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52장. 각개격파#5-
‘여기로 헤쳐 모여야 하는 거였나?’
코바야시 토루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도쿄 서쪽에 자리한 산속의 수련원 같은 곳이었다.
건물 안에는 복도를 따라 방들이 있었고, 넓은 운동장도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 코바야시 토루를 포함한 진토정교에서 교단을 빠져나온 교도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멀리서 수련원을 지켜보던 준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숫자가…….’
준혁이 본 인원의 두 배는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 지방 교단도 있겠네.’
생각해 보니 간단했다.
야마모토 테츠야는 24개 현에서 테러를 할 것이라 말했었다.
일본 각지에서 그런 일을 하려면 도쿄의 본단만이 아닌, 지방에도 교단이 세워져 있을 터.
이곳에는 도쿄와 가까운 곳에 있는 교단의 인원만 모인 듯했다.
오오타 료의 영상으로 일본 전역이 어수선한 지금은 일단 몸을 숨기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한 것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일시에 전국의 모든 교단을 비우면 의심받을 위험도 있었다.
하지만 오오타 료의 영상으로 인해 이미 발각될 위험이 있다고 본다면, 차라리 전력을 모아 놓는 것이 유리할 수도 있었다.
결국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선택은 준혁으로서는 조금도 나쁠 것이 없었다.
흩어져 있으면 잡기가 힘든데, 이렇게 한 군데 모여 주니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아직 모여드는 이들이 더 있었기에 준혁은 수련원 외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상황을 살폈다.
그렇게 한 시간쯤 흘렀을 때, 코바야시 토루가 운동장 정면의 단상에 올랐다.
운동장에는 진토정교에 속해 있던 헌터들이 열을 맞춰 도열해 있었다.
“다들 걱정이 많을 것으로 안다.”
단상의 코바야시 토루가 그렇게 운을 뗐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우리는 그저 잠시 소나기를 피하는 것뿐이다. 기회는 올 것이고, 그때가 되면 우리의 위대한 대업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니 참아라. 그대들의 숭고함은 대일본의 역사에 아로새길…….”
“지랄하고 자빠졌네.”
“흡!”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 코바야시 토루가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외쳤다.
“총장!”
코바야시 토루는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바로 뒤에 야마모토 테츠야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직접 온 것은 좋은 일이지만 방금 한 말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떠오른 기억 하나.
‘나로 변장한 놈을 조심해라.’
야마모토 테츠야의 당부가 뒤늦게 생각난 것이 실수였다.
아니, 바로 눈치를 챘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슈욱!
말아 쥔 주먹이 가볍게 코바야시 토루의 아랫배에 틀어박혔다.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주먹질이었지만 코바야시 토루는 제대로 반응도 하지 못했다.
“끄아아아악!”
주먹에 맞고 튕겨 날아가 운동장에 처박히는 코바야시 토루의 비명이 길게 늘어졌다.
쉬리리릿!
하늘 높이 새까만 비수 50자루가 운동장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푹, 푸푹!
준혁이 창고에 틀어박혀 새롭게 만들어 낸 무기.
금문묵룡비의 다음 버전인 묵룡비였다.
종로를 습격했던 각종 드래곤의 비늘과 배면계에서 구해 온 재료까지 사용했더니 오히려 색깔이 새까매져 이전의 이름인 묵룡비를 사용했다.
운동장에 모인 300여 명의 헌터가 양 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챙, 채챙!
퍼엉!
묵룡비를 막아 내며 싸우는 헌터도 있기는 했다.
A급의 각성자들.
그런 놈에게는 준혁이 친히 찾아가 주었다.
쉬이익!
갑작스러운 등장에 반사적으로 날아오는 날붙이.
하지만 준혁이 받쳐 입은 묵룡갑의 방어력을 뚫을 수 있는 헌터는 없었다.
째앵!
도리어 휘두른 날붙이가 그대로 두 동강이 나 버린다.
“사, 살려…….”
준혁에게 휘두른 카타나가 허무하게 부러지는 것을 목격한 헌터가 질린 표정으로 애원했다.
준혁은 아주 친절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안 죽여.”
빠아악!
그저 가볍게 한 번 주먹을 날릴 뿐이었다.
물론 준혁이 입으로 뱉은 말은 사실이었다.
준혁은 이들 중 단 한 명도 죽일 생각이 없었다.
준혁이 직접 주먹을 날린 코바야시 토루나 지금 얻어맞은 헌터조차도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바닥에 처박힌 채 사지를 끊임없이 부르르 떨고 있을 뿐이었다.
코바야시 토루만이 아니었다. 준혁이 날린 묵룡비에 당한 헌터들은 하나같이 코바야시 토루와 똑같은 자세로 널브러져 있었다.
따다닥 이를 맞부딪치며 헤어 나올 수 없는 충격에 동공이 풀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들.
그러고 보니 종횡무진 헌터들을 공격하는 50자루 묵룡비의 움직임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찌르는 곳이 똑같다.
아랫배와 명치 어림 딱 두 군데를 일관되게 공격한다.
관통도 아니다.
겨우 15센티미터가량의 깊이로 푹 찌르고 도로 빠져나온다.
그 후에 헌터들은 하나같이 예의 그 자세로 바닥에 널브러져 사지를 부르르 떨었다.
준혁에게 당한 헌터들은 모두 똑같은 상태에 빠져 있었다.
갑자기 온몸의 힘이 빠지고, 극심한 통증이 온몸의 신경을 타고 달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강렬하게 그들의 정신을 잠식해 가는 것은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탈력감이었다.
준혁이 묵룡비를 날려 찌른 곳은 정확히 하단전과 중단전이 자리한 곳이었다.
단전이 파괴되면 머물 곳을 잃은 마나가 몸속을 폭주해 돌아다니며 서서히 사그라진다.
그로 인한 통증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헌터들을 괴롭히는 것은 마나가 사라지며 밀려드는 강렬한 탈력감이었다.
각성자에게 각성으로 얻은 힘을 잃는다는 것은 육체적 고통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정신적인 고통이었다.
각성자가 되면서 얻은 모든 것을 도로 잃어야 한다는 의미이기에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고통이며,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었다.
그렇게 모든 헌터가 쓰러졌을 때, 산 아래에서 시작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서서히 수련원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준혁의 명령을 받은 이시이 카게루의 신고로 출동한 일본 경찰 SAT와 초인특무대였다.
SAT는 경찰의 대테러특수 팀이었고, 초인특무대는 고위 각성자로 구성된 소수 정예 특수 팀이었다.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자들이다. 일단 전부 체포해!”
명령을 내린 이는 SAT 지휘관이었다.
초인특무대는 10명 내외의 팀으로 움직이는 부대였기에, 이런 현장의 관리는 인원이 많은 SAT에 우선권이 있었다.
명령을 받은 SAT 대원들이 질서정연하게 앞으로 쏟아져 나갔다.
그런데 그때였다.
콰콰쾅!
SAT 뒤쪽에서 요란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SAT 대원들이 방향을 틀어 대열을 만들었다. 하지만 현장을 확인하는 즉시 황급히 뒤로 돌아 내달리기 시작했다.
폭음이 들린 곳은 그들이 타고 온 차량들이 서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초인특무대 2개 팀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한쪽은 서천회와 끈이 닿아 있는 라인의 팀이었고, 다른 한쪽은 야당과 끈이 닿아 있는 팀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서천회 쪽에서는 상황을 묻어 버리려 했고, 미리 대비하고 있던 다른 팀이 그것을 저지하면서 생긴 전투였다.
그리고 초인이라 불리는 각성자의 싸움에 일반인은 휘말려 봐야 운 좋으면 중상이었다.
이럴 때 일반인은 그냥 거리를 벌리고 물러나는 것이 최선.
SAT가 황급히 수련원 건물 방향으로 대피했다.
그런데 운동장 반대쪽 숲에 이 광경을 촬영하는 카메라가 바위틈에 숨겨져 있었다.
카메라의 주인은 일본에서 유명한 스트리머였는데, 이 역시 이시이 카게루의 이메일을 받고 움직인 사람이었다.
이시이 카게루가 보낸 이메일의 첨부 파일에는 진토정교의 비밀스러운 내부 자료가 잔뜩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스트리머 본인은 카메라만 설치해 놓고 멀리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메일 내용에 담겨 있던 주의 사항에 따른 행동이었다.
마지막으로 또 한 사람, 수련원 옥상에서 운동장의 난장판을 지켜보는 한 인물이 있었다.
까드드득!
부서져라 이를 갈아붙이는 그는 다름 아닌 서천회의 총장, 야마모토 테츠야였다.
‘도대체 어떤 놈이!’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경찰이 수련원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진토정교 소속 헌터들을 이렇게 만든 놈 머리카락도 보지 못했다.
‘이대로는…….’
단순히 급하게 수습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그랬다가는 얼굴도 보지 못한 놈에게 이대로 무너질 게 뻔했다.
조직 전체를 완전히 분해했다가 재구성할 정도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결심을 굳힌 야마모토 테츠야는 급히 게이트를 열고 어딘가로 이동했다.
***
“유 길드장님이 이렇게 방문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반가운 얼굴로 유민섭을 맞이한 이는, 일본의 랭킹 1위 길드인 정검회의 회장 하시모토 타츠야였다.
유민섭과는 꽤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한 사람으로, 일본에서의 영향력도 막강했다.
준혁의 조사에 따르면 그의 정검회는 서천회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길드였다.
“그런데 일본을 방문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만?”
“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몰래 왔습니다.”
“사정이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하시모토 타츠야를 향해 유민섭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일본 상황이 좋지 않죠?”
“난리가 났죠. 길드들도 지금 다들 몸을 사리고 있습니다. 총리대신의 영상에 나오는 테러 단체에 대한 의혹이 자꾸만 커지는 상황이라서요.”
“그것 때문에 왔습니다.”
“네?”
하시모토 타츠야가 의구심 가득한 얼굴로 유민섭을 보았다.
하지만 유민섭은 그에 대한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을 던졌다.
“하시모토 회장의 인맥으로 동원할 수 있는 길드의 수가 얼마나 됩니까?”
하시모토 타츠야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단은 대답부터 했다.
“으음, 랭킹 30위권 내에 있는 길드 중 20개 길드의 협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오오타 총리의 영상에서, 총리와 대화를 나누는 남자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모릅니다.”
“제가 그 남자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그 남자가 속해 있는 비밀결사에 대한 정보 또한 갖고 있지요.”
“그게 무슨? 유 길드장께서 어떻게 그걸?”
“일단 보시죠.”
유민섭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고, 그것을 받아 든 하시모토 타츠야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들은?”
“제가 말한 그 비밀결사와 손잡은 길드들입니다.”
“사사키, 후쿠다, 나카가와까지?”
하시모토 타츠야가 불신 가득한 눈으로 유민섭을 보며 물었다.
“이, 이게 사실입니까?”
“물론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걸 믿으라고 하는 것은 좀 곤란…….”
유민섭이 또다시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번에는 USB 메모리였다.
“내용 확인 후에 연락 주십시오. 아까 제가 걸었던 그 번호로 하시면 됩니다.”
말을 마친 유민섭이 조용히 몸을 일으켜 사무실을 나섰다.
서천회는 일본의 수많은 분야에 걸쳐 하부 조직을 만들어 놓았다.
그중 가장 위험한 조직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헌터 조직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일본에서 실제로 활동하는 길드들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준혁이 이들 모두를 치려고 마음먹는다면 못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작은 단위로 쪼개진 집단들을 하나하나 손보는 것은 너무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리고 야마모토 테츠야는 준혁이 직접 처리한다 치더라도, 실질적인 정리와 마무리는 일본이 직접 해야 할 일이었다.
준혁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야마모토 테츠야를 치는 것이지, 일본 사회의 정의를 세워 주는 게 아니었다.
유민섭은 밖으로 나와 인근 카페에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그리고 앉은 지 한 시간 정도 흘렀을 때 하시모토 타츠야에게서 전화가 왔다.
(유 길드장, 어딥니까? 지금 당장 만나시죠!)
예상했던 결과에 유민섭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올라가죠.”
(기다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유민섭이 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쪽은 잘 끝났습니다.”
(저도 마무리됐습니다.)
“얘기했던 거기로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