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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장. 각개격파#3-
준혁은 손에 든 휴대폰을 내려놓고 주변을 훑어보았다.
커다란 사무실이었다.
많은 책상과 컴퓨터, 수많은 자료, 수많은 사람.
하지만 마지막에 준혁의 시야에 담긴 것은 한 명의 여자였다.
여자는 조금 전 송신기를 들고 이렇게 말했다.
‘총장님, 큰일 났습니다.’
그리고 여자가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한 남자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흘렀다.
(무슨 일이야!)
야마모토 테츠야.
귓속 이어폰 소리라도 준혁의 귀에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저, 그, 그게…….”
여자가 다가오는 준혁을 보며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이 여자는 준혁이 일부러 가만히 놔둔 것이었다.
이렇게 보고를 하라고.
“있는 그대로 얘기해.”
준혁의 재촉에 여자가 송신기 옆의 버튼을 누르고 말을 이었다.
“사무실이 공격당했습니다.”
(사무실? 혹시 방금 전에 전화를 받은 자인가? 아니, 지금 놈이 옆에 있나?)
“네.”
조금 전 준혁이 내려놓았던 휴대폰, 야마모토 테츠야와 통화한 그 휴대폰은 이곳 소장의 소유였다.
이곳은 ‘와(わ, 和) 연구소’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정체불명의 장소였다.
(어떤 놈이!)
“그것이…….”
(어서 말해!)
“초, 총장님입니다!”
(무슨 소리야?)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야마모토 테츠야의 목소리가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여기 봐.”
준혁의 말에 여자가 준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확한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준혁이 한 것은 셀카.
찰칵!
준혁과 여자의 얼굴이 메인에 잡혔다. 배경은 쑥대밭이 된 연구소와 기절해 있는 직원들이었다.
“자, 이걸 총장님께 보내.”
사진에 있는 준혁의 얼굴은 다름 아닌 야마모토 테츠야의 얼굴이었다. 메구탈을 이용해 야마모토 테츠야로 변장한 것이었다.
여자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의 사진을 야마모토 테츠야에게 전송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처음 총장이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만 해도 이러지 않았다.
그런데 그 총장님이 갑자기 연구소 직원들을 때려 기절시키고, 내부를 발칵 뒤집었을 때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총장님이 자신에게 다가오더니, 총장에게 연락을 하라고 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너무 무서웠기에 일단은 시키는 대로 했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총장이, 통신기 너머에서 대답을 하는 모습에 진짜 기절할 뻔했다.
그리고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연구소를 습격한 총장은 그녀가 아는 총장과 체구가 달랐다.
다른 사람이 총장의 얼굴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 사진은 무슨!)
야마모토 테츠야의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들은 준혁이 송신기를 빼앗아 말했다.
“반가워.”
하는 김에 여자 귀의 이어폰도 빼 자신의 귀에 꽂았다.
(누구냐, 네놈!)
“회의에서도 묻더니 또 물어보네? 그런 건 좀 스스로 알아내면 안 될까? 아, 혼자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그런가?”
(회의?)
회의라는 말에 야마모토 테츠야가 멈칫했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그 의미를 깨닫고 버럭 소리 질렀다.
(청색? 아니면 적색이냐?)
당연히 준혁은 그 어떤 색도 아니다. 다만 릴리안 우드로부터 야마모토 테츠야가 5인 위원회에서 흥분해 난리 쳤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뿐이다.
그 사실을 이용해 놈이 착각하도록 철저하게 방향성을 유도할 뿐이었다.
“그런데 내 색깔이 중요한 게 아니지 않을까?”
(그건 또 무슨?)
“여기 연구소에 재미있는 게 많더라고?”
(안…….)
놈이 절규를 터트렸지만, 준혁은 이미 이어폰을 뽑은 후였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 생성되는 것은 다름 아닌 게이트.
야마모토 테츠야가 게이트를 열어 이곳으로 넘어오는 광경이었다.
게이트를 통과하는 발끝이 준혁의 시야에 들어왔다.
일반인의 감각으로 본다면 게이트를 넘어오는 것은 순식간이다. 말 그대로 눈 깜빡할 새에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준혁의 감각은 어지간한 S급 각성자도 명함을 내밀 수 없는 수준이었다.
거의 0.01초 단위로 인식이 가능했다.
발을 지나 무릎이 드러나는 순간 준혁은 이미 바닥을 박차고 있었다.
쑤아앙!
준혁이 만들어 낸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사무실 안에 잘게 메아리칠 때 야마모토 테츠야가 완전히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당연히 준혁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
슥, 스슥.
종이 위를 달리는 펜촉이 사시나무처럼 떨린다.
“다시.”
무감정하게 떨어지는 목소리에 박상천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종이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새로운 종이가 책상 위에 놓였다.
박상천은 절망감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그가 강요받고 있는 글쓰기는 다름 아닌 본인의 유서였다.
그리고 뒤에 서 있는 놈은 ‘빌런’이었다.
A급 이상의 각성자 중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놈들을 통칭하는 말이 ‘빌런’이었다.
그놈이 갑자기 찾아와 유서를 쓸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놈은 유서의 핵심 내용까지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사람들의 비난으로 괴로워 더는 웃으며 살아갈 자신이 없다.’
박상천의 직업은 ‘기자’였다.
정확하게 강이찬이 공개한 동영상에 나온, 요즘 인터넷상에서 ‘大기레기’라고 불리는 다섯 명의 기자 중 하나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이용하고 죽이다니!’
기자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 빌런이 이곳에 온 이유는 자신에게 문제의 기사를 쓰게 했던 놈의 의뢰가 분명했다.
이 유서를 이용해 유민섭과 강이찬을 공격할 재료로 삼으려는 것이다.
“안 쓰냐?”
또다시 종용하는 빌런의 목소리.
모든 감정이 배제된 그 목소리가 갑자기 박상천의 감정 깊숙한 곳에 있는 무언가를 건드렸다.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사람의 목숨을 마치 길에 떨어진 낙엽처럼 취급하는 그 목소리에 울컥했다.
“씨발!”
“뭐?”
박상천이 손에 쥔 펜을 집어 던지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이런 유서를 순순히 써 줄 것 같냐? 어차피 죽일 거잖아!”
그 외침에, 복면에서 유일하게 드러나 있는 빌런의 두 눈에 비웃음이 걸렸다.
“어차피 죽일 거지. 그런데 옵션이 있잖아. 편하게 죽을지, 고통스럽게 죽을지.”
“흥! 그래 봐야 자살로 위장해야 할 텐데?”
“자살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는 걸 모르는구나?”
한심하다는 말투로 던지는 말에 박상천은 더욱 눈이 돌아갔다.
“씨발! 한 번 죽지 두 번… 커억!”
갑자기 박상천의 몸뚱이가 허공에 떠올랐다.
빌런이 그의 목을 틀어쥐고 들어 올린 것이었다.
쿠웅!
박상천을 바닥에 내던진 빌런이 여전히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되겠다. 너는 분신자살을 하는 걸로 하자.”
“무, 무슨!”
“모르냐? 분신자살? 몸에 불붙이는 거.”
산 채로 몸에 불을 붙이겠다는 말이었다.
작열통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고통 중 하나다.
“자, 잠깐! 그런 짓을 하면 타살로 의심받을 수도…….”
“내가 알 게 뭐야?”
박상천이 황급히 두 발로 바닥을 밀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도망칠 곳은 없었다.
빌런의 발이 박상천을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박상천의 얼굴에는 조금 전까지 가득했던 용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쓸게! 유서! 쓴다고!”
“필요 없어. 귀찮아.”
또 한 걸음.
퉁!
물러나던 박상천의 등이 벽을 두드렸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빌런과 박상천의 사이는 이제 고작 한 걸음.
그때였다.
“그거 당신이 해 볼래요?”
빌런의 두 눈이 찢어질 정도로 커졌다.
황급히 바닥을 박차며 벽을 등지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요, 여기.”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짙은 그늘이 진 구석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복면을 쓴 작은 체구의 여자였다.
“누구냐?”
“그건 몰라도 돼요. 아무튼 나는 당신을 좀 방해해야겠어요.”
그런데 빌런의 반응이 이상했다.
“흥! 멍청한 년.”
“네?”
“암살 계열인가 본데, 숨은 채 공격을 했어야지. 모습을 드러낸 이상 내가 절대적으로 유리…….”
꽝!
“꺼어억!”
빌런이 제 가슴팍을 부여잡고 막혀 버린 숨통에 억지로 숨을 밀어 넣었다.
“암살 계열? 그럴 리가 없는데요?”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뻗어 나오는 여자의 손.
빌런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꽝! 우드득!
“끄악!”
하지만 그의 몸뚱이는 그 자리를 뜨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그런 빌런은 어느새 무릎이 앞쪽을 향해 꺾여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양팔과 어깨마저 기이한 방향으로 뒤틀렸다.
빌런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지만, 복면의 여자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박상천에게 다가갔다.
“가, 감사합니다!”
누군지는 모른다. 복면을 쓰고 있는 모습도 의심스럽다.
하지만 어쨌든 생명의 은인이니 일단 감사를 전한다.
그런 박상천을 보며 여자가 복면을 벗었다.
“다, 당신은!”
박상천이 기겁한 눈으로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그도 잘 알고 있는 혼원 길드 소속의 헌터, 리쉬옌이었다.
***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거, 성격도 급하시네.)
“타이밍도 모릅니까? 더 늦으면 말짱 도루묵이라고요.”
(조금만 있으면 반응 옵니다.)
휴대폰을 든 사람은 준혁이었고, 통화 상대는 유민섭이었다.
그리고 지금 준혁은 한국에 뜬 한 기사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기사라기보다는 일종의 자백문이었다.
제목은 ‘나는 기레기입니다.’였다.
리쉬옌이 구해 준 박상천이, 자신의 ‘김준혁 사망설’과 ‘유민섭 음모설’ 기사를 어떤 경위로 쓰게 되었는지 고백하는 내용이었다.
기사가 올라온 지 이제 30분.
(됐습니다!)
“반응이 옵니까?”
(어마어마하네요.)
지금까지 한국의 여론을 뒤흔들고 불안감을 증폭시켰던 기사가 알고 보니 날조였다는 사실이 알려진 상황이었다.
반응이 없으면 이상하다.
(하아! 이제야 속이 후련합니다. 지금 한국은 난리 났어요.)
기나긴 싸움에서 마침내 쟁취한 승리의 기쁨이 유민섭의 목소리에 잔뜩 묻어 있었다.
준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는 이제 일본에 난리 나게 만들어야겠네요.”
(이미 해상 자위대 군함들 수장시킨 것 때문에 난리 났는데, 그보다 반응이 더 클까요?)
유민섭이 조금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더 충격일걸요?”
(그런가요? 뭐, 일단 그 소식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통화를 마친 준혁이 메모리를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겁니다. 시작하시죠.”
“알겠습니다!”
남자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메모리를 받았다.
지금 이곳은 일본 공중파 방송국의 송출실이었다.
이제 곧 저 메모리의 영상들이 일본 전역으로 방송될 터였다.
메모리는 준혁이 ‘와 연구소’에서 가져온 물건이었다.
‘와 연구소’는 서천회의 컨트롤 타워 같은 곳이었다.
주로 진행하는 임무는 필요한 인재의 포섭이나 제거 대상의 암살, 서천회 하위 조직 사이의 업무 연계, 자금의 관리 등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부서는 필연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준혁의 손에 들린 것은 바로 그 자료 중 하나였다.
“시, 시작하겠습니다.”
방송국 직원이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 그런데……. 이것만 잘하면 살려 주시는 겁니까?”
어이없는 질문에 준혁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보셨네? 일만 제대로 해 주면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네, 네!”
남자가 황급히 송출 시스템을 조작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충격이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