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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장. 격전#1-
구웅-!
공기가 격렬하게 떨리는 듯한 굉음이 퍼졌다.
맞부딪친 준혁과 로건 베런즈의 주먹 사이에서 깨어진 영력의 파편이 폭풍처럼 퍼져 나왔다.
지이이익!
힘을 이기지 못한 로건 베런즈가 바닥을 끌며 뒤로 주욱 밀려났다.
자신만만하던 로건 베런즈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어, 어떻게?”
잠실에서 맞붙었던 게 불과 두어 달 전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준혁과 자신의 스탯은 큰 차이가 없었다.
배면계 천강급의 힘에 던전 시스템 각성으로 키워 온 스탯이 합쳐져 스탯 자체는 비슷했다.
다만 준혁에게는 로건 베런즈가 얻지 못한 스킬이 있었고, 그로 인해 조금 밀렸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준혁의 힘이 갑자기 올라갔다.
더 이상 오를 등급도 없고, 배면계도 떠났다.
성장이 막혔다는 의미다.
그런데 강해졌다.
‘가능해?’
믿을 수 없었다.
평소 여유롭던 로건 베런즈가 감정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로건 베런즈의 생각을 눈치챈 준혁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신기하지?”
손목까지 가볍게 털어 내며 묻는 모습이 여유가 넘친다.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그러게? 어떻게 가능할까?”
로건 베런즈는 영력을 봉인당한 이후, 던전 관리자로 각성한 경우였다.
그런 후에 자신이 배면계 시스템을 건드려 영력의 봉인을 풀었다.
그러니 준혁의 던전 시스템 각성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혼원급에서 더 성장하다니.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럼 안 믿고 뒈지면 되겠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준혁이 앞으로 들이닥쳤다.
짓쳐 드는 준혁의 무상곤을 보며 로건 베런즈도 이를 악물었다.
빠르게 진행되는 공방.
콰르르르!
겨우 십수 합 만에 거대한 격납고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철골 구조물이 단번에 내려앉으며 뿌연 먼지가 풀썩 피어올랐다.
하지만 구름처럼 뭉쳐 있던 먼지는 순식간에 폭풍에 휩쓸리듯 사라졌다.
괴물에 가까운 두 초인의 싸움이 만들어 내는 압력에 오히려 주변 다른 격납고가 휘청인다.
콰, 콰콰콰쾅!
굉음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지고, 저 멀리에서는 급박한 사이렌 소리가 달려왔다.
‘이 괴물들은 뭐야?’
야마모토 테츠야는 핏기가 싹 가신 창백한 얼굴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백인 남자와 자신과 똑같은 얼굴로 나타난 두 놈은 진짜 괴물이었다.
자신은 어떻게 비벼 볼 엄두도 나지 않는 상상력 밖의 괴물.
‘이럴 때는 피하는 게 상책.’
야마모토 테츠야는 급히 게이트를 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몸이 어딘가로 밀려나는 느낌이 들었다.
‘어?’
이건 갑작스러운 공격을 피할 때, 게이트를 이용해 위치를 바꾸는 스킬을 사용할 때의 느낌이었다.
이 스킬은 일종의 패시브이기에, 당사자가 인식하지 못해도 자연스럽게 발동된다.
즉, 야마모토 테츠야가 인지하지 못한 공격이 날아왔었다는 뜻이다.
순식간에 눈앞의 시야가 바뀌려는 그 순간이었다.
빠아악!
단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격렬한 통증이 안면을 두드렸다.
“끄악!”
꼴사납게 텅텅거리며 바닥을 구른 야마모토 테츠야가 비명을 내질렀다.
“개새끼, 어딜 튀려고?”
열린 게이트 앞에는 준혁이 서 있었다.
야마모토 테츠야가 게이트를 통해 튀려는 것을 눈치채고 묵룡비를 날렸고, 그 공격으로 야마모토 테츠야가 회피술을 발휘하는 것을 캐치해 놈이 나올 자리로 미리 움직여 한 방 두드린 것이다.
“괴, 괴물…….”
야마모토 테츠야가 주저앉은 채 두 발로 바닥을 밀며 뒷걸음질 쳤다.
자신의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누군가를 보는 것이 이 정도로 강렬한 공포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때 준혁의 뒤에서 로건 베런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하고 놀다가 다른 사람한테 가 버리면 제가 좀 섭섭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여유로운 척하면 재밌냐?”
“아니, 섭섭하다고 말씀드린 걸로 기억합니다만?”
“갑자기 목표가 생겼다.”
“목표요?”
“네 입에서 꼭 반말이 나오게 만들어야겠다.”
“저는 워낙 예의가 발라서 그건 어려울 겁니다.”
로건 베런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렇게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그의 행색은 여유로움과는 꽤 거리가 있어 보였다.
새하얀 정장은 넝마로 변해, 옷 안에 받쳐 입은 묵린갑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네놈들 도대체 뭐냐!”
야마모토 테츠야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이 괴물들이 도대체 뭐 하자는 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에 대한 반응은 천천히 다가온 로건 베런즈가 했다.
“멍청한 건지, 자신에 대한 신뢰가 너무 강한 건지 도통 알 수가 없군요.”
“뭐라고?”
“제가 아까 김준혁이 살아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저, 저자가 김준혁이라고?”
야마모토 테츠야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준혁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쯧! 저 재수 없는 놈 말대로 멍청한 건지, 자신에 대한 믿음이 너무 강한 건지…….”
이런 놈한테 죽기 직전까지 당했다는 사실에 오히려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슬쩍 메구탈을 건드렸다.
“기, 김준혁!”
“그래, 이 새끼야. 나다.”
“그 핵폭발에서 살아남았다고?”
“어. 그러니까 각오해라. 내가 거기서 진짜 죽을 뻔했거든.”
“어떻게? 어떻게 거기서 살아 나올 수가…….”
“내가 그걸 너한테 설명해 줄 이유는 없는 것 같고……. 딱 하나만 알아라.”
“무얼?”
“여기서 튈 생각 하지 말고 딱 대기해라.”
야마모토 테츠야가 질린 표정으로 준혁을 보았다.
하지만 준혁은 야마모토 테츠야가 아닌 로건 베런즈를 보고 있었다.
“너도 동의하지?”
“물론이지요. 아군이 사라지면 저만 불리하지 않습니까?”
낯선 단어에 야마모토 테츠야가 로건 베런즈를 보았다.
“아군?”
“적의 적은 손잡을 가치가 있는 아군 아닌가요? 멍청한 은색 씨? 그러니 튈 생각 하지 말고 싸움이나 도와요. 당신이 살 방법은 그것뿐입니다.”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괴물 같은 김준혁과 그나마 상대가 되는 것은 이 백인 남자밖에 없었다.
이를 꾹 다문 야마모토 테츠야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해 줄 게 있습니다.”
“해 줄 것?”
“저것들 좀 어떻게 해 주시죠.”
그제야 고개를 돌린 야마모토 테츠야의 눈에 다른 광경이 들어왔다.
갑자기 무너진 격납고 때문에 공항에서 출동한 소방차와 경찰이 주변에 잔뜩 모여 있었다.
다들 멍한 표정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모습이었다.
“구경꾼은 질색이라서요.”
야마모토 테츠야의 시선이 곧장 자신의 병력에게로 향했다.
“밀어내!”
아까 격납고를 빠져나갔던 서천회 정예들이 그 말에 빠르게 움직였다.
헌터들이 사람들을 밀어내고, 전투복을 입은 군인들이 그 사이로 밀고 들어가 일일이 휴대폰 등을 빼앗고는 저 멀리 밀어내 버린다.
쾅, 콰콰쾅!
그사이 이미 무너진 격납고 위에서는 격전이 재개되었다.
“화룡연무!”
“금륜천전!”
육탄전으로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로건 베런즈가 술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술법이라는 건 사용자의 능력에 비례하는 법이었다.
퍼엉-!
준혁이 휘두르는 거대한 무상곤에 화염용의 불길이 사그라지고, 거대한 황금 바퀴가 산산이 조각났다.
하지만 그것은 로건 베런즈가 진짜 공격을 숨기기 위해 꺼내 놓은 것.
‘이거?’
‘금륜천전’의 수레바퀴를 깨트리는 순간 정수리 바로 위에서 섬뜩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무언가가 있었다.
꽈앙-!
수레바퀴를 깨트린 오른손을 그대로 더 휘둘렀다.
팔에 가해지는 원심력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허리를 뒤로 잔뜩 꺾었다.
위로 향한 시야에 잡힌 것은 섬뜩한 빛을 머금은 수십 개의 비침이었다.
훌쩍 몸을 뒤집는 동시에 쏟아지는 비침을 향해 무상곤을 휘둘렀다.
우우웅!
영력을 잔뜩 머금은 무상곤의 묵직한 압력으로 비침을 모조리 에워싸 그대로 짜부라트렸다.
비침들이 마치 허상이라도 된 듯 그대로 증발해 사라졌다.
“믿을 수가 없군요.”
로건 베런즈가 금방이라도 깨져 나갈 듯한 평정심을 애써 붙든 채 말했다.
회심의 일격이었다.
큰 술법을 사용해 준혁의 눈을 가리고, 은밀한 공격을 했다.
그런데 준혁은 그조차도 막아 낸 것이다.
“믿기 싫은 건 아니고?”
준혁이 여유롭게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준혁도 조금은 긴장할 수밖에 없는 공격이었다.
만약 마나를 감지하지 못했다면 눈치도 채지 못하고 공격에 당했을 것이다.
물론 얼굴에 쓰고 있는 메구탈이 투구의 역할을 하기에 결과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놈이 회심의 일격으로 준비한 것이라면 뭔가 있어도 분명 있었을 터.
안전을 위해 무상곤을 휘둘러 막아 낸 것이었다.
준혁이 또 한 번 각성했을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할 수 없는 로건 베런즈로서는 그저 놀랄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관리자 외에 각성한 클래스가 암살 계열인 모양이네.’
준혁이 본 던전 관리자들의 상태창은 클래스 항목에 두 개의 물음표가 있었다.
아마 하나는 각성자로서의 클래스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던전 관리자를 나타내는 것이리라.
“3라운드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준혁이 짓쳐 들었다.
이제는 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50자루의 묵룡비까지 전개했다.
로건 베런즈도 당연하다는 듯 무언가를 띄워 올렸다.
검붉은 색으로 물든 쇠구슬이었다. 그것이 갑자기 분열하더니 30여 개로 늘어났다.
따다다다당!
준혁의 묵룡비와 로건 베런즈의 쇠구슬이 허공에서 격전을 일으켰다.
하지만 위력은 차치하더라도 로건 베런즈의 쇠구슬이 묵룡비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다.
“뭐 하십니까!”
로건 베런즈가 이를 악물고 외쳤다. 돕겠다고 했던 야마모토 테츠야가 아직도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탓이었다.
화들짝 정신을 차린 야마모토 테츠야가 급히 손을 뻗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게이트.
로건 베런즈 주위에 수십 개의 게이트가 열리더니, 시커먼 매 대가리들이 튀어나왔다.
“크윽!”
야마모토 테츠야가 비틀거리며 두 손으로 제 무릎을 짚었다.
갑작스레 스킬을 잔뜩 사용한 탓에 힘이 빠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만족스럽다.
쩌저저저정!
매 대가리들이 준혁의 묵룡비를 하나씩 상대하고 있었다.
묵룡비는 그 하나하나로도 대단한 무기였다.
하지만 진짜 위력은 50자루가 군집으로 움직일 때 나타난다.
단 한 자루만 상대하는 정도의 일은 매 대가리들의 스탯이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좋습니다!”
로건 베런즈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준혁과 맞부딪쳤다.
하지만 로건 베런즈는 여전히 준혁에 비해 조금 모자랐다.
빠악!
간간이 터지는 타격음은 준혁의 무상곤이 로건 베런즈의 몸뚱이를 두드리는 소리였다.
그렇게 다시 수십 합이 흐른 시점이었다.
‘뭐지?’
괜히 준혁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 있었다.
상황은 분명 놈들의 열세였다.
야마모토 테츠야의 방해가 없었다면 로건 베런즈는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로건 베런즈에게는 아직 여유가 남아 있었다.
그 여유가 자꾸 준혁의 신경을 건드렸다.
-흑호!
-네, 주인님!
-혹시 모르니 철저히 경계해라! 무슨 일 생긴다 싶으면 도약으로 빠져나갈 준비해.
-네. 맡겨 주십시오!
빠아악!
교차한 두 자루의 무상곤 사이로 뻗어 나간 준혁의 주먹이 로건 베런즈의 안면을 두드렸다.
쩌저저적!
로건 베런즈가 얼굴에 쓰고 있던 메구탈에 균열이 퍼져 나갔다.
로건 베런즈가 황급히 재주를 돌며 준혁과 거리를 벌렸다.
곧장 뒤쫓으려던 준혁이 저도 모르게 두 발을 멈칫했다.
갑자기 척추를 스치고 지나가는 섬뜩한 감각 탓이었다.
‘뭐지?’
신경을 타고 올라오는 그 감각에 준혁은 반사적으로 땅을 박찼다.
[천천]
찰나의 틈도 없이 준혁의 몸이 수직으로 솟구쳤다.
동시에 발아래에서 고막을 두드리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고개를 떨궈 아래를 내려다본 준혁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하, 이 새끼가…….”
직전까지 준혁이 있던 그 자리에 거대한 존재감이 떠올라 있었다.
배면계의 신수(神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