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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장. 반격#1-
준혁은 미국 정부를 통해 발급받은 여권으로 일본에 입국했었다.
그리고 해당 여권으로 일본에서 출국한 적이 없었다.
텐구의 핵 공격에 당한 후, 흑호의 ‘도약’을 통해 한국으로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일본으로 재입국할 때도 당연히 흑호의 ‘도약’을 이용했다.
장소는 일본에 있을 당시 묵었던 숙소 인근의 다른 레지던스였다.
장비를 제작하던 중에 잠시 넘어와 장기 숙박으로 미리 구해 놓은 방이었다.
조금 번거롭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준혁 자신과 관계된 이가 일본에 나타나면 서천회 놈들의 시야에 잡힐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백효.
-네, 주인님.
멀리 있는 백효의 대답이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이거 좀 희한하네.’
준혁의 스킬인 ‘감응’은 현재 30미터라는 거리 제한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환수들과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감응을 통해 대화가 가능했다.
-시야 공유해라.
-네.
백효는 기존에 감시하던 볼런트 라일이 아닌 릴리안 우드를 감시하고 있었다.
던전 관리자라 해도 영력을 감지할 수는 없기에 릴리안 우드는 백효의 존재를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릴리안 우드와 이야기를 마친 지 열흘째였다.
그동안 백효에게 보고받고, 가끔 살피기도 한 바에 따르면 릴리안 우드의 일과는 항상 똑같았다.
먹고 자는 등의 과정을 제외하면 하루 종일 연구에 매진했다.
외부와의 접촉은 오직 볼런트 라일을 통해서만 했다.
릴리안 우드가 특정 장소를 정하고, 볼런트 라일이 그곳에 도착하면 임의로 게이트를 열어 자신의 연구실로 오게 하는 방식이었다.
‘비현실적인 캐릭터란 말이지.’
겨우 열흘의 관찰로 한 사람에 대한 평가를 확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열흘간 지켜본 릴리안 우드는 흔히 볼 수 없는 캐릭터였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정의의 사도’였다.
볼런트 라일과의 대화 내용이나 홀로 쓰는 연구 일지에 휘갈기는 머릿속의 단상들이 그랬다.
게이트로 인한 피해에 괴로워하고, 헌터들에게 도움이 되는 장비를 고심하고, 사람들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매진했다.
유민섭과는 또 달랐다.
유민섭은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개인의 욕망에도 충실하고, 필요하다면 어느 정도의 불법도 용인한다.
하지만 릴리안 우드는 오로지 정의 그 자체였다.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였다.
첫째는 준혁이 알 수 없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감시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정의의 사도를 연기하고 있을 가능성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저 모습이 릴리안 우드의 진짜 모습인 경우다.
-지금까지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꾸준히 감시해.
-넵!
준혁은 짧은 대화를 마치고 백효와의 연결을 끊었다.
‘지켜보다 보면 결론이 나겠지.’
적어도 릴리안 우드에게 받은 메모리의 내용은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장비 제작을 끝내자마자 도쿄로 들어온 이유도 그것이었다.
준혁은 인벤토리에서 새롭게 제작한 장비들을 꺼내 착용한 후 레지던스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볼런트 라일에게 문자를 보냈다.
「Stand by.」
「OK.」
바로 되돌아온 답장을 확인한 준혁이 이번에는 전화를 걸었다.
준혁이 흑호와 함께 휑하니 사라진 지 불과 10분도 지나지 않아 유민섭의 휴대폰이 울렸다.
“도착했습니까?”
(네. 이제 시작하세요.)
“그쪽은 어때요?”
(유 길드장이 움직이면 이쪽에서 뭔가 잡히겠죠. 일단 이시이 시켜서 파 볼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유민섭이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있는 곳은 유민섭 소유로, 거실의 통유리창 너머로 청평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별장이었다.
총 3층짜리 건물이었는데, 건물의 모든 장소에 노트북을 펼쳐 든 아르바이트생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거실 역시 마찬가지.
유민섭이 거실에 모인 아르바이트생들을 한 번 훑어보며 말했다.
“시작하세요.”
딸깍, 딸깍, 딸깍!
거실 전체에 마우스 클릭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더니 각각의 노트북에서 동일한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인터넷으로 실시간 방송을 하는 소리였다.
모든 노트북에서 똑같은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해당 방송은, 별장 3층의 방음 시설이 갖춰진 방에서 누군가가 하고 있는 방송이었다.
“여러분의 차니차니, 이차니! 인사 오지게 박습니다!”
쿵!
실제로 이마로 책상을 들이받으며 인사를 한 강이찬이 밝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공지 덕분인가요? 실시간 시청자가 이렇게 많은 거 정말 오랜만입니다. 아, 진짜 길고 긴 겨울이었습니다. 내 말 믿어 주는 사람도 없고, 진짜 내가 서러워 죽을 뻔했다니까?”
강이찬은 유민섭의 부탁으로 열심히 유민섭을 편드는 방송만을 주야장천 해 댔었다.
물론 의도적으로 근거 없이 우기는 내용의 방송을 했다.
당연하게도 그로 인해 질려 버린 시청자들이 빠져나갔고, 구독 숫자도 거의 20퍼센트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어제 예고를 했다.
‘김준혁 사망설 기레기 조작 증거 입수’라는 내용의 예고를 올렸다.
그 덕분에 현재 시청자는 예전 수준으로 회복된 상황.
‘구독은 천천히 올리는 수밖에.’
줄어든 구독 숫자를 보면 지금도 속이 쓰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 닥치고 증거나 내놓으라고요? 하아, 성격도 급하셔. 그런 부분 정~ 말! 사랑합니다~”
열심히 드립을 친 강이찬이 기다리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럼 일단 맛보기부터 보여 드리겠습니다. 네? 그냥 전부 내놓으라고요? 그럼 저는 뭐 먹고 살아요? 그 정도는 이해해 주셔야지.”
뻔뻔하게 멘트를 날린 강이찬이 곧장 준비한 동영상을 방송 화면에 올리며 말했다.
“자, 우선 1편 올립니다.”
바뀐 화면에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어떤 휴대폰의 바탕화면이었다. 화면에는 날짜와 시간이 표시되어 있었고, 그 위로 강이찬의 설명이 덧붙었다.
“절대 조작이 아닙니다. 지금 보시는 동영상은 휴대폰 화면에서도 보시듯 지난 9월 13일 오전 7시에 촬영한 것입니다.”
곧 휴대폰이 옆으로 치워지고 등장한 것은 한 남자가 통화를 하는 모습이었다.
남자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었다.
강이찬이 또 한 번 설명을 부연했다.
“사운드 최대로 키울 테니 잘 들어 보세요.”
그리고 잠시 후, 남자의 통화 내용이 옅은 잡음 사이로 들렸다.
『그 일본 이야기 진짜입니까?』
『아니, 못 믿는 건 아닌데……. 너무 맥락이 없잖아요. 이러다 오히려 역풍이 불지도 모릅니다.』
『유민섭은 반응 안 할 거라고요? 하긴 어제 강이찬 그놈만 개인 방송에서 열심히 우기기는 했죠.』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무슨 내용입니까?』
『네네, 네. 아아,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김준혁을 일본에서 본 목격자가 있었다는 얘기를 중심으로 올리라는 말이죠? 호텔? 어떤 호텔입니까? 아, 거기요? 사진도 있다고요? 네네, 대충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거 저한테만 주시는 소스인가요? 그래요? 그럼 제가 단독 달고 나가겠습니다.』
영상이 멈췄다.
그리고 다시 강이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까 보셨죠? 이 영상은 9월 13일 오전 7시에 찍은 영상입니다. 그리고 당일 오전 8시에 올라온 기사 기억하십니까?”
이번에는 포털 화면이 떠오르며 기사 하나가 화면에 떠올랐다.
강이찬이 말한 시간에 올라온 기사였다. 그리고 그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일본의 한 고급 호텔, 김준혁을 본 목격자 등장.>
그리고 기사에 포함된 사진에는 준혁과 비슷한 덩치를 가진 한 남자의 뒷모습이 찍혀 있었다.
천천히 기사를 확인시켜 준 후, 강이찬이 말했다.
“충격이죠? 방금 기사에서 기자 이름 확인했을 겁니다. 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방금 충격적인 김준혁 사망 기사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는지 목격한 겁니다.”
채팅창이 난리가 났다.
<와, 지금 이거 진짜냐?>
<실화냐?>
<미친 기레기네.>
<그러니까 취재도 안 하고 그냥 넘겨받아서 썼다는 말이잖아.>
<야, 근데 이 동영상이 조작이 아닌 건 어떻게 믿어?>
<난 차니 믿는다.>
<이 정도면 강이찬 고소당할 각인데? 그거 무릅쓰고 올렸으면 믿을 만하지 않음?>
<그런데 이거 따지고 보면 몰래 촬영한 거잖아. 불법 아니냐?>
<강이찬이 오죽하면 저런 짓까지 했겠냐?>
몇몇 부정적인 반응도 있었지만, 대다수 시청자들이 강이찬을 편드는 내용의 채팅을 올렸다.
물론 그 사람들은 모두 지금의 별장에 와 있는 아르바이트생들이었다.
아르바이트생들의 편들기에 강이찬이 장단을 맞췄다.
“네. 저도 진짜 그동안 증거 수집하느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네. 솔직히 이거 고소미 먹을 각이죠. 그런데 저 강이찬, 각오하고 시작하는 일입니다. 모자이크라서 못 믿겠다고요? 나중에 제가 저 화면의 모자이크 제거한 영상을 올리겠습니다.”
<오, 차니 상남자네.>
<멋지다.>
<그래서 김준혁은 죽은 거냐, 산 거냐?>
“제가 당장 그에 대한 증거는 못 내놓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 김준혁 헌터는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별장 2층의 아르바이트생들은 각종 포탈과 커뮤니티로 달려가 해당 내용을 글로 올렸다.
대한민국 인터넷이 ‘김준혁의 사망설 조작’과 ‘기레기 기사 쓰는 법’으로 뒤덮이는 데는 불과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
-게이트 보이거든 들어가.
“으, 으아악!”
“헉!”
비명과 함께 사색이 된 얼굴로 벌떡 일어난 두 사람은 이시이 카게루와 마츠다 오가였다.
이시이 카게루가 기겁한 표정으로 뒤로 넘어졌다.
꽤 긴 시간 잊고 지냈던 준혁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린 탓이었다.
-기, 김준혁 님.
-게이트요?
두 사람의 대답에 준혁이 ‘감응’을 통해 말을 이었다.
-이시이가 끼고 있는 고립의 반지는 인벤토리에 넣고.
-그, 그거 이미 빼앗겼습니다.
-그래? 그럼 됐다. 게이트 열리거든 넘어와.
준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 한쪽 구석에 희미한 빛과 함께 게이트가 떠올랐다.
준혁이 볼런트 라일을 통해 릴리안 우드에게 부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저희는 지금 감시당하고 있습…….
-닥치고 넘어와.
준혁의 말에 두 사람이 지체 없이 게이트로 몸을 날렸다.
게이트를 통해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준혁이 잡은 레지던스였다.
그런데 두 사람은 방금 전까지 입고 있던 옷이 모두 사라져 완전한 나체가 되어 있었다.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준혁이 손목에 채워 놓은 구련환뿐이었다.
릴리안 우드가 연 게이트를 통과하는 중에 던전을 한 번 들른 탓에 가지고 있던 물건들이 모조리 사라진 것이었다.
이는 혹시 모를 위치 추적이나 감청 장비에 대한 대비였다.
고립의 반지를 빼라고 시켰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뒤이어 준혁이 흑호의 ‘도약’을 통해 방으로 돌아왔다.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준혁이 두 벌의 트레이닝복을 던졌다.
“일단 입고.”
두 사람이 빠르게 옷을 입은 후 준혁이 입을 열었다.
“자, 일단 너희는 지금부터 이 방에서 절대 밖으로 나가지 마라.”
“하지만 저희를 감시하던 자들이 지금 우리를 찾고 있을…….”
이시이 카게루가 뭐라 설명하려 했지만 준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를 뒤지지는 않을 거다.”
“네?”
호텔에 있던 감시자는 준혁이 이미 처리한 후였다.
그리고 방 안에 있던 감시 카메라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두 사람은 게이트를 통과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준혁이 노리고 한 일이었다. 흑호의 ‘도약’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두 사람을 빼낼 수 있었지만, 일부러 감시 카메라에 게이트를 통과하는 장면이 잡히도록 만들었다.
그 연출을 통해 준혁이 노리는 것은 단 하나였다.
서천회, 텐구의 수하가 분명한 두 사람을 빼낸 것이 또 다른 던전 관리자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
그 경우 5인 위원회 내부에 의심을 심어 줄 수 있었다.
5인 위원회는 애초에 서로를 견제하는 사이지만, 지금의 장면이 분열에 가속도를 더하리라.
‘어떻게 반응하는지 한번 보자.’
준혁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