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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장. 자충수#4-
“삼촌, 삼촌!”
제법 분명해진 발음으로 ‘삼촌’을 외치며 달려와 덥석 안겼다.
왕왕!
뒤이어 청랑도 달려와 준혁의 발밑을 뱅뱅 맴돌았다.
이세연이 웃으며 다가와 물었다.
“어서 와. 밥은?”
“아, 괜찮아요. 잠깐 지유 얼굴만 보고 갈 거라서.”
그 말에 지유가 대번에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삼촌, 또 가?”
“응. 삼촌 바쁜 일이 있어서.”
“칫!”
지유는 잔뜩 토라진 표정으로 고개를 팩 돌렸다. 그렇다고 준혁의 품에서 내려가지는 않는다.
그 모습이 귀여워 흐뭇하게 웃는 준혁을 향해 이세연이 말을 더했다.
“뉴스에서 너 죽었다는 소문을 떠드는 바람에 지유가 얼마나 울고불고 난리 쳤는지 몰라. 달래느라고 나 진짜 고생했다.”
“하하! 미안해요, 형수님.”
준혁은 그렇게 말한 후 지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유야, 그래도 다른 사람…….”
“응, 알아! 밖에서는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거.”
똘망똘망한 얼굴로 말하는 모양새에 준혁은 삼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삼촌은 그럼 가 볼게.”
“벌써?”
“저녁에 올게.”
“저녁에?”
지유의 얼굴에 반사적으로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이세연도 반색을 하며 물었다.
“출퇴근 하려고?”
“네. 일단 제일 급한 건 끝났으니 차근차근 해야죠.”
“애 아빠도 좋아하겠네. 그럼 오늘 저녁은 오랜만에 네 식구 다 모여서 먹는 거네? 힘 좀 써야겠다.”
순간 준혁의 얼굴에 짙은 공포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세연의 요리 솜씨는 아주 뛰어나다. 그러니 음식 맛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문제는 힘 좀 쓰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럴 경우의 음식량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그 모든 음식은 준혁과 김준석 형제의 배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렇다고 거부할 수는 없는 일.
“하하, 좋죠! 저 그럼 잠시만……. 지유야, 삼촌 방에 좀 들어갈게.”
준혁은 조카를 바닥에 내려놓은 후, 제 방으로 가며 말했다.
“파랑이, 야옹이 따라와.”
왕왕!
신난 청랑이 깡총거리며 준혁의 뒤를 따랐고, 흑호가 주춤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앞서가던 청랑이 문득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고양이 놈 왜 저래?
흑호의 태도가 평소와 달랐다.
평소에는 무척이나 잘난 척이 심하고, 도도하게 구는 흑호였다.
왕족이라나 뭐라나.
그런데 오늘따라 기가 팍 죽어 있었다.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발을 내딛는 모양새도 도도하기 짝이 없던 평소의 태도와 다르다.
가만히 보니 털도 여기저기 듬성듬성한 곳이 있었다.
소형화 상태에서 저렇게 눈에 띌 정도면, 소형화를 풀면 필시 거대한 땜빵일 터였다.
-어디 가서 처맞고 왔나?
그때였다.
-청랑이, 이리 와.
방으로 들어간 준혁의 부름이 들렸다.
-넵, 주인님!
청랑은 지체 없이 달려가 준혁의 발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뭐든 명령만 내리면 당장 실행할 준비를 하고 있는 태세였다.
-그래. 너는 적어도 주인 ‘놈’이라고 하지는 않는구나?
깜짝 놀란 청랑이 준혁을 쳐다보았다.
-제 말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됐다.
대번에 흑호가 저러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흥! 망할 고양이. 그러니 평소에 예의를 지켰어야지.
-야옹.
-응? 야옹?
자존심이 그 누구보다 높은 흑호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소리였다.
준혁의 입에서 설명이 나왔다.
-저놈은 당분간 ‘야옹’만 말하게 될 거다.
버릇없음에 대한 일종의 ‘벌’인 모양이었다.
-크흐흐! 꼴좋다, 고양이 놈.
신나하는 청랑을 향해 준혁이 말했다.
-넌 앞으로도 지유랑 형수 지키는 데 총력을 다해라.
-넵! 항상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야기를 끝낸 후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은 준혁이 메구탈을 얼굴에 쓴 후 말했다.
“가자, 야옹이.”
오늘 준혁의 목적지는 백효가 있는 곳이었다.
정확하게는 볼런트 라일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
여론이 들끓었다.
쏟아지는 기사와 연일 TV에서 떠들어 대는 논평이 하루 종일 쏟아져 내렸다.
그런데 분위기가 묘했다.
초기에는 준혁의 생사에 꽤 무게를 두고 그를 찾아보려는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준혁의 생사에는 관심이 없다.
기사의 흐름은 오로지 하나였다.
유민섭은 무엇을 숨기고 있는가?
준혁의 사망설이 기사로 나간 후 겨우 열흘 만에 만들어진 변화였다.
명백히 어떤 ‘의지’가 담겨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흐름이었다.
폐허가 되어 재건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종로 거리에 하나둘 1인 시위자들도 등장하고 있었다.
종로 거리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빌딩이 혼원 길드 사옥이었다.
1인 시위자들은 그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피켓 내용이 가관이다.
“하, 저 멍청한 놈들.”
혼원 길드 사옥의 회의실 창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강이찬의 평가였다.
<유민섭은 김준혁의 훈련 커리큘럼을 공개하라.>
<김준혁의 커리큘럼은 세계가 공유할 자원. 유민섭은 이기적인 독점을 중단하라.>
너무나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시작할 당시 준혁의 사망설을 떠들던 분위기를 생각하면 맥락을 찾을 수가 없는 내용이다.
하지만 언론은 과격하게 그런 흐름으로 이야기를 전개했고, 여론이 들끓었다.
유민섭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도 한몫을 했다.
평소 언론과 가까이 지내고, 딱히 숨기는 것도 없던 유민섭이 유독 이 사안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붙어 있는 불에 장작도 아니고 거의 휘발유를 끼얹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탓에 유민섭은 이미 준혁을 암살하고, 그의 훈련 커리큘럼을 독점해 자신의 권력을 키우려는 야심가의 이미지를 덮어 쓰고 있었다.
지금 나오는 1인 시위는 그런 흐름에 부화뇌동하여 나선 사람들이었다.
“머리가 없으면 공부를 하든가.”
혼원 길드가 몇 개의 길드를 모아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렇게 훈련받아 성장한 헌터들이 또 다른 헌터들을 훈련시킬 거라는 사실은 조금만 찾아보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언론은 그조차 무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부 길드에만 특혜에 가까운 지원을 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논조였다.
강이찬이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젓고 있는데, 회의실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유민섭과 그의 수행비서인 장형준이었다.
“이찬 씨, 오래 기다렸어요?”
“그냥 저 아래 경치 구경하고 있었어요.”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고……. 오늘부터 해 줄 일이 있습니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욕 좀 먹을 텐데, 괜찮겠어요?”
“이미 평생 먹을 욕의 두 배는 먹은 것 같은데 새삼스럽게 뭐…….”
유민섭이 조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구독자랑 시청자 수가 꽤 많이 떨어진 것 같던데요?”
“괜찮습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돌아올 텐데요. 그리고 이제 더 떨어질 시청자도 없어요.”
묘하게 자포자기한 표정의 강이찬이었다.
“이제부터 냄새를 피워요.”
“냄새?”
“기본 방향은 이겁니다. 유민섭이 김준혁을 만난 것 같다. 김준혁은 살아 있다. 이 이야기를 기본으로 하되, 절대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말고 뉘앙스만 풀풀 풍겨요.”
“안 믿을 텐데요?”
“그게 목적입니다. 안 믿는 거. 이찬 씨가 저의 명령을 받아서 여론전을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 그림이 필요합니다.”
강이찬이 더욱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도대체 왜요?”
유민섭이 휴대폰을 열어 기사 하나를 띄웠다.
<김준혁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본행.>
“한 시간 전에 올라온 기삽니다. 이 내용을 골자로 한 기사가 몇 개 있습니다. 오랜만에 준혁 씨 관련 기사가 나왔는데……. 문제는 이 내용이 사실이라는 겁니다.”
“네? 일본이요? 사실입니까?”
강이찬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네, 사실입니다. 기사의 내용은 유민섭이 김준혁의 일본행 티켓을 끊어 줬고, 그 후 행방이 묘연하다. 그때부터 유민섭의 음험한 계획이 준비되어 있었다. 뭐 그런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기자는 어디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까요?”
“음!”
“그동안은 기사가 워낙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와서 1차 소스를 발견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처음 그 1차 소스로 의심되는 곳이 몇 군데 나왔어요.”
유민섭의 말에 강이찬이 또다시 물었다.
“왜 이제 와서 그런 짓을…….”
“그놈들이 하는 거대한 착각 하나 때문이죠.”
“착각이요?”
“놈들은 준혁 씨가 정말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다음으로 저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습니다. 놈들의 착각을 진실이라고 믿도록 하는 게 첫 번째 목표였습니다.”
“아, 그래서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은 건가요?”
유민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럼 놈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더욱 과몰입하게 됩니다. 그쯤이면 분명 조심성이 사라질 거라고 봤는데, 그게 오늘입니다.”
유민섭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본 강이찬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저한테 여론전 하는 뉘앙스를 풍기라는 이유는 뭐죠?”
“또 하나의 착각을 진실로 여기게끔 하는 목적입니다.”
“또 하나의 착각이요?”
“이렇게 여론전을 한다는 건 유민섭이 궁지에 몰렸다는 방증이다, 라는 착각이요.”
그제야 이해한 강이찬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러니까 더욱 미쳐 날뛰라고 그러는 거군요?”
“맞습니다.”
“후후, 맡겨 주십시오. 제가 연기가 좀 되거든요.”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유민섭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이면서 사람들의 머릿속에 여론전이라는 의심을 심어 주는 것은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강이찬은 개인 방송을 꽤 오랫동안 해 왔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생각의 흐름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강이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강이찬은 인사만 휑하니 남긴 채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형준 씨.”
“네, 길드장님.”
“오늘부터 해 줘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장형준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현재 의심스러운 기사는 모두 다섯 건입니다. 그리고 몇 분의 시간 차이를 두고 올라온 기사도 일곱 개 정도 됩니다. 이 기자들을 중심으로 조사해 보겠습니다.”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일본.”
장형준이 잠시 멈칫한 후 유민섭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일본 쪽 기사를 살펴 주세요.”
“어떤 기사들을 말씀하시는지?”
“일본의 가십 잡지를 중심으로 준혁 씨에 관한 기사를 조사해 보세요.”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일본의 엉터리 잡지에 말도 안 되는 기사를 올리고, 그 기사를 국내 정치 관련 시민 단체가 받아 옮기고, 그걸 다시 대형 일간지가 실으면, 정치인들이 신문에 난 사안이라며 떠들어 대는 가짜 뉴스 제조 메커니즘이 있었습니다.”
잠시 생각한 장형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 사태에도 그런 수법을 썼다고 생각하십니까?”
“과거 일본의 극우 세력들이 그런 짓을 많이 했습니다. 이번 사태의 몸통인 서천회도 숨어 있는 극우 세력이죠. 연관성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조사해 보겠습니다.”
“이쪽은 진작 파 볼까 싶었는데, 혹시나 싶어서 놈들이 날뛸 때까지 기다리느라 힘들었네요. 이제부터 이게 놈들의 자충수가 되도록 열심히 뛰어야 합니다.”
장형준이 급히 유민섭의 지시 사항을 메모한 후 말했다.
“그럼 곧바로 진행하겠습니다.”
“부탁해요. 그리고 아시죠? 최대한 은밀하게 해 주셔야 합니다.”
“맡겨 주십시오.”
대답과 함께 장형준이 밖으로 나가고 유민섭 혼자 남았다.
유민섭이 짜증이 잔뜩 실린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개새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