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받고 각성 더!-148화 (148/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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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장. 격전#4-

진짜 말도 안 되는 가정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미친, 그게 말이 돼?’

자기가 해 놓고도 어처구니가 없다고 느낄 정도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머리에 떠오른 가정이 사실이라면 이상할 정도로 과격한 만상만투의 반응을 설명할 수 있었다.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를 대하는 듯한 저 반응.

이게 성립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원한’이다.

그런데 신수가 준혁에게 원한을 품을 일이 있는가?

없다.

제 놈을 봉인시켰다는 사실에 원한을 품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신수를 알지 못하는 이들의 일차원적 생각이다.

신수라는 놈들의 정신 상태나 사고방식은 인간과 다르다.

봉인당한 데 대해 놈들이 어떠한 감정을 품는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짜증스러움이다.

봉인이라고 말은 하지만 놈들에게는 그저 힘을 보충하기 위한 숙면에 가까운 일이었다.

당연히 ‘원한’이라고 부를 정도의 거창한 감정 따위는 있을 수 없다.

‘게다가 갑작스러웠지.’

결정적으로 만상만투의 저 감정은 갑자기 튀어나왔다. 처음부터 저랬던 게 아니다.

그 전과 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대가리 하나.’

‘폭류격’에 여섯 번째 머리가 터져 나갔다.

그리고 원한.

저 여덟 개의 머리는 공통의 자아를 품은 채로 각각의 자아를 유지하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즉, 한 몸을 공유한 여덟 개의 자아였다.

인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형제와 가장 유사한 관계였다.

그 여덟 형제 중 하나가 준혁에게 죽었다고 생각한다면 원한을 품는 게 당연했다.

여기서 준혁이 떠올린 가정의 핵심은 ‘죽음’이었다.

놈들은 죽지 않는다.

그러니 머리 하나가 터져 나가도, 아니 여기서 완전히 죽어도 결국 봉인이라는 개념이 되어 언젠가 살아난다.

그러니 죽음에 원한을 품을 일이 없는데, 원한을 품었다.

이 과정에서 준혁의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 가정.

‘저것들 설마 봉인이 아니고, 완전히 죽는 건가?’

원래 죽지 않는 것들이 진짜 죽음을 맞이한다?

어떤 이유가 필요했다.

가정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쪽 현실로 넘어오면 봉인이 아닌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는 건가?’

그렇다면 저 반응을 모두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사두가 일으킨 격랑은 한층 거세졌다.

쉴 새 없이 오간 파도의 높이가 어느새 10미터까지 올라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다른 머리들의 권능이 집요하게 준혁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주인님, 혼자서 모두 회피하는 것은 벅찹니다!

백효가 다급한 감정을 담아 외쳤다.

준혁이 생각에 잠긴 동안 쏟아지는 권능의 폭풍을 백효 혼자 피하고 막은 탓이었다.

-조금 더 버텨!

-넵!

까라면 깐다.

백효라는 환수를 가장 확실하게 표현하는 말이었다.

삐이이이익!

날카로운 울음을 한껏 퍼트린 백효의 온몸에서 영력이 퍼져 나왔다.

그사이 준혁은 사고 회로를 빠르게 돌렸다.

‘이걸 확인부터 해야 하는데.’

떠올렸던 가정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따라 준혁의 전술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전술만이 아니다.

로건 베런즈, 그리고 시스템 융합 현상을 상대하는 전략이 바뀔 일이었다.

‘물어볼까?’

갑자기 떠오른 실없는 생각에, 위급한 상황에도 저도 모르게 실소가 픽 튀어나왔다.

‘물어본다고 말해 줄 리는 없고…….’

그렇다면 지금 그걸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흑호!

-네, 주인님!

준혁이 ‘야옹이’가 아닌 ‘흑호’라 부른 후부터 흑호의 목소리에 의욕이 넘치고 있었다.

하지만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것이기에 준혁은 자신이 그렇게 불렀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서 린디웨 데려와라.

-넵!

-빨리 갔다 와서 감시 마저 해라.

-알겠습니다!

지금 준혁의 궁금증을 풀어 줄 수 있는 존재는 린디웨가 유일했다.

***

『현 시간부로 일본 전 지역에 각성자 긴급 동원령을 발령합니다.』

단 한 번도 발령된 적 없는 ‘각성자 긴급 동원령’이 일본 전역에 발효되었다.

『동원령을 접한 각성자들은 지금 즉시 가까운 관공서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급박한 뉴스도 전해졌다.

『도쿄만에 괴물이 출현했습니다! 전설에 등장하는 야마타노오로치와 닮은 이 괴물은 도쿄 국제공항을 바다로 만들어 버렸으며, 현재 바다에서 도쿄를 향해 접근 중…….』

단순히 방송만이 아니라, 관공서나 공무 차량의 확성기를 통해서도 일본 전역에 퍼져 나갔다.

『현재 신원미상의 헌터가 괴물과 싸우고 있습니다. 동원령을 접한 각성자들은 당장 관공서에 등록 후 지원을…….』

“야마타노오로치?”

정검회 회주 하시모토 타츠야는 뒤쪽에서 터져 나온 길드원의 외침에 저도 모르게 손을 멈췄다.

멍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는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하시모토 타츠야의 칼날 아래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시모토 타츠야가 이끄는 정검회는 직전까지, 아니 지금도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하시모토 타츠야가 유민섭에게 건네받은 것은 일본 전역에 퍼져 있는 헌터 길드 명단이었다.

해당 명단에 오른 길드들은 일반 길드로 활동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하나가 서천회의 말단 조직이었다.

지령이 떨어지면 일본 각지에서 테러를 일으키거나, 해당 지역을 점령하는 역할을 맡은 이들이었다.

정검회의 연수원에 모인 헌터들은, 그 서천회의 말단 조직을 각개격파하기 위해 모인 헌터들이었다.

버스를 타고 출발한 그들은 릴리안 우드에 의해 게이트를 타고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당연히 길드 간 전투가 벌어졌고, 조금 전까지도 그 전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서로 목숨을 걸고 하는, 피와 비명이 혼재하는 치열한 싸움이었다.

그런데 그 싸움이 마치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듯 단숨에 멈췄다.

“야마타노오로치?”

그것은 그만큼 충격이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너무 말이 안 되기에 그만큼 충격이었다.

야마타노오로치는 일본의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이었다.

스사노오라는 신이 야마타노오로치의 목을 베었고, 꼬리에서 얻은 것이 일본 신화의 삼종신기 중 하나인 ‘초치검’이라고 전해진다.

어쨌든 그런 전설상에서나 존재하는 괴물이 실제로 등장했고, 도쿄를 위협하고 있으며, 헌터 동원령까지 발효되었다.

당황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하시모토 타츠야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테러범들을 모두 제거하라!”

지금까지는 어디까지나 제압이 목적이었다.

명령도 가급적이면 생포하라고 내렸었다.

하지만 야마타노오로치의 등장이라는 게 사실일 가능성이 큰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누가 뭐래도 도쿄는 일본의 수도이며 심장이었다.

“싹 죽여!”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시모토 타츠야의 칼날 아래 있던 헌터의 목이 잘렸다.

***

“저, 저, 저, 저거!”

기겁하며 외친 사람은 린디웨였다. 그 옆에는 황급히 뛰어 들어와 TV를 켠 리쉬옌이 있었다.

그리고 TV 화면에 떠오른 것은 바다에 거대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8두, 아니 하나가 잘려 이제 7두가 된 뱀 괴물이었다.

“만상만투? 저, 저게 왜 지금 저기에 있어? 김준혁 저놈은 또 왜 저기서 저러고 있는 건데?”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린디웨를 향해 리쉬옌이 대답했다.

“그, 그야……. 김준혁 씨가 일본에 있었고, 만상만투가 등장했으면 싸우지 않을 수도 없는…….”

“그렇기는 하지. 그나저나 김준혁 혼자서 되는 거야, 안 되는 거야?”

준혁은 이미 배면계를 홀로 평정하고 귀환한 전적이 있었다.

그걸 알고 있는 린디웨였지만, 현세에서 배면계의 신수를 목격하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때였다.

“음?”

갑작스러운 감각에 황급히 고개를 돌린 린디웨 앞에 흑호가 불쑥 튀어나왔다.

“아, 놀래라! 갑자기 뭐야?”

-주인님이 부르신다.

린디웨는 배면계 시스템의 아바타였다. 환수의 말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뭐, 날?”

-맞다.

TV 화면 속 만상만투는 이미 머리 하나가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스스로 의구심을 품기는 했지만 준혁이라면 혼자서도 충분히 만상만투를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부르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터.

린디웨는 두말 않고 흑호의 등에 올라탔다.

“린디웨?”

“잠깐 갔다 올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흑호가 재빨리 ‘도약’을 펼쳤다.

순식간에 기착지인 환계를 지나 도쿄만에 도착한 순간, 흑호의 머릿속으로 준혁의 외침이 들렸다.

-은신 풀지 마.

-네, 주인님.

그사이 린디웨는 급히 전황을 살폈다.

‘하, 대단하긴 진짜 대단한 놈!’

절로 감탄이 나왔다.

TV에서 보여 준 장면이 시간차가 꽤 있었는지, 주변 지형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도쿄 국제공항과 인접해 있던 오타구(大田區)와 가와사키구(川崎區) 해안은 거대한 해일에 휩쓸려 초토화된 상태였다.

‘저놈 뭐 하는 거지?’

그런데 준혁은 만상만투와 제대로 싸우기보다는 적당히 시간만 끌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때 준혁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어이.

-너, 뭐 하냐?

-설명은 나중에. 일단 저 짐승 새끼 한번 살펴봐.

-뭐, 왜?

린디웨가 만상만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당장 이상한 점을 찾기가 힘들다.

그때 준혁으로부터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 날아들었다.

-저놈 죽을 것 같지 않냐?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아니, 좀 알아들을 수 있게…….

-저놈 저거, 봉인이 아니라 원래 의미 그대로 ‘죽음’을 맞이할 것 같지 않느냐고.

-뭐?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린디웨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하지만 린디웨는 준혁을 잘 알고 있었다.

시답잖은 농담을 하려고 이 상황에서 자신을 불러낸 것은 아닐 것이다.

황급히 고개를 털어 낸 린디웨가 만상만투를 살펴보았다.

정확하게는 시스템 아바타로서 시스템의 힘을 빌려 와 만상만투의 상태를 스캔했다.

잿빛의 영력 덩어리.

시스템의 관점에서 보면 신수라는 존재는 영력의 응집체였다.

신수들은, 그 격이 ‘신’의 격으로 높아지는 순간 기존에 갖고 있던 육체가 흩어지고 거대한 영력의 응집체로 변한다.

그리고 그렇게 응집된 영력이 반대로 새로운 육체를 구현하는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신수를 완전히 죽이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실체이기는 하나, 영력 혹은 신력으로 구현된 육체이기에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다.

육체가 사라지더라도, 영력의 응집 단계에서 긴 시간 영력을 모으면 다시 실체화할 수 있었다.

“어!”

린디웨의 입에서 묘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준혁이 급히 물었다.

-뭔데? 뭐가 보여?

-잠시만!

린디웨는 다시 한 번 만상만투의 상태를 살폈다.

‘이런 미친!’

분명 영력 덩어리로 보여야 할 만상만투가 실존하는 생명체로 보였다.

몸의 중심부에 거대하게 응집되어 있는 영력 덩어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영력 덩어리에서 기운을 뽑아 쓰고는 있지만, 사라진 머리로는 기운이 전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문제의 영력 덩어리가 자리 잡은 곳은 만상만투의 심장이었다.

본래라면 존재할 리가 없는 그것.

그 심장이 힘차게 맥동하고, 그 맥동을 따라 응집된 영력이 온몸으로 퍼지고 있었다.

심장의 존재.

이는 만상만투가 하나의 ‘생명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생명체는 필멸(必滅)의 존재였다.

필멸과 불사는 완전히 상반된 단어다.

-죽일 수 있다!

-진짜냐?

-어! 저거 심장이 뛰고 있어!

-죽일 수 있다는 거 확실하지?

-99퍼센트.

-알았다.

대답을 들은 준혁의 얼굴에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가 번졌다.

“하, 이 짐승 새끼! 나도 이제 묵은 원한 좀 풀자!”

지금껏 느껴 본 적 없는 희열이 준혁의 온몸을 타고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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