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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장. 필멸#4-
“네, 네놈! 지금 도쿄에 무슨 짓을 한 거냐! 저런 괴물을 불러들여서 어쩌자는 거야!”
“저 괴물이 아니면 다른 괴물에게 죽을 텐데 그건 괜찮습니까?”
기묘한 광경이었다.
준혁과 만상만투의 싸움으로 영력의 파편과 광풍이 휘몰아치는 그 한가운데 두 사람이 평온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로건 베런즈와 야마모토 테츠야의 모습이었다.
대화의 내용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상황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했다.
반투명한 모습으로 허공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납게 몰아치는 파도가 덮치고, 튀어나온 영력의 파편이 날아들었지만 모두 두 사람을 가볍게 통과하고 있었다.
게이트의 응용이었다.
게이트 너머 다른 곳에 앉아서 도쿄만 해상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야마모토 테츠야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차라리 다른 괴물이라면 싸워 보기라도 할 것 아닌가!”
저 괴물은 만상만투였고, 다른 괴물은 준혁을 일컫는 말이었다.
“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못할 말이라도 했나?”
“싸운다고 말한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렇다!”
“진심입니까?”
“거짓을 말하겠는가?”
“저 괴물과?”
로건 베런즈의 시선이 새삼스럽게 두 괴물의 싸움판으로 향했다.
헌터까지 포함한다 해도 인간의 영역을 한참 벗어나 버린 괴물들의 싸움이었다.
“못할 것도 아니지. 야마토의 남자라면 장렬하게 싸우다 죽는 것도 충분한 명예다.”
로건 베런즈의 시선이 다시 야마모토 테츠야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또 한 번 싸움판으로 갔다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한다.
“하!”
짧게 터트리는 한숨.
번갈아 보는 시선과 한숨에 담긴 감정은 비웃음이라기보다는 애잔함이었다.
“안타깝군요.”
“뭐?”
“최소한 자존심은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냥 아무것도 아닌 루저였군요.”
“뭐, 뭐라고? 감히 그따위 말을 함부로…….”
하지만 로건 베런즈는 야마모토 테츠야의 말에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았다.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제 힘을 휘두를 수 있을 때만 당당하고, 힘이 부족하니 그저 변명만 늘어놓는다.
지금도 만상만투가 아닌 준혁이라면 맞서 싸우겠다는 소리를 주워섬기고 있다.
하지만 저 두 눈에 서린 감정은 오직 공포감 그 하나였다.
“후우! 나도 아직 멀었군요. 당신 같은 사람을 쓸 만하다고 여겼다니. 실수입니다.”
“나의 사정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라! 너 역시 저 괴물과 싸우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 아니냐?”
“저는 최소한 저 두 괴물 중 어떤 놈과 싸워도 이기지 못한다는 걸 인정합니다. 그리고 저 괴물과 싸워서 죽는 게 두렵다는 것도 인정하죠. 자신의 한계와 두려움을 인정해야 비로소 발전할 수 있는 법인데……. 당신은 그게 없습니다.”
“그, 그래서?”
“아뇨,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저 괜히 만나러 와서 아까운 힘만 낭비한 꼴이 된 것 같아 아쉬울 뿐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 음?”
손을 휘저어 게이트를 닫으려던 로건 베런즈가 저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떨었다.
“뭐죠, 이건?”
“무슨 소리냐?”
야마모토 테츠야가 물었지만, 로건 베런즈의 시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만상만투와 준혁이 싸우는 전장도, 야마모토 테츠야도 아닌 반대 방향의 허공.
그곳에 흑호의 등에 올라탄 린디웨가 있었다. 흑호의 은신 덕분에 들키지 않았었는데, 지금 로건 베런즈에게 걸린 것이다.
린디웨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뭔가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흑호의 강력한 은신이 로건 베런즈에게 들킬 염려는 없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괜히 피한답시고 움직였다가 기척을 걸릴 수도 있기에 움직이지 않은 측면도 있었다.
린디웨가 아는 한, 배면계 역사에서 두 번째로 강한 자가 눈앞의 로건 베런즈였기 때문이다.
린디웨가 있는 곳을 빤히 바라보던 로건 베런즈가 가볍게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딴 장난질은 저한테 소용없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로건 베런즈의 손길을 타고 희미한 빛줄기가 실타래처럼 걸려 나왔다.
그리고 불끈 쥔 로건 베런즈의 손길에 빛줄기가 그대로 부서져 흩어졌다.
뒤이어 가볍게 털어 낸 손길에 게이트가 닫히며 반투명하던 로건 베런즈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무튼 인간 같지 않은 엽사 놈들…….’
린디웨가 고개를 쩔레쩔레 흔들며 진저리쳤다.
자신 또한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적어도 지금 순간만큼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도 하나는 건졌지.’
린디웨의 시선이 야마모토 테츠야에게로 향했다.
로건 베런즈에게는 실패했지만, 야마모토 테츠야에게는 성공했다.
야마모토 테츠야에게는 린디웨의 술법을 감지할 정도의 감각조차 없었다.
‘나는 이제…….’
그때 준혁에게 텔레파시가 날아들었다.
-야.
-응?
-좀 이따가 나 쓰러지거든 니가 호법 좀 서라.
-뭐?
이게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싶은 순간 ‘감응’이 끊어졌다.
린디웨의 시선이 황급히 준혁이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어? 저거?”
“물아일체.”
담담하게 뱉은 말과 동시에 준혁의 손에 들린 무상곤이 짙은 연기처럼 변하더니 손바닥으로 빠르게 빨려들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적사야, 전이!
적사를 통한 도핑까지 추가했다.
준혁의 피부가 묵색으로 변하고, 두 눈에서 녹색과 붉은색의 안광이 번뜩였다.
‘후우, 빨리 마무리를.’
이제부터는 속전속결이었다.
신수의 목숨줄은 지독할 정도로 질기다.
배면계에서의 봉인과 이곳에서의 죽음이 놈에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가정할 때 지금부터가 가장 힘들다.
신수 놈들은 죽기 직전이 가장 위험했다.
그러니 가장 강력한 힘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백효의 등을 밟고 쏘아져 나가던 상태에서 또 한 번 허공을 박찬다.
폭발적인 가속력과 함께 튀어 나간 준혁의 무시무시한 속도에 만상만투조차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꽝!
크하아아아-!
만상만투의 거대한 몸뚱이가 휘청거리며 몸뚱이의 절반 정도가 바닷물에 처박혔다.
마치 사람이 파리에게 한 대 맞고 땅에 처박힌 것처럼 어처구니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만상만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뭐지? 네놈에게 이런 힘이 있었던가?
“당연히 있었지!”
대답은 하면서도 손은 쉬지 않았다.
‘물아일체’를 통해 받아들인 무상곤은 이전에 쓰던 것과 제작 과정부터 달랐다.
이전의 무상곤은 험악하기 짝이 없는 배면계에서 살면서 만든 물건이었다.
생명을 건 악전고투를 해 가며 간신히 재료를 모아 겨우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무상곤은 다르다.
여유롭기 짝이 없는 상태에서 재료를 모았고, 던전 시스템에서 나온 재료에 드래곤 하트까지 갈아 넣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종로에 그 많은 드래곤들이 등장해 준 게 준혁에게는 큰 도움이 된 셈이었다.
어쨌든 그런 무상곤의 힘을 흡수했다.
적사를 통해 도핑까지 거듭했다.
‘물아일체’를 사용하기 전과 후의 준혁은 완전히 다른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준혁의 손발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만상만투의 입장에서 보면 먼지보다 작은 주먹이다.
하지만 그 주먹 한 방이 들어올 때마다 아주 오랜만에 갖게 된 진짜 육체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비늘이 깨지고, 가죽이 찢어지고, 살점이 터져 나갔다.
몸속 깊숙한 곳으로 침투한 영력이 내장을 뒤흔든다.
-죽어라, 도살자!
버럭 소리를 내지른 만상만투의 공격도 만만치 않다.
거대한 몸뚱이를 사정없이 휘두르고, 쉴 새 없이 권능을 뽑아낸다.
도쿄만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바닷물이 통째로 요동치며 사나운 격류를 만들어 냈다.
그렇잖아도 이전 싸움의 여파로 사나웠던 바다였다.
두 존재의 충돌로 흩어진 채 사그라지지 않은 영력이 곳곳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곳에 한층 거대한 영력이 휘몰아쳤다.
곳곳에서 뭉친 영력들이 서로 터져 나가며 그렇잖아도 거친 바다의 격류를 한층 더 사납게 뒤흔들었다.
-믿을 수 없다! 한낱 인간에게 이런 힘이라니!
‘천신강림’을 쓰지도 않았는데 피지컬만으로 자신과 막상막하를 이루는 모습에 만상만투는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영성을 깨우치고, 긴 세월 수련을 쌓으면서 ‘인지’를 얻게 된 후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감정이었다.
그것은 바로 ‘공포’였다.
반면 준혁은 있는 대로 힘을 폭발시키고 있었다.
그렇게나 힘겨웠던 신수를 손으로 패고 있다는 사실에, 과거의 원한까지 더해 흥이 솟구칠 지경이었다.
배면계에서도 이런 싸움이 가능하기는 했었다.
무상곤의 질이 다르기는 해도, ‘물아일체’와 ‘전이’를 동시에 사용하면 충분히 가능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배면계에서는 싸움이 끝난 이후를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당장 눈앞의 신수를 봉인한다 해도, 그 후에 무방비 상태가 되어 버리면 어떤 위험이 닥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면계에서의 싸움은 항상 지독한 관리가 필요했다.
이렇게 힘을 풀어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전술을 짜고, 상대의 방식을 습득하고, 전술을 수정하기를 끊임없이 반복해야 했다.
신수 하나를 잡는 데 열흘 정도의 시간은 기본으로 걸릴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다른 신수의 공격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자신의 주변을 지켜 줄 동료도 있었다.
그렇기에 마음껏 힘을 풀어낼 수 있었다.
쾅, 콰쾅!
한참을 울려 퍼지던 굉음이 어느 순간 뚝 멈췄다.
그리고 남아 있던 셋 중 또 하나의 머리가 사라졌다.
이번에는 힘에 의해 목이 뜯겨 나갈 정도로 거친 방식이었다.
-이노오옴!
만상만투의 마지막 발악이 시작되었다.
그렇잖아도 사납게 요동치던 바다가 급기야 수십 미터 높이의 파도로 변했다.
하지만 준혁은 더 이상 대거리도 하지 않았다.
‘물아일체’는 타임 리미트가 있는 기술이었다.
시간이 늘어났다고는 해도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푸욱!
갑자기 물속으로 들어간 준혁이 만상만투의 몸통 바로 아래에서 솟구쳤다.
콰르르릉!
여러 개의 머리와 꼬리가 모여 있는 커다란 몸통이 마치 파도라도 치듯 격렬하게 꿀렁거렸다.
그 몸통을 거꾸로 타고 달린 준혁이 순식간에 놈의 몸통 위에 올라섰다.
빡, 빠악, 빡!
쉴 새 없이 내지른 주먹질에 허공에 떠 있던 만상만투의 몸뚱이가 수십 미터씩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죽어라!
콰르르르르!
여전히 리더인 사두의 입에서 세찬 물줄기가 뿜어져 나온다.
하지만 준혁은 그 모든 공격을 일일이 손으로 쳐 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발길질로 바꿔 만상만투의 몸뚱이를 두드렸다.
아직 남아 있던 두 개의 머리, 사두와 이두가 모가지를 길게 뽑아 제 등판에 있는 준혁에게 아가리를 뻗었다.
크허어엉!
육성으로 뿜어내는 포효와 함께 거대한 두 개의 뱀 머리가 날아든다.
그리고 준혁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탁!
가볍게 뛰어오른 준혁의 손에 어느새 이두의 송곳니가 잡혔다.
이두가 황급히 고개를 털어 내려 했지만, ‘물아일체’에 ‘전이’까지 더해진 준혁의 완력을 이기지 못했다.
이두의 머리가 급격하게 곤두박질쳤다.
목표는 제 놈의 몸뚱이.
콰악!
크하악!
묵직한 소음과 비명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준혁이 이두의 이빨을 제 몸뚱이에 박아 넣은 것이었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준혁은 어느새 요동치는 사두의 주둥이를 잡고 떨어지고 있었다.
이두의 목을 향해서였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준혁의 주먹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