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받고 각성 더!-134화 (134/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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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장. 또 하나의 관리자#2-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준혁은 티 테이블에 놓인 고급스러운 찻잔 속 호박색 액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정면에 있는 릴리안 우드를 본다.

시선을 받은 릴리안 우드가 물었다.

“마음에 들지 않나요?”

말하는 모습이 참으로 여유롭다.

단 두 명뿐이지만 지금까지 만났던 던전 관리자와는 분위기가 또 다르다.

릴리안 우드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준혁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이곳은 손님이 올 일이 없는 곳이죠. 오랜만에 방문한 손님이라 아끼는 찻잎을 꺼냈어요.”

준혁은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고, 릴리안 우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음미해 봐요. 마음에 들 겁니다.”

준혁은 저 여유로움을 왠지 깨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천천히 찻잔을 들며 물었다.

“폴로늄이 든 건 아니죠?”

“풉!”

릴리안 우드가 저도 모르게 찻물을 뿜었고, 볼런트 라일이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손수건을 들고 달려왔다.

그리고 준혁은 찻잔을 든 채 이미 저 멀리 자리를 피한 후였다.

릴리안 우드가 황당한 표정으로 준혁을 향해 물었다.

“재, 재미있는 분이군요? 폴로늄이라니.”

“그걸 아십니까?”

“모를 수가 있나요? 과거 영국에서 있었던 사건인데.”

방사능 홍차는 2006년 영국에서 전직 러시아 연방 보안국 요원이 암살당하면서 드러난 물건이었다.

그 문제의 물건이 세상에 드러난 유일한 사건이기도 했다.

“음, 그렇군요.”

볼런트 라일이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사태를 수습한 후 준혁은 다시 릴리안 우드와 마주 앉았다.

그리고 준혁은 그제야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러는 사이 릴리안 우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은색이 당신을 죽였다고 호언장담하던데, 사실은 실패했군요.”

“은색?”

“음? 모르나요?”

준혁이 고개를 저었고, 잠시 고민한 릴리안 우드가 말했다.

“이 정도는 가볍게 알려 줘도 상관없겠네요. 제가 던전 관리자라는 건 알고 있죠?”

“사실은 볼런트 저 양반이 던전 관리잔 줄 알았습니다만…….”

“그게 볼리의 원래 임무죠.”

볼리는 볼런트 라일의 애칭쯤 되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래서요?”

“던전 관리자는 모두 다섯 명이에요. 우리는 그 다섯의 모임을 ‘5인 위원회’라고 부르죠. 그리고 위원회는 모종의 장소에서 정기적으로 회의를 연답니다.”

“모종의 장소?”

“우리도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해요. 게이트를 통해 대화를 주고받으니까. 아까 말한 ‘은색’은 게이트의 색깔입니다. 각 게이트의 색이 다르거든요.”

준혁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색깔로 구분해 부른다는 건 서로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탓일 터다.

즉, 준혁의 가정 하나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릴리안 우드가 말을 이었다.

“참고로 저는 금색, 그리고 당신을 공격했던 이는 은색, 그 외에 적색, 청색, 녹색이 있죠.”

“그리고 그 은색이 문제의 일본 놈이라는 말이군요.”

“맞아요.”

“그럼 당신들의 목적은 뭡니까?”

준혁이 물었지만 릴리안 우드는 대답은 하지 않은 채 빙긋 웃으며 차분하게 홍차를 마셨다.

그러기를 한참.

준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 말에 대답하기 싫으면 그건 안 해도 됩니다. 일단 하려는 말을 해 보시죠.”

“일단 하나만 묻죠. 나는 아니지만, 위원회는 당신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나타나서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줘도 상관 없나요?”

“자신이 없었습니다.”

“자신?”

“싸워서 질 자신이.”

“호호! 싸워 이기지는 못해도 도망칠 수는 있습니다.”

“협박도 방법이죠. 제가 딱히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는 아니거든요. 당신이 도망치면 저는 지구상에서 영국이 있는 자리를 그냥 망망대해로 만들 겁니다.”

능글맞게 웃으면서 하는 말이었지만, 릴리안 우드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공개된 스탯 9,995인 사람이 하는 말이었다.

저 말을 설사 농담으로 했다 해도, 듣는 사람은 절대 웃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얼른 표정을 푼 릴리안 우드가 말을 이었다.

“매우 무서운 말이군요. 그럼 이제부터 저는 영국을 인질로 잡은 사람과 대화를 해야 하는 거군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간단명료하니 좋네요. 자, 그럼 이제 제가 질문할 차례죠?”

“차례?”

“서로 질문 하나씩 주고받는 겁니다. 괜찮은 조건 아닌가요?”

“배려심이 뛰어나네요. 생각보다 훌륭한 인격이신 것 같은데요?”

“습관입니다. 한국은 동방예의지국이라서.”

“저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군요.”

농담처럼 가볍게 주고받는 말이지만 그 속의 긴장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지금의 싸움은 명백히 준혁이 이기고 하는 싸움이었다.

영국을 침몰시키겠다는 협박에 릴리안 우드의 표정이 굳어진 이상 준혁의 우위는 확실했다.

물론 이는 준혁의 노림수였다.

보통 사람은 상상도 못할 범위의 협박을 던져 릴리안 우드의 평정심을 깨트린 것이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던전 관리자의 목적은 뭡니까?”

“표면적으로는 시스템의 에너지 과부하를 막기 위해 게이트를 통해 해당 에너지를 배출하는 겁니다. 그 위험을 세계에 분산시켜 인간의 피해도 최소화하는 것.”

“까지 마시고.”

“말했잖아요, 표면적이라고. 관리자들은 현재 두 개 파로 나뉘어 있어요. 간단하게 매파와 비둘기파로 나누면 되겠네요. 하지만 흔히 말하는 매와 비둘기는 아니에요.”

“흔한 매와 비둘기?”

“매파는 전형적이에요. 능력을 이용해 지구에 군림하자는 주의죠. 그리고 비둘기파는 주어진 일에 충실하며 리스크를 분산시켜 평화를 유지하자는 주의인데……. 제가 보기에는 뒤로 다른 걸 준비하는 걸로 보이더군요.”

“당신은요?”

“저는 중립입니다. 표면적으로 평화를 주장하는 비둘기파의 손을 들어 주고 있죠.”

준혁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각국의 인구에 비례해 게이트가 발생하는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한 데 있었다.

“자, 당신 차롑니다.”

“당신의 목적은 뭐죠?”

“나의 처음 목적은 그저 시스템의 융합을 막는 거였습니다.”

“당신이 시스템을 융합시키려는 게 아니었나요?”

“처음 듣는 얘기군요.”

“흐음, 역시 그렇군요.”

다시 질문의 기회가 준혁에게로 넘어갔다.

“던전 관리자가 죽으면, 관리 권한 같은 건 어떻게 되죠?”

“생각지도 못한, 하지만 꽤 좋은 질문이군요. 타인에게 넘어갑니다.”

“그게 다른 던전 관리자라도 상관없습니까?”

“네.”

준혁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건 베런즈를 포함해 던전 관리자들이 다른 관리자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이거였다.

릴리안 우드가 출입문은 고사하고 창문조차 없는 공간에서 생활하는 이유도, 볼런트 라일이라는 대역을 내세운 이유도 그 관리 권한에 있었던 것이다.

릴리안 우드가 ‘좋은 질문’이라고 말한 이유 또한 이것이다.

5인 위원회의 핵심을 관통하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릴리안 우드가 조용히 물었다.

“자, 그럼 질문 주고받기는 이제 끝난 거죠?”

준혁은 당황하지 않고 그 말을 받았다.

“알고 있었습니까?”

“그 정도도 눈치채지 못하면 제 나이를 반납해야죠.”

“그렇군요.”

어차피 요식 행위였다.

준혁은 릴리안 우드라는 던전 관리자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 않았고, 일단은 분위기를 좋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약간의 협박까지 해 놓았기에 만약의 사태에 대한 걱정도 그리 크지 않았다.

그리고 릴리안 우드는 그 사실을 알고 장단을 맞춰 준 셈이다.

준혁이 말했다.

“그럼 이제 하고 싶은 말을 해 보시죠.”

“좋아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나와 손잡을래요?”

“손?”

“아시겠지만, 5인 위원회에서 가장 많이 노출된 사람은 저예요. 김준혁, 당신도 볼리를 따라 저한테 왔잖아요? 다른 관리자들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죠.”

“그렇겠죠. 그래서 손을 잡자는 건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준혁의 물음에 릴리안 우드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원하는 건 저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겁니다.”

“되게 애매한 조건이시네? 그럼 뭘 주시려고?”

“그동안 모은 다른 던전 관리자들의 정보를 드리죠.”

“하하! 그러다 내가 그 던전 관리 권한을 다 가지면 당신도 죽일지도 모르는데?”

“그럴 사람이었다면 힘을 되찾았을 때 그렇게 얌전하게 움직였을까요?”

지금도 그렇지만 준혁이 힘을 되찾았을 그 당시에도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없었다.

아니, 국가도 없었다.

지금은 핵무기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사실 그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준혁이 마음만 먹으면 사람 하나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준혁은 그럴 마음도 없다.

잠시 고민한 준혁이 말했다.

“뭐, 그렇게 봐준다면 감사한 일이네요. 하지만 조건이 마음에 안 듭니다.”

“물론 협상은 해야죠. 원하는 게 있나요?”

“BR코퍼레이션의 지분 10퍼센트.”

준혁의 말에 릴리안 우드가 멈칫하며 그를 보았다.

“의외네요. 물욕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기는 한데…….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은데요?”

“뭐, 생각하시는 그게 맞습니다.”

“역시 발을 빼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뜻이군요?”

“정확하시네.”

일단 준혁이 BR코퍼레이션의 대주주가 된다면, 던전 관리자들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5인 위원회는 볼런트 라일이 위원회의 위원 중 하나라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볼런트 라일이 준혁과 손을 잡았다는 것이 세상에 공표된다면?

그렇잖아도 서로 치열하게 견제하는 5인 위원회 내부에 짙은 의심을 던져 주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릴리안 우드는 준혁과 잡은 손을 놓을 수 없다.

아직 정체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라도 다른 던전 관리자들의 합공을 받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좋습니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릴리안 우드의 반응에 준혁이 물끄러미 그녀를 보았다.

이 정도면 릴리안 우드가 하는 말은 진심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확인이 필요하다.

“그럼 확실하게 손잡기 전에, 저에게 확신을 주시죠.”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 은색이라는 놈에 대한 정보. 일단 그것만 주시죠. 그게 진짜인지 확인 후에 최종적으로 결정하겠습니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니까요. 그런데 저는 당신을 어떻게 믿을 수 있죠?”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아직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이지 않았으니 릴리안 우드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한참 고민하던 준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선은 당신의 정보를 먼저 주시죠. 그러면 저도 한 가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한 가지?”

“내가 어떻게 시스템 내부에 침입했는지 알려 드리죠.”

“생각지도 못한 조건이네요. 그래도 제가 손해 같은데요?”

물론 이것은 준혁의 말장난이었다. 배면계 시스템의 아바타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려 주지만, 그것이 린디웨라는 사실을 알려 줄 생각은 없었다.

가장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기에는 절대적으로 신뢰가 부족했다.

“그럼 협상은 결렬입니다.”

준혁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릴리안 우드는 당황하지 않으면서도 빠르게 말했다.

“싫다고 한 적은 없어요.”

“아, 그래요? 난 또 거절인 줄 알았지.”

준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릴리안 우드가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작은 메모리였다.

“은색에 대한 정보입니다. 사실 그가 일본 쪽이라는 건 알지 못했는데, 당신과 대립하는 바람에 알게 되었죠.”

준혁이 메모리를 건네받으며 잠시 릴리안 우드와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두 눈에 날카로운 살기를 머금은 채 말했다.

“오늘 말한 모든 내용이 사실이어야 할 겁니다. 하나라도 거짓이 있다면, 가장 먼저 당신의 ‘볼리’부터 갈가리 찢어 드릴 테니. 물론 그다음에 내가 무슨 짓을 할지는 당신의 상상에 맡기죠.”

날카로운 위협에 릴리안 우드가 순간적으로 헛바람을 들이켰다.

볼런트 라일을 들먹인 준혁의 협박이 주효했다는 뜻이었다.

‘볼리’라는 애칭으로 부를 정도면 단순한 고용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했던 말이었는데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하지만 릴리안 우드는 준혁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럼 볼리는 죽지 않겠군요.”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준혁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봅시다.”

인사를 남긴 준혁이 흑호와 함께 ‘도약’으로 공간을 뛰어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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