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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장. 또 하나의 관리자#1-
-야.
-네.
-자꾸 이럴래?
-시정하겠습니다.
무뚝뚝한 어투로 대답한 것은 백효였다.
옆에 웅크린 흑호가 준혁의 말에 동조하듯 말을 덧붙였다.
-망할 새 대가리, 자꾸 이렇게 잘못된 정보로 고생시킬래? 내가 얼마나 귀한 몸…….
-야옹이, 시끄럽고.
하지만 준혁의 한마디에 금방 고개를 팍 숙인다.
흑호, 아니 야옹이는 서러웠다.
슬쩍 시선을 옮겨 보니, 힐끔 내려다보는 백효의 시선에 고소해 죽겠다는 감정이 가득한 탓에 더욱 서러웠다.
준혁이 백효를 향해 말했다.
-자꾸 이렇게 오라 가라 하면 많이 곤란하다. 응?
-시정하겠습니다.
준혁은 장비 만드는 일에 주력하면서 짬짬이 볼런트 라일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현재 정체가 밝혀진 던전 관리자는 로건 베런즈 한 명이었다.
하지만 놈에 대해 아는 것은 모두 ‘과거’의 것들밖에 없었다. 현재는 위치나 가진 세력의 규모조차 가늠이 안 된다.
그리고 일본의 텐구도 만났다. 하지만 한 번 부딪쳐서 어이없게 당한 것 외에 아는 게 없었다.
서천회라는 이름과 이시이 카게루라는 끄나풀을 얻은 게 전부였다.
그다음으로 던전 관리자로 의심스러운 이가 ITO의 사무총장이자 BR코퍼레이션의 대표인 볼런트 라일이었다.
준혁은 백효를 통해 꾸준히 볼런트 라일을 감시해 왔다.
그리고 최근에는 의심스러운 모습이 보이면 바로 연락을 하라고 지시를 내려놓았다.
문제는 너무 자주 부른다는 것, 그리고 흑호의 ‘도약’을 이용해 급하게 달려와 보니 별다를 게 없다는 점이었다.
‘이 자식 진짜…….’
백효의 정보 수집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배면계에서 있었던 준혁의 투쟁에 아주 많은 도움을 주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준혁에게 가장 요긴했던 것은 광범위한 감시 능력이었다.
그 덕분에 준혁이 안전한 곳에서 숙면을 포함한 일상을 보낼 수 있었다.
문제는, 최고 수준인 정보 수집 능력에 비해 정보 해석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허당인 건 참…….’
배면계 있을 당시에도 그랬다.
광범위한 감시 능력으로 숙면할 수 있게 돕기도 했지만, 정말 별것도 아닌 반응만으로 수시로 준혁의 잠을 깨우기도 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볼런트 라일은 커피숍에 와서 커피를 주문했을 뿐이다.
참고로 이곳은 영국 런던의 한 거리였다.
그나마 흑호가 있기에 ‘도약’으로 넘어올 수 있었지만, 시차 때문에 한국에서는 밤 10시가 넘은 시점이었다.
-야.
-넵, 주인님.
-앞으로는 그냥 보고만 해라.
-하지만 감시 대상은 저 카페를 일주일에 두세 번 정기적으로 출입하고 있으며…….
-원래 단골이면 그럴 수도 있지.
-알겠……. 음!
백효가 갑자기 고개를 바짝 치켜들었다.
하지만 준혁은 별로 긴장하지 않았다. 그저 심드렁하게 물었다.
-또 뭐냐?
이때다 싶었는지 흑호도 한마디 거들었다.
-이 자식 오버하는 게 한두 번입니까! 주인, 님!
-시끄러. 오버한다는 말은 또 어디서 배운 거야?
-저는 환계의 위대한 검은 호랑이 일족, 그중에서도 왕가의…….
-야옹이, 시끄러.
야옹이가 고개를 팍 처박았다.
준혁은 그쪽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백효에게 말했다.
-쓸데없이 설명하지 말고 그냥 공유해라.
-넵! 실시하겠습니다!
준혁의 시야에 백효가 보는 광경이 겹치고, 고막으로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백효가 시선을 집중한 곳은 볼런트 라일이 손에 쥔 테이크아웃 커피 잔이었다.
‘음!’
준혁은 반사적으로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보통 테이크아웃 컵에는 주문자의 이름과 주문 내용이 적힌다.
그런데 볼런트 라일의 컵에는 그 외에도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컵 하단에 찍혀 있는 작은 점들이었다.
얼핏 보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희미한 표식.
-음!
준혁의 심각한 반응에 평소 딱딱한 태도의 백효가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좌우로 흔들며 거만한 동작을 취했다.
-새 대가리 놈, 어쩌다 한 번 맞혀 놓고 잘난 척은…….
하지만 흑호의 비아냥은 완벽하게 무시당했다.
준혁과 백효는 볼런트 라일의 움직임에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저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하지만 당장 떠오르지는 않았다.
어쨌든 꾸준히 감시하던 볼런트 라일이 특이한 움직임을 보였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따라가자.
-네, 주인님.
-야옹이, 표식 달아 놨었지?
-네, 주인 노… 님!
흑호가 은신과 동시에 볼런트 라일에게 따라붙고, 준혁은 백효의 시야를 통해 거리를 두고 쫓았다.
밖으로 나온 볼런트 라일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는 척하며 컵에 찍힌 점들을 유심히 살폈다.
준혁 또한 컵에 찍힌 점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점자.’
컵에 찍힌 점은 시각장애인들이 사용하는 점자였다.
‘암호를 주고받는 방법인가 본데……. 너무 허술한 거 아닌가?’
점자라는 사실을 모를 때는 도통 알 수가 없지만, 점자라는 사실만 알면 해석은 손쉽다.
의문을 느끼면서도 준혁은 꾸준히 그 뒤를 쫓았다.
한참 동안 점자를 살핀 볼런트 라일이 컵을 구겨 버린 후 계속 길을 따라 걸었다.
그러면서 휴대폰 터치를 반복했다.
-백효.
공유된 백효의 시야가 줌을 확 잡아당겨 볼런트 라일의 휴대폰 화면을 클로즈업했다.
‘아아!’
그리고 그제야 점자를 이용한 이유를 이해했다.
단순히 점자만 해석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볼런트 라일의 휴대폰에는 아주 복잡한 수식이 쉴 새 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점자로 한 번 암호화하고, 그것을 해독해도 정해진 방식의 계산을 해야만 진짜 메시지를 알 수 있는 방식인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볼런트 라일은 지도 앱을 띄우고 그곳에 숫자를 입력했다.
‘계산의 결과가 위·경도의 좌표값이었던 모양이군.’
지도 앱을 통해 위치를 확인한 볼런트 라일이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준혁 또한 뒤를 따랐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볼런트 라일은 던전 관리자로 의심되는 인물이었다.
거기에 더해 세계 기구인 ITO의 사무총장이며, BR코퍼레이션의 대표인 동시에 수석 연구원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마치 누군가에게 지령을 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보통 집단의 수장은 지령을 내리지 지령을 받지는 않기 때문이다.
‘잘못 짚었나?’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준혁은 이미 던전 관리자가 가진 힘에 대해 몸소 경험해 보았다.
게이트를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가능케 하는 아주 막강한 힘이었다.
그런 힘을 가진 자가 타인의 지령을 받고 움직인다?
일반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은 따라가자.’
어쨌든 무언가 의심스럽다는 정황 자체는 명백했다.
런던 시내를 한참 동안 도보로 이동한 볼런트 라일이 찾은 곳은 길가의 작은 식당이었다.
준혁은 일단 흑호를 따라 들어가게 하고, 자신은 백효를 통해 내부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안으로 들어간 볼런트 라일이 직원에게 물었다.
“화장실이 어딥니까?”
직원의 설명에 따라 볼런트 라일이 화장실로 들어선 직후였다.
-목표가 갑자기 위치를 바꿨습니다, 주인님!
흑호가 다급히 보고를 하는 동시에 시야를 공유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빠르게 사라지는 게이트였다.
‘던전 관리자가 맞나?’
이런 곳에 갑자기 게이트가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던전 관리자라는 심증이 한층 더 굳어지는 순간.
준혁이 다급히 물었다.
-표식은?
-감지할 수 있습니다. 쫓아갈까요, 주인님?
-그래, 쫓아…….
‘음?’
준혁이 또 한 번 멈칫했다.
‘로건 그 자식은 안 됐었는데?’
흑호가 로건 베런즈에게 붙였던 ‘표식’은 작동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볼런트 라일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일단은 쫓아가고 볼 일이었다.
-돌아와.
흑호가 빠르게 준혁의 옆으로 돌아왔고, 뒤이어 ‘도약’을 펼쳤다.
이렇게 된 이상 눈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
흑호의 ‘도약’은 단순한 순간 이동으로 보이지만 장소와 장소의 이동 사이에 하나의 과정이 더 있다.
환수들의 세상인 환계를 기점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흑호의 ‘도약’은 정확하게는 환계와 다른 지점 사이를 오가는 기술이기 때문에 그렇다.
시야로 들어오는 풍경이 빠르게 두 번 바뀌는 순간, 준혁은 어느새 다른 곳에 서 있었다.
“뭐야?”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런 대비도 없이 들이닥친 참이었기에 준혁은 빠르게 전면으로 양팔을 들어 올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당황했다.
그곳은 거대한 공간이었다. 정확하게는 일종의 밀실이었다.
창문은 고사하고 출입을 위한 문조차 존재하지 않는 사각의 거대한 방이었다.
외부와 통하는 곳이라고는 사방 곳곳에 뚫려 있는 미세한 구멍들밖에 없었다.
방 가운데 몇 줄로 늘어진 테이블 위에 온갖 물건들이 마치 전시하듯 가지런히 놓여 있고, 벽에는 수많은 모니터와 기계 장치, 전자 장치들이 쉴 새 없이 빛을 점멸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의 가장 정면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준혁도 아는 얼굴, 볼런트 라일이었다.
“누, 누구요!”
준혁은 메구탈로 얼굴을 바꾸고 있기에 볼런트 라일은 준혁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6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노파였다.
노파는 새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빗어 한데 묶고, 타이까지 맨 슈트 차림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키가 꽤 크고 마른 체형이라 슈트가 묘하게 어울렸다.
주변을 훑은 준혁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이 물건들은?’
테이블에 놓인 것들은 헌터들이 사용하는 각종 장비들이었다.
그리고 벽 쪽에 있는 물건은 준혁도 몇 번이나 경험한 적 있는 각성 검사기를 비롯해 던전 에너지 계측기 같은 것들이었다.
마치 연구실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었다.
‘볼런트 라일이 던전 관리자가 아니라면?’
흑호의 ‘표식’이 작동하는 것도 그렇고, 지령을 받는 듯한 움직임도 그렇고 볼런트 라일은 던전 관리자가 아닐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
‘볼런트 라일은 대외적으로 나서서 움직이는 실무자일 뿐이고, 진짜 수장은 따로 있다?’
준혁은 던전 관리자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관계라는 가설에 확신을 두고 있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상황도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던전 관련 각종 장비를 개발해 내놓는 BR코퍼레이션이 의심받는 것은 당연한 일.
그 의심과 감시로부터 피하기 위해 볼런트 라일이라는 허수아비를 세워 놓고, 진짜는 이런 곳에 몸을 숨기고 있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즉, 저기 보이는 키 큰 노파가 던전 관리자일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걸 확인할 방법이 준혁에게는 있었다.
바로 ‘관찰’이었다.
[?]
[?], [?]
[상태창]
근력:[?] 순발력:[?]
지구력:[?] 감각:[?]
마나:[?]
예상대로였다.
저 노파가 또 한 명의 던전 관리자였다.
준혁은 일단 어깨에 잔뜩 들어갔던 긴장을 풀었다.
핵을 날리는 게 아니라면 맨몸이라도 붙어서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텐구 또한 준혁의 공격을 피하기만 했을 뿐 직접 공격은 못했었다.
준혁이 여유로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이름 모를 던전 관리자 할머니.”
키 큰 노파의 푸른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하지만 이내 여유를 갖고 인사를 받았다.
“반가워요, ‘릴리안 우드’예요. 조금 당황스러운 만남이지만 나쁘지는 않네요, 김준혁 씨.”
준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할머니 눈치 빠르시네?”
“그냥 ‘릴리’라고 불러요.”
“하하! 알겠습니다. 저도 그냥 이름 부르세요. 아, ‘김’이 성이고, ‘준혁’이 이름입니다.”
준혁이 메구탈의 형태를 진짜 얼굴로 바꾼 후 다가갔다.
릴리안 우드가 빙긋 웃으며 한쪽에 있는 티 테이블을 손짓했다.
“앉으세요. 차를 대접하고 싶군요.”
“좋습니다. 전 딱히 가리는 게 없습니다.”
준혁이 자리에 앉았고, 릴리안 우드가 마주 앉았다.
그리고 볼런트 라일이 빠르게 차를 준비하러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