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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장. 필멸#2-
준혁이 인벤토리에서 꺼내 든 것은 짙은 먹색의 포승줄, 묵룡삭이었다.
-적사야, 그만.
-배고파!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늘 똑같은 대답과 함께 적사의 ‘전이’가 멈췄다.
그 대신 준혁이 택한 것은 ‘만력’이었다.
“흐으으읍!”
‘전이’가 ‘적사의 영력’을 받아들여 위력을 키우는 것이라면, ‘만력’은 순수한 영력을 보충하는 스킬이었다.
그런데 준혁의 손등에 이빨을 박아 넣은 적사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준혁을 본다.
-배고파?
-어, 배고파.
준혁의 대답에도 적사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린 후 재차 물었다.
-배고파?
적사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력’은 부족한 영력을 빠르게 보충하기 위한 기술이었다. 그런데 지금 준혁의 단전에는 영력이 가득 차 있었다.
더 이상 채울 영력이 없었다.
하지만 준혁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해.
순간 좌우로 잘게 흔들리는 적사의 눈동자가 품은 감정은 불안감이었다.
하지만 준혁은 말도 하지 않은 채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적사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정도로 강력한 명령이라면 적사에게는 거부할 방법이 없었다.
풀썩!
적사를 중심으로 붉은 영력이 피어올라 준혁의 몸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끅!”
그리고 준혁의 입에서 튀어나온 묵직한 신음 한 줄기.
영력이 가득 찬 상태에서는 원래 영력을 더 밀어 넣으면 안 된다.
더 팽창할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이 가득 찬 풍선에 계속 바람을 밀어 넣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터져 버린다.
그와 유사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행동이었다.
적사가 불안해하는 이유도, 준혁이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린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영력이 가득 찬 단전에 영력을 밀어 넣으니 단전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 탓이었다.
까드드득!
하지만 준혁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상단전의 마나를 따로 움직여 단전 전체를 감싸 최대한의 보호까지 했다.
지금 그에게는 최대한 많은 영력이 필요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물은 점점 차올랐다.
어느새 준혁이 ‘천천’으로 뛰어올랐다가 머리를 부딪친 천장까지 불과 5미터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적사, 더! 빨리!
“끄으윽!”
새어 나오는 신음이 한층 짙어졌다. 하지만 준혁은 참고 또 참았다.
조금 더, 영력이 더 필요했다.
호흡을 가다듬는 준혁의 눈에도 불안감이 번졌다.
‘신격은 신격이네.’
불안감의 원인이었다.
신의 ‘격’을 가르는 기준이 바로 창조였다.
단순하게 신수들이 봉인을 당했을 때, 기운을 모으며 때를 기다리다가 자신의 육체를 만들어 내는 것도 창조의 영역에 속하는 권능이었다.
준혁에게 머리가 잘려 나간 후, 아예 처음부터 머리가 일곱 개만 있었던 것처럼 육체를 재구성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다만 터져 나간 육두까지 재생하지 못한 것은 준혁으로서도 의외였다.
‘진짜 육체라서 그런가?’
완전한 ‘죽음’의 가능성이 생긴 것은 육체를 가지게 된 탓이었다.
그렇다면 사라진 육체에까지 창조의 권능이 닿지 못해서 그랬다고 볼 수 있었다.
어쨌든 그런 신의 격까지 발현하여 만들어 낸 것이 지금 준혁이 갇힌 시공간이었다.
오직 준혁을 가두고 죽이기 위해 창조한 새로운 차원이다.
지금 그 차원을 부숴야 하는 입장이니 아무리 담대한 준혁이라 해도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기회는 단 한 번.
실패는 곧 죽음이었다.
“후우, 후!”
단전은 이미 몇 번이고 한계를 넘어섰다. 차곡차곡 담긴 영력의 밀도가 말도 안 될 정도로 올라갔다.
마나를 움직여 단전을 감싸지 않았다면 벌써 몸이 산산조각 났을 정도로 압축된 영력.
그 순간 준혁이 완전히 밀폐 상태로 단전을 감쌌던 마나의 한 부위를 열었다.
까드드득!
좁은 경맥을 타고 흐르는 거센 영력의 급류에 준혁은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아붙였다.
준혁의 의도대로 흘러나온 영력이 마침내 묵룡삭에 담긴다.
우우우웅!
시커먼 영력에 휩싸인 묵룡삭에서 기묘한 울림이 퍼져 나왔다.
-발버둥 쳐도 소용없다.
준혁을 지켜보던 만상만투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흐아아앗!”
기합성과 함께 휘두른 오른손.
예의 울림이 한층 거대해지며 묵룡삭이 허공으로 쭉 뻗었다.
묵색의 포승줄이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날렵하게 뻗어 나가 차원의 천장을 거세게 두드렸다.
꽈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무시무시한 영력이 폭사되었다.
하지만 차원의 천장은 멀쩡했고, 되돌아온 것은 만상만투의 비웃음이었다.
-크하하하! 겨우 인간 따위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건 내 힘으로도 깰 수 없는 벽이다.
준혁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여, 보이지 않는 차원 벽 너머 만상만투를 향했다.
실핏줄이 죄다 터져 충혈된 눈에서 시뻘건 살기가 뭉클 피어올랐다.
하지만 만상만투는 콧방귀조차 뀌지 않았다.
-크흐흐흐! 그렇지.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노려보는 것밖에 없지.
그 순간 준혁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솟구쳤다.
“진짜냐?”
-뭐?
“너도 어찌할 수 없다는 그 말이 진짜냐고.”
-크흐! 사실이다. 이제야 네놈의 상황이 실감…….
만상만투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준혁이 짤막하게 말했다.
=나(拿).포(捕).
우우우웅!
묵룡삭이 또 한 번 거대한 울림을 떨쳤다.
-무, 무슨!
무언가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만상만투의 당혹스러운 외침이 먼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준혁이 갇힌 차원의 천장에 갑자기 묵색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뒤이어 천장의 공간 자체가 뒤틀리는가 싶더니, 마치 블랙홀이라도 된 양 소용돌이 한가운데가 갑자기 열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만상만투의 황망한 외침에 화답이라도 하듯, 하늘 위에 공간이 불쑥 열리며 묵룡삭이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 만상만투의 머리 7개가 황급히 몸뚱이를 배배 꼬며 묵룡삭을 피했다.
하지만 용언이 걸린 묵룡삭이었다.
만상만투의 회피 동작 따위는 가볍게 무시했다.
허공에 거대한 원을 그린 묵룡삭이 순식간에 고리를 좁힌다.
꽈악!
좁아진 묵룡삭의 고리에 만상만투의 머리 중 3개가 걸려들었다.
-이딴 물건으로 나를 가둘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버럭 호통을 내지르지만, 아무리 힘을 주어도 묵룡삭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런 놈을 본 준혁이 또 한 번 용언을 터트렸다.
=치(置).환(換).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묵룡삭에서 피어오른 거대한 기운이 묶어 놓은 세 개의 머리를 연기처럼 흐릿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준혁의 몸 또한 마찬가지 상태가 되었다.
-안 돼!
기겁한 만상만투의 절규가 길게 메아리친다.
그리고 그 메아리가 채 잦아들기도 전에 세 개의 머리가 묵룡삭을 타고 열려 있는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준혁 역시 마찬가지.
그아아앙-!
크허어어어!
만상만투의 입에서 짐승의 그것과 같은 고통에 찬 포효가 터져 나왔다.
준혁은 어느새 해당 차원의 바깥으로 나와 있었다.
그 대신 수조처럼 생긴 차원 안에는 만상만투의 잘린 머리 세 개가 물속을 둥둥 떠다녔다.
“크흑, 흑!”
준혁 또한 무사하지 못했다. 어찌나 숨을 크게 몰아쉬는지 어깨까지 들썩거릴 정도였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적사가 황급히 이빨을 박아 넣고 ‘만력’을 펼쳤다.
급격하게 영력이 차오른다.
그사이 준혁은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연거푸 다섯 병을 목구멍으로 들이부었다.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치료 포션에는 소진된 체력을 보충해 주는 효과도 있기 때문이었다.
“후우, 후!”
겨우 숨이 진정되었다.
적사가 기를 쓰고 영력을 채우고 있지만, 이제 겨우 절반밖에 차지 않았다.
만상만투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머리를 4개나 잃어버린 충격이 생각보다 컸던 탓이다.
‘제길! 망할 실패작!’
묵룡삭은 실패작이었다.
창고에 처박혀 장비를 제작할 때 준혁이 가장 공을 들인 물건이 묵룡삭이었다.
금문묵룡삭의 ‘용언’이 제법 유용했었기에 공을 들일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종로 사태에서 얻었던 드래곤의 사체, 그리고 배면계에서 모았던 갖가지 재료들을 총동원해서 만들었다.
때려 부은 드래곤 하트만 무려 일곱 개였다.
그런데 그 일곱 개의 드래곤 하트가 문제가 되었다.
제작 과정에서 무슨 시너지를 일으켰는지, 준혁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기운을 품은 것이었다.
시험 삼아 용언을 사용했다가, 피를 몇 사발이나 토하고 그대로 기절했다가 사흘이 지난 후에야 깨어났었다.
그러고도 영력의 진탕으로 경맥이 망가져 회복에 무려 열흘을 더 누워 있어야 했다.
포션으로 내상을 다스리는 것도 힘든 탓에 린디웨의 도움을 받았는데도 열흘이나 걸린 것이다.
위력은 정말 강력했지만 절대 실전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동안 이런저런 싸움을 하는 동안에도 묵룡삭은 꺼내지 않은 이유가 이것이었다.
그런데 그 실패작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으니 꽤 묘한 아이러니였다.
지금도 아주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지난번 입은 내상 정도는 아니지만, 몸속의 경맥이 너덜너덜해져 터지 나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두 번 다시 안 쓴다!’
준혁은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며 무상곤을 고쳐 쥐었다.
일단은 저 망할 뱀 대가리를 죽이는 게 먼저였다.
-백효!
-넵!
백효를 발판 삼아 또다시 ‘천천’을 전개했다.
준혁의 신형이 폭발적인 추진력을 안고 쏘아져 나갔다.
손에 쥔 무상곤은 거대한 언월도로 형태를 바꾸었다.
[천단참]
수직으로 떨어져 내린 거대한 언월도가 남아 있는 만상만투의 또 다른 목 하나를 내리찍는다.
쩌어억!
완전히 자르지는 못했다. 그래도 거의 3분의 1을 파고들었다.
만상만투에게 고통을 안겨 주기에는 충분한 결과.
크허어어어!
또 한 번 육성으로 울려 퍼진 만상만투의 포효.
-이노옴!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 주마!
분기탱천한 만상만투의 외침과 동시에 바닷물이 거대하게 용솟음쳤다.
남아 있는 4개의 머리는 일두, 이두, 사두, 팔두. 각각 불과 뱀, 물, 그리고 뇌전을 권능으로 품고 있는 머리들이었다.
촤아아아아!
자연의 법칙을 무시한 채 미친 듯이 몰아치는 거대한 파도들이 사정없이 준혁을 후려쳤다.
물줄기를 타고 오른 어마어마한 뱀 떼가 준혁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뇌전에 휩싸인 불덩어리가 비처럼 쏟아졌다.
짙은 영력을 머금은 언월도가 날아드는 파도를 후려친다.
하지만 준혁은 지금 완전하지 않은 몸 상태였다. 모든 공격을 다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물러서지는 않았다.
맞아야 할 것은 묵린갑을 최대한 활용하며 데미지를 줄이고, 치명적인 공격은 반드시 피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일방적으로 맞기만 하지는 않는다.
영력의 화살을 날리고, 시시각각 ‘술’을 펼쳐 공격 또한 퍼붓는다.
네 개의 머리가 잘려 나간 탓에 심각한 데미지가 쌓여 있는 만상만투 또한 준혁의 공격을 모두 파훼하지 못했다.
맞고 때리고, 맞고 때리고.
네 개의 머리만 남은 팔두팔미의 괴물과 인간 사이에 격렬한 난투전이 펼쳐졌다.
인간과 괴물은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하지만 어느 한쪽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는 순간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탓이었다.
그리고 이 말도 안 되는 난타전이, 1천 4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는 일본의 수도 도쿄에 무시무시한 재앙을 불러들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