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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장. 자충수#2-
“어? 어떻게 알고 온 겁니까?”
준혁의 질문은 활짝 열린 보관 창고 입구에 서 있는 유민섭을 향한 것이었다.
준혁의 손에는 절굿공이가 들려 있었고, 그 아래 절구에는 조각난 매구의 머리뼈가 놓여 있었다.
전혀 평범하지 않은 일을 하면서,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서 있는 모습이 묘한 부조화를 만들고 있었다.
유민섭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준혁을 보았다.
“하아! 갑자기 보관 창고 침입 경보가 울렸다고 해서 온 거죠.”
“음? 그런 것도 있습니까?”
준혁이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물었다.
“동작 감지기 설치해 놨죠. 여기 들어 있는 게 돈이 얼만데 그런 것도 안 해 놨겠습니까?”
“그렇군요.”
“아니, ‘그렇군요’가 아니죠! 아, 좀 정상적인 방법으로 들어오라고요. 흑호 시켜서 들어온 겁니까?”
“그랬죠.”
“생체 정보 등록하고, 보안키까지 들고 있으면서 뭐 하는 짓입니까? 바빠 죽겠는데 이렇게 뛰어오게 만들면 어쩝니까?”
유민섭은 갑작스러운 경보에 기겁하고 달려온 참이었다.
비밀 유지를 위해 준혁과 유민섭 두 사람만 아는 곳이라 직접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주인이 침입을 한 꼴이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내가 좀 아날로그 지향적인 사람이라…….”
준혁의 말도 안 되는 변명에 유민섭이 도끼눈을 떴다.
“뭐, 아날로그요?”
“네. 아날로그…….”
“아날로그면 문을 부수지 그랬어, 이 양반아!”
“험험! 뭐 아무튼 괜히 헛걸음하게 했네요. 미안합니다.”
“하아! 알았습니다.”
유민섭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더 타박해 봐야 유민섭 본인만 스트레스가 쌓일 뿐이었다.
“그나저나 뭡니까?”
“네?”
“일본 간다던 사람이 왜 여기서 그러고 있느냐고요.”
“뭐, 그럴 일이……. 아니, 이거 얘기를 하기는 해야겠네요.”
“네?”
“일단 앉아 봐요.”
유민섭이 준혁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준혁이 찧고 있던 절구와 절굿공이를 유민섭 앞으로 쓱 밀었다.
“이건 또 왜요?”
“이야기 들으면서 할 것도 없는데 그거나 같이 하면서 들어요.”
“허…….”
어이없는 표정으로 준혁과 절구통을 번갈아 보던 유민섭이 결국 손을 움직였다.
“일단 일본에 간 건 맞는데…….”
쿵, 쿵, 쿵!
유민섭이 절구질을 시작하고, 준혁은 또 다른 재료를 손질하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준혁의 이야기가 중반쯤 되었을 때부터 절구질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준혁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유민섭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
“핵……. 지금 핵이라고 했어요?”
“네, 핵폭탄. 내 발밑에서 터졌다니까요?”
“아니, 아니. 잠깐만요.”
유민섭은 황급히 손을 들어 준혁의 말을 막고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정리했다.
한참 동안 생각을 정리한 후에야 유민섭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고위급 각성자라도 방사선 피폭에는 면역력이 없다는 거죠?”
“그렇다더군요.”
“실제로 테스트도 해 봤고?”
“러시아에서 했다는데……. 그 텐구 놈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방사능 홍차, 오래전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죠. 그런데 그걸 또 써 본 모양이군요.”
“그런 모양입니다.”
유민섭이 조금 질린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러시아도 아무튼 어떤 관점에서도 참 대단한 나랍니다.”
“어쨌든 방사선 피폭은 매우 위험합니다. 유 길드장도 그건 알고 있어야겠습니다.”
“아무래도 방사선 피폭이 DNA 단위부터 이상을 만드니 그런 모양이네요. 그래도 천만다행입니다. 엘릭서를 들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어휴! 생각도 하기 싫습니다.”
“유 길드장도 잘 챙기고 있죠?”
“물론입니다. 제가 두 개, 최유나 하나, 강태웅 하나. 이렇게 나눠 가졌죠.”
“뭐, 그렇게 막 퍼 줍니까? 그 귀한 걸…….”
“다 같이 사는 세상 아닙니까? 하아! 아무튼 저도 명심하고 있겠습니다.”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 유민섭이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이제 그놈……. 텐구? 그 코 큰 놈은 어떻게 밟아 줄 생각입니까?”
“아마 놈은 내가 죽은 것으로 생각할 겁니다.”
“그렇겠죠. 게이트까지 닫아 버렸으니…….”
“그때 이후로 일주일 정도 지났거든요?”
준혁이 배면계에 다녀온 시간이, 현실의 시간으로는 일주일이었다.
“길지는 않지만 준혁 씨가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니 죽었다고 여기겠네요.”
“네. 그래서 당분간은 그렇게 착각하도록 놔둘 겁니다.”
“그런 후에는요?”
“뭐, 그건 그때 가서. 정 대책이 없으면 나도 도쿄 한복판에 핵 한 방 떨궈 버리지, 뭐.”
유민섭이 깜짝 놀란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 그건 좀…….”
“농담입니다. 설마 일반인들 상대로 그러겠어요.”
“그, 그렇죠?”
“일단 장비부터 다시 장만하고, 그때 가서 움직여 볼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지금 휴대폰도 없는 겁니까?”
“휴대폰? 있는데요? 게이트 들어가기 전에 보관해 놨죠.”
준혁이 인벤토리에서 휴대폰을 불쑥 꺼냈다.
“아니, 휴대폰도 있는 사람이 여기 들어오면서 연락도 안 했습니까?”
“험험, 그건 뭐…….”
“아, 됐습니다. 기대하는 내 잘못이지. 저는 쌓인 일이 많아서……. 음? 그런데 잠깐만요.”
유민섭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리며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뭐지? 내가 방금 뭔가 이상한 걸 본 느낌인데?”
“이상한 거라뇨?”
“어?”
“왜요?”
“방금, 방금!”
유민섭이 준혁을 향해 뻗은 손가락을 파르르 떨었다.
절대 못 볼 걸 보았다는 듯 크게 뜬 두 눈에 눈알이 빠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왜 그래요?”
“인벤토리?”
“네?”
“방금 그 휴대폰 인벤토리에서 꺼냈잖아요.”
“그랬죠.”
“아니, 그랬죠라니! 준혁 씨한테 인벤토리가 왜 있어요? 도깨비 보따린지 그거 들고 있었잖아요! 아니, 그게 아니지. 인벤토리는 던전 쪽 각성자만 가진 거잖아요!”
오히려 준혁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어? 제가 말 안 했습니까?”
“무슨 말이요?”
“저 각성 한 번 더 했습니다. 듀얼 각성? 더블 각성?”
“말 안 했습니다!”
기절할 일이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한참 동안 숨을 더듬은 유민섭이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배면계와 던전 쪽 양쪽 다 각성을 했다는 거죠?”
“맞습니다.”
“린디웨 통해서?”
“그렇죠. 그거 덕분에 이런 것도 가능해졌습니다.”
“이런 거?”
유민섭의 반문에 준혁이 재빨리 ‘감응’을 사용했다.
-이렇게 대화도 할 수 있어요.
-허!
-쓸 만하죠?
-무슨 클래스로 각성했기에 이런 게 가능합니까?
헌터계 깊은 곳까지 알고 있는 유민섭도 이런 건 처음이었다.
그나마 비슷한 게 자신의 ‘지휘권’ 스킬이었다.
-관찰자요.
-그건 또 뭡니까?
유민섭의 다급한 질문에 준혁이 자신이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모든 설명을 들은 유민섭이 긴 한숨을 토했다.
“허, 거참…….”
이야기를 듣고도, 아니 눈으로 보고도 믿기가 어려운 이야기였다.
홀로 생각을 정리한 유민섭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 관찰자라는 거……. 뭔가 비밀이 있는 것 같은데요?”
“제 생각에도 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미개방 상태인 스킬이 개방되면 뭔가 좀 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던전 관리자 놈들한테 한 방 먹일 수도 있는, 뭐 그런 쪽이면 좋겠네요. 그런데, 그러면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준혁 씨, 린디웨, 그리고 저 이렇게 셋밖에 없는 겁니까?”
“네.”
“일본 놈 뒤통수칠 때도 좋겠네요. 하아! 더 생각하면 내 머리만 아플 것 같으니 일단 여기까지만 하죠. 저는 이만 일어나야겠습니다.”
“네. 멀리 안 나갑니다.”
“기대 안 해요.”
휑하니 인사를 나눈 후 유민섭은 재빨리 보관 창고를 나섰다.
***
“음? 백 길드장님이 어쩐 일입니까?”
길드로 돌아온 유민섭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의 사무실 앞에 백호 길드의 길드장, 백호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헌터들의 훈련에 누구보다 열심인 사람이 백호진이었다. 그런 그가 훈련 시간까지 포기해 가며 찾아왔으니 의아할 수밖에.
“아,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요? 일단 들어오시죠. 차 한잔하시겠어요?”
“어? 아, 아뇨. 괜찮습니다.”
사무실로 들어온 유민섭이 백호진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하실 말씀이라는 게?”
“그게……. 알고 지내던 길드장한테 이상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상한 소문이요?”
“그게……. 김준혁 헌터가 죽었다는 소문이…….”
“네?”
유민섭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백호진을 보았다.
깜짝 놀란 백호진이 황급히 손사래 치며 말했다.
“아, 그, 그 말을 믿는 건 아니고요. 그러니까 그런 소문이 있다고 저한테 얘기해서…….”
대외적으로 유민섭은 바르고 착한 사람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가식이 아닌 실제였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가, 유민섭을 마냥 대하기 편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헌터계에서 유민섭이 갖는 위상은 어마어마하다.
국내 최고의 길드장.
하지 않아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길드 한두 개 몰락시키는 건 말 한마디만으로도 가능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름 이름값이 있는 백호 길드의 길드장도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에 이렇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진짜 그런 소문이 있는 겁니까?”
“네. 아직 많이 퍼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조만간 소문이 크게 번질 거라고…….”
“그렇군요. 이렇게 알려 줘서 감사합니다.”
“아, 아닙니다. 저희 부길드장이 당장 유 길드장님한테 알려 드려야 한다고 해서…….”
“아, 그렇군요. 안유정 헌터한테도 감사 인사 전해 주십시오.”
자신의 연인이자 부길드장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는 모습에 백호진은 금세 감동한 표정으로 유민섭을 보았다.
하지만 유민섭 입장에서는 자신의 길드에 와서 훈련받는 안유정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유민섭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 이야기처럼 소문이 크게 번질 수도 있습니다만, 백 길드장께서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마세요. 아, 그러고 보니 훈련은 어떻습니까?”
“그게 뭔가 될 것 같기도 한데……. 아직 확실한 감이 안 잡힙니다.”
“그래요. 꾸준히 훈련에만 매진하세요. 조만간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 네!”
서둘러 백호진을 돌려보낸 유민섭은 일단 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간 지 얼마나 됐다고 전화를 합니까? 그렇게 내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요?)
준혁의 장난스러운 말에 유민섭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또 무슨 일이라도?)
“방금 들었는데…….”
유민섭의 설명을 모두 들은 후 준혁이 대답했다.
(텐구 그 자식 아무래도…….)
“네. 이번에는 제가 타깃인 모양입니다.”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김준혁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 세계의 이목이 유민섭에게 몰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소문에 악의적인 내용이 조금 섞인다면?
준혁의 죽음을 유민섭의 책임으로 여론몰이를 할 수 있다.
(뭐,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짓을 벌이겠죠. 이건 뭐 내가 등장하기만 하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니까…….)
유민섭이 준혁의 말을 끊었다.
“아니요.”
(네?)
“준혁 씨는 그놈들 뒤통수 후려치려고 죽은 척하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러니 그냥 이대로 쭉 죽은 셈 치세요.”
(어쩌려고요?)
“하! 이것들 사람 잘못 건드렸어요.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나?”
(음, 뭐 그런 면도 있기는 한데……. 그렇다고 진짜 만만하게 보면 멍청한 거죠.)
유민섭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준혁 씨가 저를 그렇게 생각한다고요?”
(네. 이건 진짭니다. 저는 유 길드장 절대 만만하게 보지 않죠. 은근 성깔 있으시거든.)
“하하! 됐습니다. 아무튼 이건 제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만 끊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유민섭이 살기 어린 눈빛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