의 근원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지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격렬하게 흔들리던 만상만투의 몸뚱이도 마침내 요동을 멈추었다.
털썩!
“큭!”
-흑호!
-넵, 주인님!
준혁이 비틀거리는 무릎에 힘을 줘 애써 버티며 흑호를 불렀다.
공간을 열고 나타난 준혁이 황급히 흑호의 등에 올라탔다.
이제 조만간 ‘물아일체’가 풀린다. 그때가 되면 몸속에서 날뛰는 기운을 다스려야 하는데, 지금 이곳 만상만투의 심장 속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준혁이 흑호의 등에 올라타기 위해 손을 뻗을 때였다.
지이이잉-!
갑작스레 무언가 울리는 듯하더니 거대한 기류가 준혁을 향해 들이닥쳤다.
“크윽!”
반사적으로 신음이 튀어나올 정도로 거대한 기운이 준혁의 몸속을 뒤흔들었다.
‘이, 이거 설마?’
영력의 근원이었다.
정확하게는 그 근원에서 퍼져 나온 영력의 파도가 준혁을 향해 들이닥치고 있었다.
몸속으로 밀려 들어온 영력이 준혁의 영력에 더해지며 강제적으로 단전으로 밀고 들어왔다.
준혁은 두 눈을 부릅뜨며 반사적으로 가부좌를 틀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근원’이 깨어지며 갈 곳을 잃은 영력이 자연스레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이는 적사에게 영력을 보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적사에게서 영력을 보충하는 것은, 비어 버린 물통에 물을 채우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지금 밀려 들어오는 영력은 준혁이 가진 영력의 밀도를 올려 준다.
준혁은 이러한 현상을 이미 겪은 적이 있었다.
배면계에서의 일이었다.
등급이 오를 때 영력의 질이 올라간다. 그것을 통해 몸속에 변화가 찾아오는데, 그 변화는 다름 아닌 단전의 확장이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드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혼원급에서 더 올라갈 등급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의문도 잠시, 준혁은 이내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외부에서 유입된 기운이 실타래처럼 가느다란 영력을 자아내 준혁의 영력에 스며들었다.
순식간에 단전이 가득 들어차고, 마침내 단전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밀려 들어온 영력은 자신의 일을 멈추지 않았다.
영력의 실타래가 단전의 벽에 스며들기 시작하더니, 단전이 이내 탈피를 하듯 한층 넓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넓어진 단전이 점점 새로운 영력으로 채워졌다.
갑작스레 찾아온 변화에 준혁은 모든 생각을 멈추고, 오직 몸속의 변화를 관조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밀려 들어온 영력을 하단전의 확장에서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중단전을 넓히더니, 마지막으로 상단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 순간 준혁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상단전은 다름 아닌 마나가 자리한 곳이었다.
과연 마나가 자리 잡은 그곳에 영력이 들어설 수 있을 것인가.
알 수 없는 미지(未知)에 대한 두려움이 불쑥 솟구쳤다.
하지만 이 상황은 준혁이 멈추려 한다고 해서 멈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저항하지 않고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상단전을 가득 채운 영력이 준혁의 영력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어떤 ‘변화’가 찾아왔다.
‘허!’
준혁은 순수하게 감탄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기존에 준혁이 상단전에 채우고 있던 마나는 영력과 뒤섞인 마나였다.
그리고 외부에서 흘러 들어온 영력이 갑자기 그 성격을 변화시키더니, 이내 마나로 바뀌며 준혁의 상단전을 채웠다.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변화에 준혁은 의문을 품었고, 그 직후 본능적으로 상황을 이해했다.
‘어디까지나 순수한 영력이기 때문에 이런 변화가!’
근원에서 빠져나온 영력은 영력이라기보다는 순수한 에너지 그 자체에 가까웠다.
그 성질이 영력에 가깝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배면계 신수의 몸에 깃들어 있었기 때문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순수한 에너지는 마나와 같은 성질로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게 성질을 바꾼 에너지는 마침내 상단전까지 늘린 후에야 잦아들었다.
“후우!”
모든 것이 끝난 직후, 눈을 뜬 준혁의 시야에 신비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아직도 해소되지 못한 영력이 만상만투의 심장을 가득 채운 채 신비로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 기운은 더 이상 준혁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준혁의 몸도 현재로서는 한계에 달한 탓이었다.
이후에 꾸준히 적응하고 단련한다면 바뀔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했다.
“후!”
거듭 숨을 내쉰 준혁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흑호의 등에 올라탔다.
“가자!”
-네, 주인님!
흑호가 대답과 함께 ‘도약’을 펼쳐 다시 도쿄만 상공에 나타났다.
“엇!”
하지만 그곳에서 준혁은 또 다른 재앙을 맞이해야 했다.
“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