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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장. 각개격파#1-
“야마모토 테츠야(山本 哲也)라고 합니다. 모리 선배와는 5년째 되어 갑니다. 이렇게 많은 선배들에게 인사드리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텐구 놈이 첫 만남인 듯 자기를 소개하고 인사하고 있었다.
‘야마모토 테츠야라……. 그런데 원래 여기 멤버가 아니었나?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준혁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모리 카이토라는 놈을 바지사장으로 써먹은 거겠지.’
대충 짐작이 갔다.
일종의 모듈화였다.
조직 전체를 여러 개의 독립된 하위 조직으로 나눠 관리하고, 각각의 하위 조직은 다른 하위 조직과 무관하게 활동하는 방식일 것이다.
나름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하위 조직 하나가 망가져도 다른 하위 조직의 기능은 그대로 작동한다. 망가진 하위 조직만 새롭게 구성하면 수습도 빠르다.
다만, 하위 조직 사이의 유기적인 연계가 부족해 조직 전체가 민첩한 반응이 어렵다는 단점도 있었다.
‘모리 카이토.’
아까의 대화 흐름을 보면, 놈이 이 기자들로 이루어진 하부 조직의 리더였다.
그리고 이곳에 저 조직의 최고 수장인 텐구, 야마모토 테츠야가 새로운 구성원인 척 끼어든 것일 터.
‘무슨 언더커버 보스 놀이 하냐?’
참 재미있게도 논다 싶었다.
-야옹이.
-네, 주인님.
-새로 등장한 그놈 얼굴 잘 기억해 둬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준혁은 조심스레 휴대폰을 꺼내 놈의 얼굴을 줌으로 당겨 촬영했다.
놈이 아무리 각성자에 던전 관리자라 해도 모든 기척을 죽이고 있는 준혁의 존재는 감지할 수 없었다.
‘생각보다 아주 젊네.’
준혁도 이 부분은 아주 의외였다.
이미 본 적 있는 다른 두 던전 관리자와 비교하면 아주 젊었다.
서천회라는 거대한 조직의 수장이 이 정도로 젊은 나이라는 사실은 큰 반전이었다.
야마모토 테츠야가 합류한 후, 술자리에서는 특별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인사를 나누고 지금까지 했던 일들에 대해 정리하는 정도였다.
그렇게 술자리가 끝나자 모두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야마모토 테츠야는 모리 카이토와 함께 길을 나섰다.
둘만 남게 되자 모리 카이토의 말투가 변했다.
“어떻습니까, 총장?”
“괜찮긴 한데…….”
“마음에 안 드시는 거라도?”
“다들 결기가 부족하군. 생각들이 너무 물러.”
“그 부분은 제가 조금씩 다듬어 가고 있습니다.”
“알았네. 일단 한국 쪽은 따로 사람을 보내 줄 테니 논의해서 처리하도록.”
“알겠습니다.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두 사람은 다시 방향을 나누었다.
준혁은 당연히 야마모토 테츠야의 뒤를 밟았다.
게이트를 통과해 이동하면 쫓을 방법이 없기는 하지만 일단은 쫓는 데까지는 쫓아가 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모리 카이토나 다른 놈들에게는 흑호의 ‘표식’을 붙여 놓았기에 걱정할 게 없었다.
야마모토 테츠야는 예상한 대로 인적이 드문 쪽으로 방향을 잡아 발걸음을 옮겼다.
게이트를 열어 이동할 생각으로 보였다.
‘이대로 죽여 버릴까?’
준혁의 머릿속에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쉬이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게이트에서 만났을 때처럼 공격이 안 먹히면 낭패였다.
지금 놈은 준혁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에 기습이 통할 가능성은 어느 정도 있었다.
그러나 게이트에서의 그 회피 동작은 인지와 무관해 보이는 느낌이 있었기에 기습이 먹힐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괜히 놈에게 자신의 생존 사실을 알려 주기만 하면 큰 손해였다.
‘아!’
그러다 문득 떠오른 한 가지.
준혁은 급히 놈을 기습할 계획을 짠 후 ‘예지’를 펼쳤다.
빠르게 확인한 10분 후의 상황.
‘역시나.’
준혁의 예상대로였다.
게이트 안에서 보았던, 텐구가 순간적인 게이트 사용으로 회피하던 그 기술은 사용자의 인지와 무관하게 발동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공격할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잠시 고민하는 사이 야마모토 테츠야가 마침내 사람이 없는 골목에 들어섰다.
그리고 때마침 떠오른 좋은 생각이 하나.
-야.
“헉!”
‘감응’이었다.
놈들은 준혁이 던전 시스템으로도 각성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또한 준혁의 스킬도 알지 못했다. 이시이 카케루나 마츠다 오가는 구련환의 제약 때문에 준혁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재밌냐?
“누구냐?”
이렇게 텔레파시로 말을 걸어도 준혁을 떠올리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야마모토 테츠야는 준혁의 죽음을 확신하고 있으니 더더욱 가능성이 적었다.
당황한 야마모토 테츠야가 황급히 사방을 살폈다.
강렬한 마나의 파동이 주변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준혁의 감각에 걸렸다.
하지만 놈은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다.
준혁의 영력과 마나 컨트롤은 최고 수준이었다.
그런 준혁이 모든 기운을 숨기고, 지금은 기척까지 완벽하게 없앤 상태였다.
사냥감이, 완벽하게 위장하고 숨어 있는 사냥꾼의 존재를 인지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글쎄? 내가 누굴까? 적색? 청색? 아니면 금색?
“이시이와 마츠다 두 놈을 게이트로 끌고 간 게 네놈이냐?”
-아아, 그런 일도 있었나 봐? 아 참, 난 한 가지는 아는데.
“뭐? 무슨…….”
-네가 은색이라는 거. 크흐흐! 어떡하냐? 나는 너를 아는데, 너는 나를 모르네?
잘못된 선택일 수도 있었다.
이렇게 경각심을 줘 버리면 놈이 더욱 깊이 숨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준혁에게는 릴리안 우드라는 조력자가 있었다.
아직 아군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상황에서는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히든카드였다.
-그런데 야마모토 테츠야 씨.
놈의 얼굴에 한층 짙은 당혹감이 떠올랐다.
그 모습에 준혁은 피식 웃었다.
‘본명이었군.’
어쩌면 가명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말해 보았는데, 그 이름이 본명이었던 모양이다.
아마 서천회라는 조직의 수장이 이렇게 젊을 거라는 생각은 누구도 못할 거라 예상하고 아예 본명을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즉, 진짜 신분으로 움직이는 게 사람들의 인식의 허를 한 번 더 찌르는 것이었다.
야마모토 테츠야의 얼굴에 짙은 당혹감이 어렸다.
그로서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 틈을 노려 준혁이 길바닥에서 뜯어낸 콘크리트 덩어리를 던졌다.
슈우욱!
마나도, 영력도 싣지 않고 근력만을 이용해 던진 콘크리트 덩어리가 세차게 날아갔다.
하지만 콘크리트 덩어리가 닿기 직전 놈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어느새 다른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준혁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공격은 ‘예지’에서 놈을 죽일 생각으로 공격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저 회피 기술의 실체를 확인하면서 도발도 겸하는 것이었다.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위치를 바꾸는 그 스킬은 놈의 인지와는 무관하게 발동하는 것인 모양이었다.
다만, 게이트에서 만났을 당시에 상황이 반복되자 놈의 반응이 느려졌던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었다.
‘나중에 물어보면 되지.’
생각을 정리한 준혁이 재빨리 위치를 바꾸며 몇 번 더 콘크리트 덩어리를 던졌다.
“무슨 장난질이냐!”
야마모토 테츠야가 버럭 소리를 질러 댔다.
놈의 입장에서는 준혁의 공격이 놀리는 것으로밖에는 안 보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얼굴은 사진을 찍었고, 이름 확인했고, 심리전도 걸었고.’
당장은 더 할 게 없었다.
-자자, 그럼 다음 위원회 회의 때 보자고.
준혁은 그 말을 끝으로 ‘감응’을 중단했다.
하지만 자리는 떠나지 않은 채 야마모토 테츠야의 반응을 살폈다.
“놈, 나와라!”
버럭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준혁은 이미 자리를 떠났다는 듯 기척을 완벽하게 죽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야마모토 테츠야는 한참 동안 숨죽인 채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미지의 누군가가 떠났다는 확신이 든 후에야 게이트를 열어 어딘가로 이동했다.
물론, 이 이후는 준혁도 알 수가 없었다.
던전 관리자에게는 ‘표식’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얻은 것이 많았다. 그리고 지금 이걸 최선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준혁은 혹시 모를 감시를 피하기 위해 빠르게 그 자리를 떠났다.
꽤 거리를 벌린 후 볼런트 라일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흑호를 불러 ‘도약’을 사용했다.
목적지는 릴리안 우드의 비밀 공간이었다.
“왔군요.”
도착하자마자 릴리안 우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짧은 시간 새 볼런트 라일이 준혁의 연락을 전달했는지 릴리안 우드가 편안하게 준혁을 맞이했다.
“물을 끓이고 있는데, 차 한 잔 드릴까요?”
“아니요. 저는 냉수면 됩니다.”
“아쉽네요. 볼리 외에 만나는 친구가 차를 즐기지 않는다니.”
릴리안 우드는 진심으로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준혁은 그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곧장 본론을 꺼냈다.
“당신이 가진 정보망으로 어디까지 알 수 있습니까?”
“국가별, 분야별로 천차만별이라 정확하게 말해 주기는 힘들어요. 원하는 정보를 말해 주면 최대한 알아보도록 하죠.”
준혁이 휴대폰에 야마모토 테츠야의 사진을 띄운 후 말했다.
“야마모토 테츠야, 일본인. 이 인물에 대한 모든 정보.”
“이 사람 혹시 은색?”
사진을 본 릴리안 우드가 눈치 빠르게 물었다.
사실 굳이 숨길 필요는 없는 내용이었다.
어쨌든 백효를 통해 릴리안 우드를 감시하고 있으니 뒤통수 맞을 염려도 할 필요는 없었다.
“맞습니다. 일본 서천회의 대장이며, 5인 위원회의 은색입니다.”
릴리안 우드의 두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럴 것이라고 어느 정도 짐작을 했는데도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자신들은 그렇게 긴 시간 동안 탐색했어도 찾아내지 못한 정보를 이렇게 빨리 찾아낸 것은 진심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대단하네요. 5인 위원회에서 벌써 두 사람이나 찾아내다니.”
“두 사람?”
“저와 이 야마모토 테츠야. 이렇게 두 사람이요.”
준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셋인데요?”
“네?”
“세 명의 정체를 안다고요.”
“그럼 또 한 사람은 누구…….”
릴리안 우드가 다급하게 물었지만 준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 정도로 신뢰가 쌓이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그제야 화들짝 놀란 릴리안 우드가 조금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흠흠, 너무 놀라서 실수했군요. 일단 이 사람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면 된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잠시 기다리세요.”
릴리안 우드 측에서 정보를 가져오는 데 걸린 시간은 두 시간 정도였다.
보고서를 받아 든 릴리안 우드가 그 내용을 준혁에게 읽어 주었다.
“야마모토 테츠야, 일본 도쿄 태생, 34세, 일본 내 극우 성향의 인터넷 신문사 ‘더 라이징’의 대표인 동시에 유일한 직원, 가족은…….”
모든 내용을 받아 적은 후 준혁은 다시 한 번 그것을 훑어보았다.
“대외적으로 별다를 게 없군요.”
공식적으로 주목받는 일을 하면 자신이 드러날 수도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프로필만 보면 정말 별다를 게 없는 놈이었다.
하지만 이 프로필이 놈의 전부일 리는 없었다.
이제부터는 그것을 차근차근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준혁은 자신이 쓴 한글 사본과 릴리안 우드가 들고 있는 영문 원본을 둘 다 챙긴 후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당신네들 공격받으면 게이트 타고 훅 사라지는 그 기술 말입니다.”
“네.”
“그거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 줄 수 있나요?”
준혁의 물음에 릴리안 우드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아직 그 정도로 신뢰가 쌓이지 않았는데요?”
아까 던진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준혁이었다.
하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 기술은 이들의 구명줄이기 때문이었다.
잠시 고민한 준혁이 물었다.
“아까 그 정보로 거래할까요?”
“아까 그 정보?”
“내가 아는 또 한 명의 위원.”
그 말에 릴리안 우드가 말을 길게 끌며 물었다.
“내가 손해인 것 같은데요?”
사실이었다.
릴리안 우드의 입장에서는 준혁이 딴마음 먹는 순간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정보였다.
그러니 강요할 수는 없는 일.
“쯧! 그렇기는…….”
빠르게 포기한 준혁이 항복을 선언하려는 찰나, 릴리안 우드가 말했다.
“그래도 하죠. 그 거래.”
준혁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네? 진짭니까?”
릴리안 우드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뢰가 필요하잖아요. 그 신뢰 제가 먼저 보여 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