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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받고 각성 더!-151화 (15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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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장. 필멸#3-

거대한 해일이 휩쓸고 지나간 해안은 말 그대로 폐허로 변해 있었다.

해안 너머 도쿄만 해상에는 괴물과 인간이 싸우고 있었다.

괴물은 몸길이만 무려 3킬로미터에 신의 격에 도달한 존재였고, 인간 역시 현 지구상에서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다고 공인된 남자였다.

그런 초월적인 두 존재의 전장이 평온할 리가 없었다.

두 존재를 중심으로 세찬 바람과 함께 광포한 기운이 사납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하지만 폐허가 된 해안은 그저 스산한 분위기만 자아낼 뿐이었다.

폭이 15킬로미터 내외인 도쿄만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두 존재의 싸움이 아직까지는 해안에 영향을 주지 않고 있었다.

모든 기운이 맞서고 있는 서로를 향해서만 집중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폐허에 갑자기 공간이 일그러지며 투명한 게이트들이 하나둘 불쑥불쑥 일어났다.

부아앙!

불쑥 튀어나온 것은 맹렬한 엔진 소리를 토해 내고 있는 버스들이었다.

게이트 하나에 한 대씩 버스들이 허공을 뚫고 나와 폐허 곳곳에 처박히듯 급정지했다.

문이 열리며 우르르 쏟아져 나온 이들은 정검회의 하시모토 타츠야를 비롯한 일본의 헌터들이었다.

“저, 저기!”

한 헌터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도쿄만으로 향했다.

“야, 야마타노오로치!”

“미친! 저게 진짜라고?”

“말도 안 돼!”

해안을 가득 메운 헌터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경악스러운 외침을 터트렸다.

‘남은 머리는 네 개…….’

자신들이 일본 각지에서 서천회의 말단 조직들을 없애고 돌아오는 사이에 괴물의 머리 개수가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괴물과 맞서 싸우던 사람의 손에 거대한 칼 한 자루가 떠올랐다.

뒤이어 거대한 칼이 날카로운 원을 그렸다.

인지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쾌속한 도격이 끝난 그 순간, 괴물의 머리 하나가 잘려 나가 바닷속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상황을 지켜보던 헌터 하나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스, 스사노오!”

스사노오, 야마타노오로치의 목과 꼬리를 베었다고 전해지는 일본 신화의 신이었다.

“스사노오의 현신이다!”

“스사노오!”

야마타노오로치와 꼭 닮은 괴물의 목을 베어 낸 그 모습에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은 일본인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헌터들이 환호를 터트리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두 사람이 있었다.

“준혁 씨 들으면 안 좋아할 것 같은데?”

그렇게 중얼거린 사람은 다름 아닌 유민섭이었다.

그리고 유민섭 옆의 가면을 쓴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유민섭이 급히 영어로 말했다.

“아, 한국말로 해서 못 알아들었겠네요. 준혁 씨가 저 얘기를 들으면 안 좋아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저 얘기?”

“저 사람들, 지금 준혁 씨에게 일본의 신을 갖다 붙이고 있거든요.”

“신? 그게 나쁜 건가요?”

“나쁜 건 아닌데……. 한일 감정이 좀 안 좋으니까요.”

가면을 쓰고, 커다란 로브를 둘러쓴 사람의 정체는 릴리안 우드였다.

준혁이 나리타 공항으로 달려간 후, 릴리안 우드는 지금의 차림으로 바꿔 유민섭에게 다가갔었다.

릴리안 우드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행동이었다.

그녀에게는 수많은 헌터들의 정보가 있었다. 그중 릴리안 우드가 개인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던 사람 중 하나가 유민섭이었다.

릴리안 우드가 보기에 유민섭은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다.

‘좋은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선의’를 품은 사람.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좋은 일을 우선시하는 사람이었다.

이미 어마어마한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조금 손해를 보는 게 뭐 그리 힘드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순수한 선의로 누군가를 돕는 것은 아무리 가진 것이 많고 힘이 있어도 어려운 일이다.

세상의 수많은 억만장자와 권력자 중에 실제로 그 정도의 선의를 드러내는 사람이 소수라는 것이 그 방증이다.

그러한 기준에서 릴리안 우드가 보는 유민섭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얼굴을 가리더라도 직접 그 앞에 설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 각지의 버스들을 이곳으로 모은 것도 유민섭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전에 하시모토 타츠야가 유민섭에게 부탁했었다.

한일 사이의 감정에 대해 말하자 릴리안 우드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대강은 알고 있어요.”

이름을 날리는 헌터들을 조사하면 당연히 그 배경도 조사한다.

그 조사가 깊어지면 당연히 해당 헌터의 소속과 국가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알게 된다.

그런 이유로 릴리안 우드도 한국과 일본 사이의 역사를 알고 있었다.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감정의 골이 깊은 모양이군요?”

릴리안 우드의 말에 유민섭이 애매한 표정으로 답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저도 뭐 일본에 무작정 악감정만 품고 있는 건 아닙니다. 하시모토와 꽤 가까운 사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국가 차원에서 반드시 마무리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하지 않는 한 악감정이 사라지진 않을 겁니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뇨, 이해 못할 겁니다.”

“네?”

“과거 식민 지배를 했던 열강들이 제대로 사과한 적은 거의 없는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손익을 따져 가며 어느 정도의 제스처를 취한 것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아, 아니, 그건…….”

“영국식 영어를 사용하시는 걸 보면 영국분인 것 같은데……. 마찬가지인 것으로 압니다. 영국이 케냐의 마우마우족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배상한 것도, 문건이 발견된 후 소송에서 패한 탓에 했던 것이죠. 또 인도에 간디의 동상을 세우면서도 시위대 학살에 대해 사과는 하지 않았습니다.”

릴리안 우드는 잠시 말을 잃었다.

인정해야 할 것 같기는 한데 왠지 모를 억울함에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이야기의 마무리는 유민섭이 했다.

“당사자가 아닌 제가 이래라저래라 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가해자의 위치에 있는 분이 피해자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말이 조금 거슬렸습니다. 그런 이유로 사과는 하지 않겠습니다. 한 가지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당신이 직접적인 가해자라는 의미는 아니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뼈를 때리는 유민섭의 말에 릴리안 우드도 더는 그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서로 감정적으로 불편할 수 있는 상황이니, 먼저 가 보겠습니다.”

“네.”

“다음번에는 편하게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네요.”

“저도 그런 바람입니다.”

말을 마친 릴리안 우드가 조용히 게이트를 열고 그 자리를 떠났다.

“음, 좀 울컥했네.”

릴리안 우드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유민섭이 스스로에게 혀를 차며 말했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할 말 못하며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유민섭은 고개를 절레절레 털어 낸 후 모여 있는 헌터들을 가만히 보았다.

지금 이 헌터들은 괴물로부터 도쿄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모인 것이었다.

물론 그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 봐야 현재로서는 괴물을 상대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뭐든 할 수 있는 게 있으리라 생각하고 모였다.

유민섭은 천천히 거리를 벌리며 하시모토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유 길드장님.)

“이 정도가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입니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는 않을 텐데요?”

(그래도 뭐든 해야죠. 도쿄는 일본의 심장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지켜 낼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여기까지가 유민섭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초월적인 두 존재의 싸움으로 해상은 그야말로 폭풍에 휩싸여 있었다.

해수면은 물론 깊은 곳의 바닷물까지 사납게 요동치고 있었다.

거대한 싸움의 여파로 인해 사방으로 튀어 나간 영력의 파편 때문이었다.

서로 섞일 수 없는 두 개의 거대한 힘이 부딪치며 퍼져 나간 영력들이 격렬하게 뒤엉키며 대기를 흔들어 놓고 있었다.

세찬 폭풍 속에서 두 존재의 싸움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있었다.

“하나 묻자.”

-나를 앞에 두고 그런 여유라니, 언제 봐도 건방진 놈이구나. 도살자 김준혁.

“건방? 대가리가 다섯 개나 떨어진 놈이 할 소리는 아닌데?”

-그렇다고 네놈이 날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라.

둘 다 짜기라도 한 듯, 서로 공격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 간다.

물론 이유는 있다.

준혁은 극심하게 소모된 영력을 보충할 시간이 필요했다.

적사를 통해 영력을 보충한다고는 해도 거기에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만상만투의 경우는 다섯 번째 목이 잘려 나가며 들이닥친 데미지를 수습해야 했다.

아무리 신의 격을 가졌다 해도 육체의 굴레에 갇힌 이상 충격이 없을 수 없었다.

“보아하니, 넌 여기서 죽으면 봉인이고 뭐고 없이 진짜 죽음을 맞이할 것 같던데, 맞냐?”

-그렇다.

“이런 거 하나는 솔직해서 좋네.”

-‘신’인 우리가 하찮은 인간에게 거짓을 말해야 할 이유가 있던가?

“거기서는 의견 차이가 좀 있는 것 같다만?”

만상만투는 이죽거리며 대거리를 하는 준혁을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물론 속으로는 데미지를 해소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게 무어냐?

“배면계에 있으면 진짜 신이라도 된 것처럼 편하고 좋잖아? 죽을 염려도 없고. 그런데 왜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는 거 알면서도 바득바득 이쪽 세상으로 기어 들어온 거냐?”

-흐음, 딱 인간 따위가 할 수 있는 질 낮은 고민이구나.

“짐승 새끼가 끝까지 대단한 척은…….”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만상만투의 육체가 변하고 있었다.

잘려 나가 흉측하게 휘청이는 모가지들이 서서히 삭아 없어지고, 그것들이 뻗어 나온 몸뚱이의 형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준혁 또한 어느새 절반 이상 영력이 차올랐다.

-우리는 신의 격을 갖고 있지.

이는 준혁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까 겪어 본 ‘창조’라는 권능. 무슨 말을 하든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지만 그것이 진짜 ‘신’이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음?”

-신의 격을 갖고는 있지만, 진짜 신은 아니지 않은가?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신수(神獸)라는 이름부터가 그런 의미를 품고 있었다.

말 그대로 신의 격을 갖춘 ‘짐승’이라는 뜻이지, ‘신’ 그 자체는 아니었다.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신’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깨달았다.

“뭘?”

-배면계에서는 절대 그것을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설마 이쪽 세계로 넘어오면 신이 될 수 있다고?”

준혁은 저도 모르게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배면계의 신수들은 정말 앞다투어 이쪽 세계로 넘어오려 할 것이다.

그놈들이 한꺼번에 넘어와 난장판을 만든다면 그것은 절대 준혁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현재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큰 일이지.

담담하게 내뱉는 만상만투의 말에 준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짐승 주제에 신은 무슨! 그냥 나한테 뒈져라!”

준혁으로서는 하찮기 짝이 없는 그것을 위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을 하는 양 말하는 저 모습을 참고 넘어가 줄 수가 없었다.

때마침 영력도 새롭게 차올랐다.

“끝을 보자, 이 뱀 대가리야!”

일갈을 터트린 준혁이 그대로 백효의 등판을 밟고 튀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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