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받고 각성 더!-149화 (149/240)

-149-

-55장. 필멸#1-

-야, 정신 차려!

린디웨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 말에 준혁의 고개가 린디웨 쪽으로 슬며시 돌아갔다.

-아주 멀쩡한데?

꽤 거리가 있는 편이기는 했지만, 린디웨의 육체가 가지고 있는 스탯은 배면계의 천원급이었다.

멀다고 보고자 하는 걸 제대로 못 볼 리가 없다.

-눈이 반쯤 맛이 갔는데 뭐가 멀쩡해?

-좋잖아.

-좋기는 뭐가?

-저 지긋지긋한 짐승 새끼를 진짜 완전히 죽일 수 있다는 것. 상상만 해도 짜릿한데?

이 말에는 린디웨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그녀는 배면계 시스템의 기억, 정확하게는 쌓여 있는 기록을 열람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인간의 감정으로 들여다본다.

그렇기에 알고 있다.

그 지긋지긋한 감정을.

하지만 지금 준혁의 얼굴에서는 광기마저 엿보였다.

준혁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배면계에서 준혁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곳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 덕분이었다.

너무나 당연히 알고 있을 것 같지만 아무것도 없는 환경에서는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익혀야 하는 것들.

먹는 법, 자는 법.

그리고 귀환을 위해 필요한 싸우는 법까지.

그 모든 것을 그곳에서 만난 인연들을 통해 습득한 준혁이었다.

그곳에서 함께 지낸 사람들은 모두 소중한 ‘가족’이었다.

그 가족들이 저 신수라는 짐승들에게 죽었다.

그리고 지금, 절대 죽지 않는다던 짐승을 마침내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넌 저놈 어떻게 할 수 없는지 좀 봐라.

-저놈?

-안 보이냐? 로건 베런즈.

-뭐?

그제야 린디웨가 황급히 주변을 확인했다.

그리고 고개가 멈춘 그 방향, 어렴풋하게 보이는 게이트 너머로 로건 베런즈의 모습을 확인했다.

-어떻게 된 거야?

-지금 저 짐승 새끼들을 불러낼 수 있는 게 저놈 말고 또 있겠어?

-그건 그렇지?

-그러니 저거 어떻게 잡을 수 있는지 좀 확인해 봐.

-내가? 어떻게?

-저거 게이트 너머잖아. 너도 게이트 열 줄 알잖아.

-그건 시스템 한정이야. 일종의 접속 권한 같은 거…….

-그랬냐?

머릿속을 울리는 준혁의 생각에 짙은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그것을 느낀 린디웨가 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뭐, 일단 뭐든 해 볼게.

-오케이!

힘찬 대답과 함께 준혁은 백효의 등에 올라탄 채 하늘을 날았다.

대화를 위해 소극적으로 수세를 취하던 준혁은 곧장 공세를 펼쳤다.

-버텨!

짧은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백효의 등판이 딱딱하게 변했다.

콰앙-!

거세게 백효의 등판을 박찬 준혁의 신형이 쏘아 낸 총알처럼 만상만투를 향해 날아갔다.

백효를 이용해 ‘천천’을 수평으로 펼친 것이었다.

직선으로 쭉 뻗는 그 궤도 정면에 짙은 영력이 피어오른다.

하지만 속도는 준혁이 앞섰다.

영력이 제대로 권능으로 발현하기도 전에 만상만투 앞에 도착했다.

푸우욱!

거대한 창으로 변한 무상곤이 잘려 나간 육두의 목 단면을 깊숙이 찔렀다.

과르르릉!

천둥 같은 소리가 해수면은 물론 하늘까지 격렬하게 떨어 울렸다.

만상만투가 내지른 비명이었다.

잘려 나간 목이 고통으로 거칠게 요동친다.

하지만 준혁은 이미 칼을 휘두르며 그 잘려 나간 목의 단면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이 하찮은 놈이!

지금껏 느껴 본 적 없는 육체의 고통에 만상만투는 온몸을 뒤흔들며 고통에 떨었다.

이 또한 만상만투가 신격의 존재에서 육체를 가진 필멸의 존재가 되었다는 방증이었다.

배면계의 신수는 육체 자체가 영력을 기반으로 구성한 것이기에 고통을 느끼지 않았었다.

준혁이 파고드는 통로는 육두의 목에 있던 식도였다.

잘린 목의 식도가 바짝 죈다.

하지만 준혁은 거침없이 칼을 휘두르며 파고들었다.

이대로 위장까지 들어가 만상만투의 몸속을 난도질할 기세였다.

그렇게 얼마나 파고들었을까.

“어?”

갑자기 사라진 저항감에 준혁이 멈칫하는 순간 발아래가 허전해졌다.

갑작스러운 추락에 준혁의 신형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백효!

하지만 순식간에 날아든 백효가 준혁을 등에 태워 날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 준혁이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여전히 신수는 신수네.”

8두였던 만상만투가 7두로 변해 있었다.

단순히 목이 하나 잘려 나가 7두가 아니라, 준혁에게 잘려 나간 육두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즉, 거대한 몸통에서 길게 뻗어 나왔던 육두의 모가지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즉, 잘려 나간 단면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준혁의 공격에 위기감을 느끼고 육체를 재구성한 것이다.

-준비해!

-넵!

준혁은 또다시 백효의 등판을 지지대로 ‘천천’을 펼쳤다.

카가가가각!

언월도의 날카로운 칼날이 만상만투의 거죽을 긁으며 지나간다.

스치듯 지나치면 반대편에 이미 백효가 날아와 준혁의 지지대가 되어 준다.

그리고 다시 펼치는 ‘천천’.

꽈아앙!

거대한 해머로 변한 무상곤이 만상만투의 머리 하나를 두드리고, 그 머리에 착지한 준혁이 또다시 ‘천천’을 펼쳐 허공을 난다.

끝없이 ‘천천’을 반복하며 데미지를 쌓는 작업이 반복되었다.

준혁이 배면계에서 신수를 상대할 때 주로 사용하던 전술이었다.

영력 소모를 최소화하면서 속도 위주로 끊임없이 데미지를 쌓는 방법이었다.

물론 만상만투도 그냥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쉴 새 없이 권능을 퍼부었다.

칼날 같은 몸뚱이를 가진 뱀 떼를 만들어 옭아매고, 화염에 뇌전, 안개 등 모든 권능을 동원해 공격했다.

하지만 좀처럼 준혁을 직접 맞힐 수가 없었다.

만상만투가 권능을 펼칠 때마다 하늘과 바다가 쉴 새 없이 울부짖었다.

당연히 주변의 지형이 바뀔 정도로 지상은 만신창이였다.

그렇게 수십 번의 공방이 지날 때쯤, 만상만투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이상하다.

그런 감정이었다.

만상만투 역시 배면계에서 준혁의 이 전술을 겪어 보았었다.

하지만 그 위력은 배면계에서 겪은 것과 완전히 달랐다.

배면계에 있을 당시 준혁이 사용한 이 전술은 마치 가랑비 같았다.

한 방 한 방이 금세 증발해 버릴 것 같은 물방울 수준의 데미지였다.

이 전술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가랑비가 아닌 폭우 같았다.

한 방 한 방이 묵직한 데미지가 되어 쌓였다.

이유는 준혁의 손등에 이빨을 박고 있는 적사였다.

그리고 은은하게 퍼져 있는 녹색 기운.

준혁이 도핑이라 불렀던, 적사의 스킬인 ‘전이’였다.

자신의 영력을 전해 주어 대상의 영력을 보충하는 것이 아닌 영력의 위력을 높이는 기술이었다.

배면계에 있을 당시 준혁은 단 한 번도 이 기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전이’는 사용하는 동안에는 위력을 한껏 증폭시켜 주지만, 그 직후 기절 직전의 상태가 찾아오기 때문이었다.

언제 어디에서 신수라는 짐승을 맞닥뜨릴지 알 수 없는 배면계에서 그런 상태가 된다는 것은 자살하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달랐다.

보호해 줄 동료가 있고, 당장 달려들 신수도 없었다.

말 그대로 미쳐 날뛰는 것이 가능했다.

준혁이 또 한 번 백효의 등을 밟고 ‘천천’을 펼쳤다.

적당히 데미지가 쌓였으니 슬슬 전술을 바꿀 때가 된 듯했다.

하늘을 수평으로 가로지르며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려는 찰나였다.

‘음!’

준혁이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만상만투의 몸에서 갑자기 거대한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위험!’

반사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준혁이 황급히 묵린갑을 넓게 펼쳤다.

묵린갑이 물샐틈없이 준혁의 온몸을 감싼 그 순간, 폭발한 영력이 한 방향으로 뻗으며 준혁을 두드렸다.

꽈아앙!

강력한 충격이었다. 준혁의 몸뚱이가 날아가던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쏜살같이 튕겨 날아갔다.

하지만 이상했다.

‘뭐지?’

분명 강력한 충격이었다. 이 정도 충격이면 뼈마디가 뒤흔들릴 정도의 고통이 뒤따라왔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없었다.

그거 껍데기만 두드린 것 같은 느낌.

하지만 한 층 더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아래의 해수면이 불쑥 치솟았다.

솟구친 바닷물은 어느새 평평한 수막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수막을 기점으로 갑자기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수조에 물이 차오르는 것 같은 광경.

‘위험!’

직감적으로 위기를 느낀 준혁이 황급히 ‘무극’을 펼쳤다.

꽈앙!

“큭!”

처음으로 준혁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미친! 뭐냐?’

‘무극’은 대상과의 거리를 0으로 줄이는 스킬이었다.

그 중간에 어떤 장애물이 있다 해도 완전히 통과해 거리를 줄인다.

그런데 지금 준혁은 벽에 부딪친 듯 허공에서 충격을 받고 멈췄다.

말 그대로 진짜 보이지 않는 수조가 있기라도 한 듯, 물이 차오르는 경계선 위였다.

준혁은 영력을 풀어 몸을 띄운 채 방금 부딪친 그 위치를 손바닥으로 밀어 보았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저항감.

진짜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 같았다.

“후웁!”

깊게 숨을 고른 동시에 무상곤을 휘둘렀다.

[태산인]

무상곤의 무게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려 엄청난 질량으로 벽을 두드렸다.

꽝!

무시무시한 반발력에 준혁의 몸이 오히려 튕겨 나왔다.

[천단참]

하늘을 가를 듯 날카로운 검격에도 벽은 끄떡도 없었다.

[천천]

꽈앙!

하늘을 향해 솟구쳐 보지만 천장에 부딪쳐 떨어질 뿐이었다.

[천라시], [추종시]

시위를 떠난 영력의 화살은 공허하게 허공을 맴돌기만 할 뿐 제대로 만상만투를 향해 날아가지 못했다.

거대한 수조에 완전히 갇혀 버린 상태였다.

‘뭐지?’

그런 의문을 품고 있는 찰나 하늘을 갑자기 뒤덮은 것은 짙은 먹색의 안개였다.

그런데 그 안개조차 수조 속에서 퍼지는 듯, 육면체의 천장 형태를 만들며 퍼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수조 안에 갇힌 것 같은 상황.

-흑호, 이리 와!

-네, 주인님!

그아아앙!

흑호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조의 벽에서 징이 울리는 듯한 굉음이 퍼졌다.

-이럴 수가!

-뭐야?

-도약이 안 됩니다.

-뭐?

-주인님이 있는 공간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말이 안 된다.

흑호의 ‘도약’이 뛰어난 이유는 단순히 공간을 뛰어넘기 때문이 아니었다.

준혁이 그 어느 곳에 있든 바로 옆에서 튀어나올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그런데 그게 막혔다.

-후후! 봉인되어 있는 동안 나도 잠만 잔 것은 아니거든.

사두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무슨 개수작이냐!”

-우리는 신의 ‘격’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이다. 새로운 시공간을 ‘창조’하는 것 역시 가능하지.

새로운 시공간.

즉, 지금 준혁이 갇혀 있는 공간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별개의 차원이라는 뜻이다.

-야, 린디웨!

급히 ‘감응’을 사용했지만 준혁의 텔레파시는 린디웨에게 닿지 않았다.

환수들은 준혁과 영혼 자체가 이어져 있기에 어디서든 ‘감응’으로 연결이 가능했다.

하지만 다른 대상들에게 사용하는 ‘감응’은 거리의 제약이 존재했다.

린디웨에게 그것이 닿지 않는 이유는 그만큼 거리가 멀다는 뜻이었다.

이는 지금 준혁이 갇힌 공간이 완전히 다른 시공간 속에 존재한다는 방증이었다.

“후우, 후!”

거듭 호흡을 가다듬으며 빠져나갈 방법을 고민하는 준혁을 향해 만상만투가 비웃듯 말했다.

-네놈이 아무리 인간의 ‘격’을 뛰어넘었다 해도 그 육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은 아니지. 그리고 육신이 있는 인간은 숨을 쉬지 않으면 결국은 죽는다.

사실이었다.

준혁은 긴 시간 호흡 없이 버티는 것이 가능하기는 해도, 숨을 쉬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준혁 또한 필멸의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차오른 물이 준혁의 발끝을 적시기 시작했다.

준혁은 아예 물에 띄운 채 깊은 고민에 잠겼다.

그리고 떠오른 한 가지 방법.

‘가능할까?’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지금은 할 수 있는 걸 하는 수밖에 없었다.

생각을 굳힌 준혁이 인벤토리에 손을 집어넣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