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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장. 격전#3-
-감히!
사두가 버럭 호통을 내지르는 순간, 만상만투의 여덟 개 꼬리가 허공을 훑었다.
마치 여덟 개의 채찍으로 허공을 마구 후려치는 것 같았다.
휘링, 휘리리리!
거대한 꼬리의 부피를 생각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날렵한 소리가 일대를 뒤덮었다.
그렇다고 준혁이 그걸 그대로 맞아 준다는 말은 아니다.
오른손의 무상곤과 비어 있는 왼손을 쉴 새 없이 휘저어 만상만투의 꼬리 채찍질을 막는다.
채찍은 유연한 무기다. 단순히 그 진로를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진로를 막으면 막힌 부분을 기점으로 꺾이기에 오히려 비틀린 궤적으로 공격이 들어오는 탓에 상대하기가 까다롭다.
하지만 준혁의 무기 다루는 수준은 말 그대로 극한이다.
준혁의 배면계 기술 중 ‘외(外)’의 영역에 있는 ‘천기술’은 모든 무기에 대한 일종의 마스터리였다.
그것을 최고 수준으로 올려 놓은 준혁은 1밀리미터의 변화도까지도 계산해서 무기를 다룰 수 있다.
터엉!
묵직한 꼬리가 언월도로 변한 준혁의 무상곤에 얹힌다.
꼬리 채찍이 무상곤을 휘감듯 꺾이며 파고드는 순간, 준혁의 손목이 교묘하게 비틀렸다.
촤아아아악-!
놈의 꼬리 하나가 매끈한 활주로의 아스팔트를 그대로 터트렸다.
한두 번이 아니다.
촥, 촤아악!
쉴 새 없이 떨어지는 꼬리 채찍에 애꿎은 활주로가 엉망으로 터져 나갔다.
애초에 만상만투가 등장한 이상 이미 활주로 본래의 기능은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의미는 없다.
공항 터미널에서는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와 격전지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준혁이 힐끔 그쪽을 살폈지만, 서천회의 병력들 중 누구 하나 민간인을 구하는 이는 없었다.
놈들은 이미 야마모토 테츠야의 게이트를 통해 몸을 숨긴 상태였다.
‘겨우 저딴 놈한테 그렇게 애를 먹다니.’
괜한 쪽팔림에 짜증이 와락 솟구쳤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만상만투의 꼬리 채찍질은 계속되었다.
술법도 권능도 없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육박전이었다.
신의 격에 올랐다는 신수와 인간을 한참 넘어선 초월자의 싸움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김빠지는 광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상만투처럼 거대한 놈들은 피지컬을 이용해 싸우는 쪽을 오히려 선호한다.
거대한 부피와 그로 인한 어마어마한 질량, 단단한 껍질은 그 무엇보다 좋은 무기다.
마르지 않고 샘솟는 피지컬은 권능에 영력을 소모하는 것보다 효율적이기까지 했다.
상대가 보통의 인간처럼 작은 크기라면 어쩔 수 없이 권능을 사용하지만, 이렇게 거대하게 변해 주면 감사할 일이다.
백호 길드의 의뢰로 들어간 던전에서 만났던 두 신수 충충교와 화과만 봐도 그렇다.
당시에 무수한 벌레의 군집이었던 충충교는 권능을 주로 사용했지만, 거대한 나무인 화과는 피지컬로 밀어붙이는 데 힘을 쏟았다.
준혁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굳이 ‘천신강림’을 사용한 이유도 싸움의 방향을 그쪽으로 유도한 것이었다.
쉴 새 없는 공방이 이어졌다.
꽈광, 촤아악!
준혁이 언월도 모양의 무상곤으로 만상만투의 온몸을 두드렸다. 언월도의 거대한 칼날이 만상만투의 몸뚱이를 쉴 새 없이 갉아 냈다.
하지만 준혁이라도 손해를 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만상만투의 꼬리 채찍질과 머리를 이용한 육탄 공격에 준혁의 몸에도 꾸준히 데미지가 박혔다.
만상만투는 거대한 몸뚱이가 가진 내구도를 깎아 가며, 준혁은 쉴 새 없이 빠져나가는 영력을 적사를 통해 보충해 가며 싸우는 소모전이었다.
거대한 8두의 뱀 괴물과 거인의 공방으로 활주로가 완전히 넝마로 변했을 때쯤이었다.
‘다 나갔군.’
준혁은 거센 공방 중에도 기감을 퍼트려 공항 전체를 살폈다.
공항 터미널을 비롯해 주변에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준혁의 ‘천신강림’은 두 가지 노림수가 있었다.
하나는 물리적인 공격으로 만상만투에게 데미지를 주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사람들이 대피할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신수들은 주변의 자연 환경을 자신에게 유리한 전장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신수들은 이를 ‘성역화(聖域化)’라고 부르는데, 주로 권능을 사용하기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된다.
충충교와 화과가 던전의 환경을 늪지와 꽃밭으로 바꾼 이유도, 그중 권능을 주로 사용했던 충충교의 늪지가 많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제는 만상만투의 가장 큰 권능은 네 번째 머리, 사두가 가진 것이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물’이었다.
그렇잖아도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섬과 같은 지형의 하네다 공항이 수원지로 변할 경우, 공항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수장되고 만다.
준혁이 육박전으로 싸움을 유도한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대단한 희생정신은 아니다.
약간의 손해를 감수한 정도였다.
그리고 준혁이 할 수 있는 것이 딱 그 정도였다. 만약 신수와 육박전이 크나큰 손해였다면, 준혁은 절대 그 방법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것.
그리고 이제는 일반인들의 피해를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휘리리릭!
때마침 기가 막힌 타이밍에 여덟 개의 꼬리가 거의 동시에 준혁에게 짓쳐 들었다.
여덟 방향에서 동시에 날아드는 여덟 개의 꼬리가 위협적으로 준혁의 전신을 노렸다.
하지만 어느새 장봉으로 변한 무상곤의 춤사위가 그보다 훨씬 빨랐다.
그리고 교묘했다.
촤라라라락!
팔방에서 시간차도 없이 날아든 여덟 개의 꼬리가 모두 준혁의 무상곤에 휘감겨 있었다.
[천천]
콰앙-!
지금 준혁은 ‘천신강림’으로 거인의 몸뚱이를 하고 있었다.
그 거대한 몸뚱이가 로켓처럼 수직으로 솟구치는 순간 지면이 받는 질량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지금 준혁의 지면은 만상만투의 몸뚱이였다.
게다가 여덟 개의 꼬리가 준혁의 무상곤에 감겨 있는 상태.
-끄아아아아!
절대 고통 따위는 느낄 것 같지 않은 거대한 괴물이었지만, 몸뚱이가 찢어질 것 같은 충격에 결국 비명을 내질렀다.
솟구치는 준혁에게 꼬리부터 딸려 올라간 만상만투는 여덟 개의 머리를 아래로 늘어트린 채 끊임없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이노오오옴!
대노한 만상만투의 여덟 머리가 동시에 준혁을 향해 주둥이를 벌렸다.
날카로운 송곳니 8쌍이 준혁을 찢어발길 듯 날아든다.
준혁은 그대로 무상곤을 휘둘렀다.
장봉이 된 무상곤에는 만상만투의 꼬리를 단단히 꿰어 놓은 상태.
부우우웅-!
반경 3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원이 하늘에 그려졌다.
만상만투로서는 꼬리를 붙잡힌 채 쉴 새 없이 휘둘러지는 모양새다.
그리고 그것의 끝은 거센 추락이었다.
그리고 준혁 또한 자유낙하를 시작했다.
마치 운석처럼 떨어지는 두 개의 낙하물.
콰아아앙!
먼저 떨어진 것은 당연히 만상만투였다.
공항 부지 전체가 강진을 만난 듯 상하로 뒤흔들린다.
하네다 공항의 부지는 매립으로 넓힌 땅이었다. 매립 당시 무르기 짝이 없는 연약 지반인 탓에 무려 20년 동안 공사를 했던 곳이다.
만상만투가 추락한 곳은 바로 그곳이었다.
거대한 크레이터가 파였다.
쏴아아아!
크레이터 안으로 바닷물이 거세게 밀려 들어가며 순식간에 거대한 호수로 변했다.
-도살자, 이놈!
수면을 뚫고 튀어나온 만상만투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하늘을 노려보았다.
8쌍의 눈이 쳐다본 하늘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떨어지고 있었다.
거대한 탄두였다.
켈가두스를 상대할 당시 사용했던 그 전술이었다.
무상곤을 빈 탄두의 형태로 만들어 낙하시키고, 거기에 ‘폭류격’으로 운동에너지를 대폭 증가시키는 전술이다.
게다가 준혁은 아직 ‘천신강림’을 풀지 않은 상태였다.
마침내 탄두가 아래로 내리꽂혔다.
탄두에 짓눌린 만상만투가 그대로 물속으로 잠긴다.
그 직후 또 한 번의 지진이 일어나고 호수에서는 거대한 물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공항 부지 전체가 진동을 이기지 못하고 무수히 많은 균열과 함께 무너지기 시작했다.
주변 일대의 바닷물이 과격한 파도를 만들며 사납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하더니, 하네다 공항의 지반이 무너지며 그 지역은 순식간에 바다로 변해 버렸다.
-크아아아아!
괴성과 함께 다시 솟아올라 수면 위 허공에 몸을 띄운 만상만투의 몰골은 꽤 낭패한 꼴이었다.
온몸 곳곳이 터져 나간 것은 적은 피해였다.
가장 큰 문제는 꼬리 두 개, 그리고 머리 하나가 사라져 버렸다는 점이었다.
“아깝네.”
준혁이 입맛을 다시며 만상만투를 향한 감상을 날렸다.
터져 날아간 것은 여섯 번째 머리인 육두였다.
육두의 권능은 일종의 환각.
준혁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 권능이었기에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용서하지 않겠다!
버럭 소리를 내지른 사두의 주위로 거대한 파도가 일어났다.
-백효, 흑호 교대!
준혁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환수가 자리를 바꿨다.
여전히 흐릿한 게이트 너머에 앉아 이쪽을 관람하고 있는 로건 베런즈 감시를 흑호가 맡고, 백효가 준혁에게 날아왔다.
수면을 차고 뛰어오른 준혁이 거대해진 백효의 등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가자.
-넵!
펑, 퍼펑!
수십 개의 물기둥이 솟구치며 준혁을 노렸다.
하지만 백효는 모든 물기둥을 피해 만상만투와의 거리를 좁혔다.
퉁, 투투투퉁!
활로 바꾼 무상곤의 시위에서 쉴 새 없이 영력의 화살이 쏘아져 나갔다.
50자루의 묵룡비도 합세했다.
새까맣게 허공을 수놓은 묵룡비와 영력 화살이 만상만투의 비어 버린 목을 집요하게 노렸다.
단단한 껍질의 보호를 받지 않는 저곳이 가장 큰 약점이었다.
수면으로 벼락이 떨어지고, 물기둥에서 갑자기 무수히 많은 뱀 떼가 튀어나왔다.
크게 벌어진 뱀들의 아가리에서 튀어나온 단검들이 소나기처럼 준혁에게 쏟아졌다.
삼두가 일으킨 짙은 안개가 바다 위를 완전히 뒤덮고, 그 속에서 발화한 일두의 화염이 아예 하늘을 태울 듯 퍼져 나갔다.
당하고만 있을 준혁이 아니었다.
“빙경낙월!”
물기둥과 해수면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추뢰망!”
일대를 뒤덮은 뇌전의 그물망이, 만상만투의 벼락을 끌어들여 달려드는 뱀과 칼날을 터트린다.
“화룡연무, 낙일홍!”
거대한 화룡의 춤사위가 안개를 태웠고, 준혁의 머리 위에 떠오른 붉은 광원이 거대한 불길로부터 준혁을 보호했다.
워낙 스케일이 큰 만상만투의 권능에 준혁이 밀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준혁은 조금의 데미지도 입지 않았다.
던전 시스템으로 각성하면서 얻은 추가 스탯과 마나, 그리고 만상만투를 한 번 봉인했던 경험, 그리고 관찰자 클래스를 얻은 후 생긴 묘한 예측 능력이 합쳐진 결과였다.
-더러운 인간 놈!
사두가 분노에 휩싸인 일갈을 내뱉으며 사방으로 영력을 투사했다.
그와 동시에 그렇잖아도 거칠게 요동치던 해수면이 한층 사납게 울어 대기 시작했다.
바람도 없는데 파도는 점점 거세지고, 물속에서는 과격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뭐지?’
그리고 준혁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저 새끼 왜 저렇게 흥분했어?’
신수는 인간을 벌레보다 하찮게 여기는 족속이었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당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분노를 폭발시킨다.
준혁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보이는 사두의 분노는 과거에 보았던 그것의 수준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분노가 준혁에게는 이상하게 ‘울분’, 혹은 ‘원한’으로 느껴졌다.
‘저 짐승이 울분? 원한?’
말도 안 된다.
신수들은 애초에 서로를 동족으로 생각지 않기에 원한을 품을 이유가 없다.
울분 또한 말이 안 된다.
놈들이 인간에게 당했을 때 화를 내는 이유는, 하찮은 벌레에게 당한 탓에 생기는 치욕스러운 감정이 원인이었다.
그런데 지금 만상만투는 상상 이상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마치 피붙이를 죽인 원수를 대하듯 준혁을 보고 있었다.
‘원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준혁의 머릿속에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 이거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