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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받고 각성 더!-139화 (139/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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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장. 각개격파#2-

“신뢰라…….”

준혁은 릴리안 우드의 말을 살며시 곱씹었다.

“신뢰…….”

홀로 한참 그 말을 곱씹은 준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참 아름다운 말이군요.”

한쪽 입꼬리가 한껏 말려 올라간 비틀린 미소였다.

비웃는 게 명백한 그 모습에도 릴리안 우드는 조금의 동요도 없는 눈으로 준혁을 보았다.

“안 믿네요.”

“세상이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으니까요.”

“질문을 바꿔 보죠. 제가 음모를 꾸미는 중이고, 그것을 위해 당신을 포섭하려 하는 거라면?”

“솔직하게 그쪽이 좀 더 그럴싸하지 않습니까?”

“그럴싸한데……. 그러면 저를 신뢰할 수 있나요?”

그 말에 준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건!”

갑자기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파 놓은 함정.

일종의 자가당착이다.

신뢰를 쌓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말은 믿을 수가 없다.

뭔가 노리는 게 있기 때문에 손해를 감수한다는 말은 믿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상황은 믿지만, 그로 인해 상대를 신뢰할 수는 없다.

답을 낼 수 없는 문제다.

릴리안 우드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신뢰, 어려운 문제죠. 긴 시간과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되는……. 참 지난한 과정을 겪어야 하죠.”

사실이다.

단적으로 준혁과 유민섭의 관계만 봐도 그렇다.

처음부터 관계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처음부터 상대를 신뢰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준혁이 유민섭을 완전히 자신의 바운더리 안의 사람으로 인정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준혁의 삶을 생각하면 누군가에게 빠르게 마음을 연다는 건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형과 둘이 친척 집을 전전하며 받았던 냉대와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어린 시절.

배면계에서 목격한 살벌한 인간 군상들.

프로야구 선수가 되어 보아 왔던 수많은 인간관계의 문제들.

사람마다 인간관계를 보는 관점은 다르지만, 적어도 준혁에게 그것은 매우 살벌한 일들이었다.

릴리안 우드가 편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 지난한 과정을 단축시키는 방법은 단 하나죠.”

“하나요?”

“어느 한쪽이 완전한 신뢰를 보여 주는 것.”

“아…….”

준혁은 저도 모르게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상이 마냥 아름다운 건 아니죠. 이미 80년 이상을 살았는데 세상이 아름답다고 여긴다면, 그 80년의 세월을 헛산 거죠.”

“네.”

“하지만…….”

릴리안 우드가 말끝을 살짝 흐리며 준혁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살짝 휘는 듯 웃는 눈으로 말을 이었다.

“80년을 살았기 때문에, 세상을 좀 더 정의롭게 만들겠다는 욕심을 부릴 수는 있다고 생각지 않나요?”

“음…….”

준혁은 홀로 고민에 잠겼다.

‘틀린 말은 아닌데…….’

사실 조금은 충격이었다.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겠다는 욕심을 부릴 수도 있지 않느냐라는 말.

80년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특별히 중요하지 않은 디테일이지만,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실천하기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았다.

그런 준혁을 향해 릴리안 우드가 결정타를 날렸다.

“제가 먼저 알려 주고, 그 말이 사실이면 그때 나에게 정보를 준다는 조건이면……. 그리 손해는 아니지 않나요?”

맞다.

준혁에게는 손해가 없다.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고민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고민은 오직 스스로에 대한 부분이었다.

지금 닥친 일들을 처리하는 데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좋습니다. 먼저 보여 주십시오. 그 신뢰라는 거.”

“좋아요.”

***

“그 정도 일도 처리하지 못하는 게 말이 되나?”

추궁하는 야마모토 테츠야의 목소리에 예리하게 날이 서려 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50대 후반의 남자가 벗어진 머리로 흐르는 땀을 연신 훔쳐 냈다.

“그것이 예산 부분에서 평천당을 설득하는 과정이…….”

“애초에!”

야마모토 테츠야의 목소리가 한층 높게 올라갔다.

남자가 황급히 말을 삼키며 두 눈을 크게 떴다.

“당신네가 연립내각을 구성하게 된 이유가 뭐지?”

“그, 그것이…….”

“당신의 무능이지 않은가! 주권? 인권? 평등과 호혜? 그따위 나약한 사상을 걷어 내지 못한 당신의 무능에서 비롯된 일이잖아!”

“죄송합니다!”

쿠웅!

남자가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황급히 허리를 숙여 바닥에 머리를 찧는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지. 그 기회마저 못 잡는다면, 당신은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신념이 부족한 거라고 간주하겠어.”

“하, 하이!”

벗어진 머리의 남자가 다시 한 번 머리를 바닥에 쾅 찧는다.

‘지랄 염병…….’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준혁은 깔끔하게 감상을 마쳤다.

‘그나저나 저 텐구 새끼 보통이 아니네?’

서천회라는 비밀 조직의 규모가 생각보다 어마어마했다.

지금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남자.

그의 이름은 오오타 료(太田 亮),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 성향의 정치집단인 ‘애국회’의 상임 고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잘 알려진 오오타 료의 대외적인 지위는 일본의 내각 총리대신, 즉 현 일본의 총리였다.

지금 일본의 총리가 겨우 30대 초반인 야마모토 테츠야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일본 최대의 정치 모임인 애국회조차 서천회의 하부 조직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재계는 물론이고, 학생 단체, 종교 단체, 시민 단체 등등 서천회에서 관리하는 하부 조직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을 장악하고 있었다.

준혁이 며칠 동안 야마모토 테츠야를 미행하며 알아낸 것들이었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준혁이 알아낸 바에 의하면, 야마모토 테츠야의 1차 목표는 다름 아닌 ‘정한론’이었다.

정한론, 즉 한반도 정벌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 새끼들은 왜 툭하면 그 지랄인지, 원…….’

그것을 위해 일본 사회 전반의 분위기를 조성해 가고 있었다.

아직 그 정한론의 방법이나 시기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요 며칠 쫓아다니며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일이 벌어졌다면, 준혁이 막았다 해도 한국에 크나큰 피해가 있었을 일이었다.

그렇기에 놈이 준혁을 공격한 일은 어쩌면 다행이었다. 그 덕분에 준혁이 놈의 계획을 사전에 알 수 있었으니까.

물론 아무리 그래도 놈이 정한론을 펴는 것에는 아주 커다란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5인 위원회였다.

그곳의 다른 위원을 잡아먹고, 던전 관리의 권한을 완전히 독점해야만 놈은 목표를 실행할 수 있었다.

최근, 놈이 가장 신경 쓰는 일이 다른 위원들을 찾아내는 일이라는 게 증거였다.

그리고 준혁은 그런 야마모토 테츠야를 신나게 비웃고 있었다.

‘등신 새끼!’

준혁은 릴리안 우드에게 받은 정보를 토대로 야마모토 테츠야를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관찰했다.

그 며칠간 얻은 사실에 따르면, 야마모토 테츠야가 갖고 있는 5인 위원회에 대한 정보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준혁은 릴리안 우드에게 받은 메모리를 통해 일본에 있는 던전 관리자에 관한 정보들을 추려 낼 수 있었다.

유민섭이 13개의 잡지사를 추려 내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이 릴리안 우드의 자료였다.

그런 정보와 비교하면, 야마모토 테츠야가 갖고 있는 정보는 이제 겨우 10개 국가를 추려 낸 수준이었다.

‘일본 국내를 장악하는 건 쉬웠는데 바깥쪽에 대해서는 제대로 맹탕이네.’

한숨과 함께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준혁이 숨어 있던 장소에서 빠르게 몸을 뺐다.

애국회까지 나왔다면 더 나올 것도 없었다.

이제부터는 놈의 눈에서 피눈물을 뽑아내는 일만 남았다.

***

-어떤 놈이냐!

야마모토 테츠야, 은색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릴리안 우드, 금색이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무슨 말이냐?

-위원회 철칙을 어기고 특정 국가에 공격을 가한 놈이 누구냔 말이다!

평소 5인 위원회의 모임에서는 극존칭의 말투를 쓰는 은색이었지만, 지난번에도 그랬듯 흥분하니 그런 예의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특정 국가?

-일본 해군 함정들이 모조리 쪼개져 물에 가라앉았다는 뉴스를 못 봤다고 말하려는 거냐?

-그러니까 지금 그 일을 한 사람이 여기에 있다는 말이냐?

-아니라는 게 말도 안 되지. A급 이상의 각성자들이 지키고 있는 항구였다. 그 각성자들이 눈치도 채지 못한 사이 전투함들을 반으로 가르는 일이 가능한 게 누가 있단 말이냐!

그때 녹색이 나서서 비웃듯 말했다.

-지금 자신이 일본인이라고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겁니까?

-무슨 헛소리냐! 나는 우리 위원회 내부의 규칙을 어긴 놈을 찾자는 것뿐이다.

-그게 그 정도로 흥분할 일은 아니지 않을까요? 그리고 일본 자위대를 ‘일본군’이라고 부를 사람이 일본인 외에 또 있을까요?

-그!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측이냐?

황급히 변명을 해 보지만 이미 늦었다.

-하! 일본, 일본인이었군!

-오늘의 가장 큰 수확이오!

-그러게? 멍청해도 정도껏 멍청해야 말이지.

다들 한마디씩 던진다. 일렁거리는 각 게이트의 빛이, 마치 뱀이 요사스레 혀를 날름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은색 게이트의 빛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청색이 경멸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적색이 흐뭇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 멍청하기는…….

-흐흐! 오늘 참 좋은 사실을 알게 되었소.

그리고 녹색이 음험한 목소리로 방점을 찍었다.

-이렇게 되면……. 이제 우리 위원회의 균형이 곧 무너질 거라는 말이군요?

마지막으로 금색이 평소의 공격적인 말투가 아닌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이야기하기가 힘든 것 같으니, 일단은 생각을 좀 하지.

그렇게 모든 게이트의 빛이 사라졌다.

“젠장!”

콰앙!

야마모토 테츠야의 거친 손길에 책상이 그대로 쪼개졌다.

“이 멍청한 놈!”

자책의 외침이 방 안에 메아리쳤다.

실수였다.

해상 자위대는 긴 시간 그가 노력해 쌓아 온 결과 중 하나였다.

힘들게 군비를 증강했고, 세상의 눈을 피해 많은 것을 몰래 가져다 쌓아 놓았던 곳.

그런데 그것들이 하루아침에 고철 덩어리로 변해 버린 탓에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이미 놈들에게 자신에 대해 큰 정보 하나를 던져 준 셈이었다.

언제 어떤 식으로 놈들의 공격이 덮쳐 올지 알 수 없었다.

‘그놈이 나타났을 때 조심했어야 하는 것을!’

이시이 카게루와 마츠다 오가를 게이트로 납치했을 때,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텔레파시 같은 능력으로 말을 걸어왔을 때.

그때 5인 위원회 중 최소 한 명에게는 정체가 발각됐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 조심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야마모토 테츠야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벌떡 일어섰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야마모토 테츠야는 재빨리 전화를 걸었다.

“지금 당장 자리를 만들어!”

그런데 이상했다.

휴대폰 너머에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지금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그제야 상대에게서 대답이 되돌아왔다.

(싫은데?)

“뭐? 아, 아니! 네놈 누구냐!”

(글쎄? 누굴까?)

놀리듯 되돌아오는 말에 야마모토 테츠야가 버럭 소리를 지르려 했다. 하지만 통화는 이미 끊어진 후였다.

그때였다.

방 안에 구성해 놓은 시스템의 스피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총장님, 큰일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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