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49장. 자충수#1-
“뭐야?”
불쑥 들어오는 준혁의 모습에 린디웨가 깜짝 놀라 물었다.
일주일 전에 일본으로 날아간 준혁이었다.
그리고 준혁은 일일이 상황을 보고하거나 연락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린디웨로서는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치니 놀랄 수밖에.
마음 급한 준혁이 모든 설명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그럴 일이 좀 있었다.”
“그럴 일?”
“설명은 나중에. 내 용건부터 처리하자.”
“무슨 용건?”
“혹시 나 배면계에 좀 보내 줄 수 있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에 린디웨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배면계? 거길 왜?”
“필요한 게 있어서.”
“으음……. 지금 거기 상태가 신수 놈들은 있지도 않고, 영수급만 잔뜩 있을 텐데?”
“그거면 충분해.”
린디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준혁을 보았다.
준혁이 배면계에서 필요한 게 뭐가 있나 싶었다. 하지만 그런 자세한 설명을 준혁이 해 줄 리가 만무했다.
결국 답 듣기를 포기한 린디웨가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다.”
린디웨가 손을 움직이자 준혁 앞에 하나의 게이트가 떠올랐다.
“게이트?”
“공간이나 차원계를 넘나들 때 이게 훨씬 편하거든.”
그 말에 준혁이 조금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명색이 배면계 시스템이 참 뭐 하는 짓인지…….”
“뭐 어때? 편한 게 제일이지.”
“그래, 뭐 그렇다고 치고. 돌아올 때는 어떻게?”
“말해.”
“응?”
“말하라고. 볼일 끝났다고.”
준혁이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허공에 대고 소리치라고?”
“어. 내가 지켜보고 있다가 바로 게이트 열어 줄게.”
“지켜봐? 흠, 그거 여전하네?”
“응?”
“관음.”
“야, 문 열어 주려고 지켜보는 거지! 관음이라니, 말 가려서…….”
하지만 준혁은 이미 게이트를 넘어 들어간 후였다.
린디웨는 잠시 억울한 표정으로 홀로 남은 게이트를 바라보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망할.”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관음은 아니지만, 준혁을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계속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현실 차원과 배면계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현실에서 한 시간 정도가 배면계에서는 꽤 긴 시간인 탓이다.
그렇게 린디웨의 의식도 준혁을 따라 배면계로 향했다.
***
‘5인 위원회’, 다섯 명의 던전 관리자가 자신들의 모임을 일컫는 말이었다. 줄여서 ‘위원회’라 부르는 편이었다.
그리고 위원회의 회의가 평소와 달리 격앙된 분위기였다.
「크하하! 다들 말이 없으시군요. 나의 업적을 인정하기가 싫습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옹졸해서야!」
정확하게는 은색 혼자 한껏 들떠 있었다.
그 감정을 대변하는 것인지, 은색의 게이트가 오늘따라 유독 크게 일렁였다.
금색이 꽤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확신할 수 있나? 만약 이 일이 잘못됐다면 우리가 역으로 당할지도 모를 일이야.」
「타인의 성과를 인정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때 놈의 표정을 보지 못했으니 그런 말을 하는 겁니다.」
청색 또한 금색을 거들었다.
「그래서 김준혁의 시체를 확인한 거야?」
「그것까지 확인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방법으로 김준혁을 죽였다는 건데?」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은색이 단호하게 거절의 의사를 나타냈다.
하지만 청색은 집요했다.
「어째 영 불안한데?」
「불안? 무엇이 불안합니까?」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한 얘기잖아. 멍청한 악당이 시체를 확인하지 않으면 주인공이 꼭 살아 돌아와서 복수하는 이야기.」
「뭣이! 지금 나를 멍청하다고 말한 겁니까?」
「흥! 멍청한 건 인정 못해도 악당인 건 인정하나 봐?」
「당장 그 말 취소…….」
분위기가 사납게 돌변하자 평소처럼 금색이 중재에 나섰다.
「쓸데없는 말싸움에 뭐 그리들 시간 낭비야? 다들 조용히 하고. 일단은 혼원 길드 쪽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해. 김준혁이 진짜 죽었다면 뭔가 움직임이…….」
은색이 이번에는 금색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혼원 길드 놈들도 이제 정신없어질 텐데, 김준혁의 죽음과 관련해 움직일 정신이 있겠습니까?」
「무슨 말이야? 거기에도 따로 손을 써 놨다는 건가?」
「물론이지요. 김준혁과 한패였던 놈들을 가만 둘 수 없습니다.」
다섯 개의 게이트만 덩그러니 떠 있는 공간에 기묘한 침묵이 맴돌았다.
금색이 서둘러 말했다.
「그래. 마무리를 확실하게 하는 것도 좋지.」
어쩐 일인지 다른 이들도 이번에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조하고 나서는 이도 있었다.
「좋은 생각이오. 싹을 완전히 자르는 것이 좋소.」
「그건 나도 같은 생각. 오랜만에 기특한 일도 하네?」
「맞아요. 괜히 후환을 남겨 둘 필요는 없죠.」
그 분위기에 한껏 기분이 올라간 은색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이제야 나의 진가를 인정해 주는 겁니까? 확실한 마무리가 뭔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회의를 마무리하고 각각의 게이트에서 빛이 꺼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청색과 녹색이 남아서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 정도로 멍청한 것도 재능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죠. 개인도 아니고, 집단을 건드리면 자기 정체가 드러날 위험도 있다는 걸 생각도 못하네요.」
「우리야 고마운 일이지. 저렇게 멍청한 작자도 있어야 재미가 있는 거 아니겠어?」
은색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녹색이 이내 자신들의 진짜 화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지난번 광화문에서의 일은 어떻게 된 거죠?」
「그건 내가 해야 할 질문인 것 같은데? 나오지 않은 건 녹색 너였잖아?」
「무리를 잔뜩 끌고 나오면 어쩌자는 건가요?」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혼자 나갔어.」
「그럼 그날 그 주변에 잔뜩 모여 있던 각성자들은 어떻게 설명할 건가요?」
「당연히 네 수하들이었겠지.」
「아뇨. 저는 혼자 나갔어요.」
「하, 이런 식으로 우기는 건가? 이거 우리 둘이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도 고민해 봐야겠는데? 이렇게 신뢰가 없어서야…….」
녹색이 빠르게 청색의 말을 끊었다.
「정말 혼자 나왔나요?」
「거짓말할 이유가 있을까?」
「당신과 나의 말이 다 맞는다는 가정을 한다면 가능성은 하나죠.」
「가능성?」
「제3의 인물.」
잠깐 침묵이 흐른 후 대화가 이어졌다.
「제3의 인물이라? 우리 대화를 알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
「어디까지나 우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하는 말이에요. 여전히 당신의 말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아요.」
「이런 상태로 일을 진행할 수는 없지. 좋아. 다음번 만날 때까지 방법을 고민해 보자고.」
「좋아요.」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된 후, 모든 게이트에서 불이 꺼졌다.
***
“미스터 스미스.”
로건 베런즈가 5인 위원회의 회의를 마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스미스를 호출하는 것이었다.
잠시 후, 노크와 함께 스미스가 방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치프.”
“현재 상황 브리핑해 주세요.”
정자세를 잡은 스미스가 설명을 시작했다.
“네. 현재 당시의 터널 게이트를 주변으로 조사 및 수색을 완료했습니다. 범위를 터널을 중심으로 20킬로미터까지 넓혔습니다. 김준혁의 종적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해당 범위 안에서 기준치 이상의 방사능이 측정된 곳은 없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기준은 과거 일본 정부가 높였던 그 수치가 아닌, 세계적으로 사용하는 일반적인 기준치입니다.”
“그렇군요. 게이트 안에서 김준혁과 함께 있던 두 일본인은요?”
“신원이 확인된 자는 김준혁이 일본으로 넘어올 때 동행한 이시이 카게루입니다. 이시이 카게루는 원래 묵었던 호텔에 묵고 있으며, 터널 게이트에서 조우한 헌터도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오늘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상한 일?”
“네. 이시이 카게루가 하는 일을 조사하려고 접근했던 요원이 갑자기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그 말에 로건 베런즈가 미간에 깊은 주름을 접었다.
“역시 은색 놈은 멍청하군요.”
“네?”
“김준혁은 살아 있습니다.”
스미스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김준혁과 관계된 일이었군요. 한 번 더 시도해 보고 같은 일이 일어나면 보고드릴 예정이었습니다만…….”
로건 베런즈가 이끄는 무명회 회원들은 모두 배면계 귀환자였다.
이시이 카게루에게 접근한 이는 그중에서도 암살 계열이었다.
배면계 관련자가 아니면 절대 존재를 알아챌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 사람이 당했다면 당연히 김준혁의 영향이라고 보아야 했다.
로건 베런즈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그쪽은 철수하세요. 우리는 이제부터 한국을 주시합니다.”
“한국이요?”
“은색, 이 멍청한 놈이 혼원 길드를 공격하겠다고 했거든요. 우리는 그 뒤를 파서 은색을 찾아 올라가면 됩니다.”
스미스가 두 눈 가득 의문을 품은 채 물었다.
“혼원 길드를 공격한다고요?”
“그러겠다더군요.”
“혼원 길드의 마스터 유가 그리 만만한 사람은 아닐 텐데요?”
“그러니 멍청하다는 거죠. 유민섭의 대응에 놈들이 흔들리다 보면 부스러기가 떨어질 겁니다. 우리는 그걸 찾아 올라갑니다. 당장 준비하세요. 나도 다시 한국으로 넘어갑니다.”
“네. 준비하겠습니다.”
***
린디웨의 방에 게이트가 열리고, 그곳에서 준혁이 불쑥 튀어나왔다.
“후우!”
준혁이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망할 배면계! 내가 거길 또 가다니! 그쪽으로는 오줌도 안 쌀 거라고 했는데!”
준혁의 구시렁거림에 린디웨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배면계 시스템 앞에서 말 참 예쁘게 하시네?”
“납치나 하면서 되게 당당하네?”
“하, 됐다. 얘기를 말아야지. 그런데 그 부산물들은 왜?”
지금 준혁의 인벤토리에는 배면계 영수급 괴물들의 부산물이 잔뜩 쌓여 있었다.
준혁이 배면계에 있는 동안 꾸준히 지켜보았기에 린디웨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장비가 다 날아갔다.”
“응?”
“뭐, 그럴 일이 있어.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손을 흔든 준혁은 또다시 흑호를 불렀다.
그리고 이번에 향한 곳은 준혁의 개인 창고.
정확하게는 유민섭이 마련해 준 거대한 금고였다.
골드 드래곤의 레어와 다른 던전에서 모은 재료들을 몽땅 보관해 놓은 곳이었다.
잠실에서 잡은 영수의 부산물도 이곳에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준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 이것도 갖다 놨네?”
준혁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몇 개의 드래곤 하트가 있었다.
원래 준혁의 몫이었던 카이르무스의 드래곤 하트가 아닌, 종로 게이트 사태 당시에 준혁이 잡은 드래곤의 심장이었다.
당시 적사가 이리저리 괴물 사체를 삼켜 대기는 했었지만, 몇 개 삼키지 않았을 때 준혁이 못하게 했었다.
그걸 떠나, 아무리 적사가 뱀이고 거대해졌다 해도 넙죽 집어삼키기에 드래곤의 사체는 너무 컸다.
‘묵린갑, 묵룡삭, 묵룡비, 그리고 또…….’
드래곤 하트를 사용할 곳을 정리하던 준혁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처음 드래곤 하트를 얻었을 때 금문묵룡비와 금문묵룡삭을 만드는 데 사용했었다.
지금 돌이켜 보니, 당시 던전 쪽 재료를 다듬었는데 배면계의 스킬인 ‘융합’의 적용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당시에는 아무런 이상함도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자연스럽다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에 이미 시스템 융합이 꽤 진행된 덕분이었나 보네.’
영력의 봉인이 풀린 것도 로건 베런즈가 시스템 융합을 진행하는 과정에 일어난 일이었다.
로건 베런즈가 그런 시도를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 참 많았다.
그리고 그 시도 때문에 준혁이 놈의 계획을 막으려 한다.
‘세상 일 참 알 수 없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준혁이 바닥에 털썩 자리를 깔고 앉았다.
어떤 물건이든, 물건을 만드는 일의 시작은 재료를 준비하는 것이다.
준혁은 사방에 쌓인 재료들을 하나하나 다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