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53장. 개전#1-
[‘관찰’의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에 준혁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좋은 일이라도 있나요?”
준혁 옆으로 다가와 묻는 이는 릴리안 우드였다.
준혁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받았다.
“아, 별거 아닙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밖으로 나와도 괜찮습니까?”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릴리안 우드가 항상 머물던 거대한 연구실 겸 작업실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지금 어느 건물 옥상에 서서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운동장에서는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입구 쪽에서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오고, 들어온 사람들은 운동장 정면에 놓인 테이블 쪽으로 간다.
그리고 뭔가를 확인하더니, 운동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버스 중 한 대로 찾아 들어갔다.
마치 단체로 여행을 가는 사람들의 풍경을 보는 듯하다.
집결 장소에 모여 도착 상황을 알리고, 배정받은 버스에 올라타는 것 같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아주 익숙하지만, 면면을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않았다.
일단 이곳은 일반적인 운동장이 아니었다.
하시모토 타츠야가 있는 정검회의 신입 헌터 연수원이었다.
들어온 이들도 여행객이 아니다. 하시모토 타츠야가 포섭한 길드의 헌터들이었다.
테이블 앞에 있는 안내 직원 역할을 하는 이는 유민섭과 하시모토 타츠야였다.
버스도 당연하지만 여행지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각각에 배정된 전장을 향해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버스에 타고 있는 이들은 모르지만, 각 버스에는 릴리안 우드가 설정해 놓은 게이트가 적용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버스 앞에 게이트가 생성되어, 버스가 목적지로 단숨에 이동하게 될 예정이었다.
이 게이트는 당연히 던전은 지나치지 않고, 지구상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바로 간다.
던전 안에서 버스가 사그라질 위험은 없었다.
릴리안 우드가 지금 준혁과 같이 서 있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버스에 탄 헌터들이 그 상황에 의문을 품겠지만, 유민섭은 그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담으로, 유민섭은 각 버스에 설정된 게이트가 린디웨가 준비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릴리안 우드의 존재를 밝히기에는 아직은 좀 이른 감이 있는 탓이다.
물끄러미 연수원 운동장 광경을 내려다보던 릴리안 우드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깐 나오는 정도는 괜찮아요. 옆에 든든한 보디가드도 있고.”
“하하! 여기서는 제가 지켜 드리죠.”
“그리고 이렇게 사람들을 보니 기분 전환도 되고 나쁘지 않네요. 지하실 공조기 공기만 접하다가 상쾌한 바깥 공기를 마시는 것도 아주 좋습니다.”
“뭐, 그렇군요.”
릴리안 우드는 던전 관리자로 각성한 후, 단 한 번도 지하 연구실에서 나온 적이 없었다.
다른 던전 관리자들의 탐색을 피하려는 조치였다.
그리고 연구실에서 연구에만 매진했다.
릴리안 우드는 은퇴하기는 했지만 뛰어난 응용물리학자였다.
그 기존의 지식에, 던전 관리자가 되면서 얻은 지식을 접목하며 만들어 낸 것들이 던전 에너지 계측기 같은 물건들이었다.
그 발명품들은 볼런트 라일의 성과가 되어 세상에 유통되었는데, 그것이 BR 코퍼레이션의 실체였다.
“10년 만의 외출인 셈이네요.”
툭 내뱉는 말에 준혁이 다시 릴리안 우드를 보았다.
그녀는 딱히 대화하기 위해 꺼낸 말은 아닌 모양인지 아득한 시선으로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저 혼자만의 감상을 중얼거린 모양이었다.
준혁도 다시 운동장의 상황에 집중했다.
그리고 새롭게 연수원으로 들어서는 헌터를 보며 ‘관찰’을 사용했다.
조금 전, ‘관찰’의 숙련도가 오른 이유가 이것이었다.
연수원으로 들어서는 모든 헌터를 향해 꼬박꼬박 ‘관찰’을 사용하다 보니 빠르게 숙련도가 올랐다.
‘확인 좀 해 볼까?’
상태창을 열어 스킬의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관찰]
대상에 대한 정보를 열람한다.
숙련도가 올라가면 열람할 수 있는 정보가 늘어난다.
숙련도:[50/100]
열람 가능 정보
[이름], [클래스], [세부 스탯], [스킬]
열람 가능한 정보에 ‘스킬’이 추가되어 있었다.
‘음? 그러고 보니?’
생각해 보니 스킬의 숙련도는 꾸준히 올랐다. 그런데 매번 숙련도가 올랐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뜨지는 않았다.
아마 숙련도 숫자의 상승이 아닌, 숙련도 상승으로 인한 스킬의 세부 사항에 변화가 생길 때만 메시지가 뜨는 모양이었다.
준혁은 ‘관찰’ 외에 ‘스틸’, ‘감응’, ‘예지’의 세부 내용도 살폈다.
‘왜 더 안 오르지?’
준혁이 신경 쓰이는 스킬은 ‘감응’이었다.
‘스틸’과 ‘예지’는 사용할 일이 없는 탓에 둘 다 숙련도 30에서 더 오르지 않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감응’은 일상적으로 꾸준히 사용하는데도 숙련도 50을 달성한 후로는 단 1도 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다시 눈에 들어온 ‘관찰’의 숙련도. ‘관찰’도 숙련도가 50이었다.
‘이거 혹시?’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다시 운동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새롭게 들어서는 헌터를 향해 꾸준히 ‘관찰’을 사용했다.
빠르게 사람들이 들고 나는 사이 50여 명을 향해 스킬을 사용했다. 하지만 ‘관찰’ 역시 50에서 더 이상 오르지 않았다.
‘숙련도 50 이상은 무슨 조건 같은 걸 달성해야 하나?’
하지만 별다른 설명이 없기에 현재로서는 짐작 가는 바가 없다.
‘관찰이랑 감응은 더 오르지 않으니 다른 거나 올려야겠네.’
그렇게 마음먹은 준혁은 ‘예지’부터 사용했다. 하루에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지만, 괜히 아껴 봐야 시간만 날릴 뿐이기에 고민하지 않고 사용했다.
마치 주마등처럼 순식간에 눈앞을 스치는 10분 동안 일어날 일들.
“어?”
준혁이 갑자기 멍한 표정으로 실성을 흘렸다.
“왜 그래요?”
릴리안 우드가 흠칫 놀라며 준혁을 보았다.
하지만 준혁은 릴리안 우드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했다.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네? 어딜?”
“일이 좀 생겼네요. 여기 일은 부탁드립니다.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돌아가십시오.”
말을 마친 준혁이 연수원 건물에서 훌쩍 뛰어내려 유민섭 옆으로 달려갔다.
“유 길드장님.”
“네?”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먼저?”
“어차피 여기 일하고는 상관없으니 그대로 진행하시면 됩니다.”
“아니, 그래도 갑자기 어딜 가 버리면 말이라도…….”
“자세한 건 나중에요.”
유민섭의 말을 자른 준혁은 곧장 연수원 옥상으로 뛰어오른 후, 흑호를 불러 어딘가를 향해 공간을 열었다.
***
“어, 어억!”
이시이 카게루가 비명을 지르며 벌렁 나자빠졌다. 갑자기 정면에서 튀어나온 흑호의 거대한 얼굴 탓이었다.
이시이 카게루는 흑호에 대한 일종의 트라우마가 있었다.
한국에 있을 당시 ‘도약’으로 공간을 열고 튀어나온 흑호의 무시무시한 얼굴이 너무 강렬하게 뇌리에 각인된 탓이었다.
“뭐 하냐?”
“아, 아니, 그게……. 그, 그……. 동향을 파악하라고…….”
이시이 카게루는 여러 개의 휴대폰과 무전기를 바닥에 죽 늘어놓은 채 방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그래, 미리 움직이자.”
“네?”
“아무튼 가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준혁이 이시이 카게루의 뒷덜미를 그러쥐었고, 준혁을 태운 흑호가 곧장 건물을 뛰쳐나와 벽을 타고 달려 올라갔다.
“끄아아아아!”
목덜미만 잡힌 채 나풀거리며 끌려 올라가는 이시이 카게루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갑작스러운 비명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머리 위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흑호가 ‘은신’을 펼친 채 달리기에 그 누구도 이시이 카게루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하루마가 누구냐?”
“네?”
“너 아는 놈 중에 하루마가 누구냐고? 서천회 소속.”
“아, 아아! 아오키 하루마(靑木 悠真) 말씀이십니까?”
“그것까지야 내가 모르지. 그냥 니가 아는 하루마.”
“네, 네네. 서천회에서 제가 아는 하루마는 아오키 하루마 한 명뿐입니다.”
황급히 대답한 이시이 카게루가 갑자기 멈칫하며 준혁을 보았다.
“그런데 준혁 님이 하루마를 어떻게 아십니까?”
당연히 ‘예지’를 통해 보았기 때문이다.
‘예지’에서는 이시이 카게루가 준혁을 찾아와 아오키 하루마를 통해 서천회 호출 명령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었다.
준혁은 그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온 것이다.
“가자.”
“네?”
“그 하루마라는 놈이 있는 곳으로.”
“하지만 저는 서천회에서 이미 제명되고, 척살령까지 내려와 있어서 연락을 할 수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 이시이 카게루의 얼굴로 준혁의 한심하다는 눈빛이 떨어졌다.
그 표정에 슬며시 말꼬리를 흐리던 이시이 카게루가 뒤늦게 뭔가를 떠올리고 외쳤다.
“아! 나카지마, 맞습니다. 예전에 하루마의 운전기사를 포섭해 놨었는데 갑자기 연락이…….”
“당장 연락해서 위치부터 파악해라!”
“알겠습니다!”
이시이 카게루가 황급히 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운전기사를 매수해 놓을 것을 보면, 아오키 하루마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준혁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이야기.
빠르게 통화를 마친 이시이 카게루가 급히 외쳤다.
“하네다! 하네다 공항입니다!”
하네다 공항, 즉 도쿄 국제공항은 흑호가 이미 한 번 가 본 적이 있는 장소였다.
-야옹아, 준비해라.
-네, 주인님.
흑호가 ‘도약’을 펼치려 준비하는 찰나 준혁이 급히 손을 뻗었다.
준혁의 손에 이시이 카게루의 뒷덜미가 잡히는 순간 흑호는 공간을 열고 뛰었다.
-멈춰!
흑호의 ‘도약’은 환계를 중계지로 두고 움직이는 스킬이었다.
현실의 A지점에서 환계에 들렀다가, 환계에서 현실의 B지점으로 이동하는 방식.
준혁의 명령은 다름 아닌 환계에 도착 후 다시 공간을 열려는 찰나에 나왔다.
흑호가 쭉 뻗으려는 뒷발을 엉거주춤 멈추는 사이, 준혁이 이시이 카게루의 손목에 걸린 구련환을 풀었다.
“어?”
이시이 카게루의 입에서 바보 같은 실성이 흘러나왔다.
손목에 채워져 있던 지긋지긋한 구련환의 속박에서 갑자기 벗어나 당황한 것이었다.
이시이 카게루가 멍청한 표정으로 준혁과 제 손목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부르르 온몸을 떨더니 후다닥 뒷걸음질 쳤다.
“이 개 같은 춍…….”
구련환의 속박이 풀린 덕분에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문제는 그 의식이 어떤 방향성을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하지만 준혁은 신경도 쓰지 않고 흑호의 옆구리를 두드렸다.
“가자!”
크허어어엉-!
포효와 함께 공간을 연 흑호가 곧장 ‘도약’을 펼쳤다.
이시이 카게루의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평범한 인간이 환계에서 살아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구련환도 빼 버렸다.
인간에게 구련환을 적용하면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의지와 행동의 괴리에서 오는 정신의 붕괴였다.
구련환을 끼고 있을 때는 그나마 괜찮지만, 구련환을 빼 버리면 그때부터 그 괴리감이 커진다.
구련환을 차고 있을 당시의 행동이 학습되면서 마치 자아가 분열되어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는 상황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 괴리감은 마치 산비탈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순식간에 몸집을 불린다.
그리고 종내에는 정신이 완전히 붕괴되며 자아를 잃고 미쳐 버리거나,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게 된다.
리쉬옌의 경우는 처음부터 준혁에게 적대감이 없었고,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문제 될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린디웨의 정체를 알게 된 후에는 채웠던 구련환도 풀었다.
린디웨는 애초에 시스템 아바타였기에 구련환의 강제가 작동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각성조차 하지 못한 이시이 카게루에게는 그것이 커다란 문제가 된다.
당연히 준혁은 일말의 동정심도 품지 않았다.
이시이 카게루는 형수와 조카를 납치하라는 명령을 내린 장본인이었다.
그런 놈을 준혁이 지켜 줄 이유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서천회를 잡아내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었다.
이시이 카게루는 저렇게 던져 놓으면 야수나 마찬가지인 환수들의 이빨에 찢어져 죽거나, 자살하거나, 그도 아니라면 죽을 때까지 환계를 떠돌 것이다.
하네다 공항의 구석진 곳에 도착한 준혁은 영력이 아닌 마나를 끌어 올려 넓게 기감을 펼쳤다.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준혁과 준혁을 통해 훈련받은 이들 외에는 없으니, 이렇게 마나를 퍼트려도 들킬 위험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준혁의 감각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야옹이, 대기.
-네, 주인님.
-적사, 너는 내가 말하면 영력 줄 준비해라.
-배고파아-!
이제는 충실해진 흑호와 언제나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적사의 대답을 확인한 후, 준혁은 급히 땅을 박찼다.
달리는 준혁의 몸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