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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장. 랜딩#3-
터널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오래된 데다 통행량도 많지 않은 탓인지 상태가 좋지 않았다.
천장의 조명조차 관리하지 않아 제대로 불이 들어온 것도 몇 개 없을 정도였다.
준혁이 그 터널의 절반을 지나는 순간이었다.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위화감이 신경을 자극했다.
게이트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게이트와는 전혀 다른 게이트였다.
일반적인 게이트는 푸른빛이 은은하게 소용돌이치는 모양이고, 넘어가면 전혀 다른 환경이 나온다.
크기 또한 위아래가 2미터 정도인 타원형이다.
하지만 이 게이트는 다르다.
터널의 단면 자체가 게이트인 거대한 크기다.
푸른빛이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 아예 투명해서 맞은편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결정적으로, 게이트를 넘어간 직후의 환경이 변하지 않았다.
이시이 카게루가 탄 차가 여전히 도로를 따라 달리고 있을 정도다.
준혁도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을 정도로 감쪽같은 함정이었다.
헌터들도 S급 이상이 아니면 조금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귀에 끼고 있던 통신기는 이미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고, 이시이 카게루가 타고 있던 차량 또한 끝부분부터 바스러져 흩어지고 있었다.
“어, 어어!”
뒤늦게 이상함을 느낀 이시이 카게루의 당혹성이 들렸다.
‘멍청한 놈.’
반응을 보아하니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물론 준혁은 이미 ‘예지’를 통해 이 광경도 보았다.
미리 본 광경에서 곧장 적이 들이닥치거나 위협적인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었다.
다만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나기는 했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 준혁은 이시이 카게루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사이 차가 완전히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이시이 카게루는 볼썽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그와 동시에 차를 운전하던 기사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짧은 칼을 꺼내 휘둘렀다.
운전기사로 위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헌터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을 알고 있는 준혁이 먼저 움직였다.
손짓에 따라 날아간 금문묵룡삭이 운전기사를 꽁꽁 묶었다.
그리고 시간차가 거의 없이 준혁이 도착해 놈의 턱을 잡고 입을 벌렸다.
“끄어, 끄어억!”
놈이 뭐라고 말을 하려 하지만 억지로 턱이 벌린 채라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놈의 입 속을 살피던 준혁이 불쑥 손을 넣었다가 꺼냈다.
으드드득!
“끄으으윽!”
운전기사가 고통에 비명을 질러 대며 온몸을 마구 떨었다.
독단이 붙어 있는 놈의 어금니를 생으로 뽑아 버린 탓이었다.
“아무튼 이것들은 하나같이 자살 못해서 안달이네.”
‘예지’를 통해 본 장면에서는, 운전기사가 이시이 카게루를 죽인 후 독단을 깨물어 자살했었다.
그 일을 사전에 막은 것이다.
놈을 놓아준 준혁이 손가락을 까딱하자 금문묵룡삭이 놈의 입을 가로로 동여매 재갈을 물려 버렸다.
“끄에엑!”
벌어진 입 사이로 피가 철철 흘렀지만 준혁은 신경도 쓰지 않고 이시이 카게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미리 본 광경에서 가장 이상한 점은 다른 데 있었기 때문이다.
운전기사에게 죽은 이시이 카게루의 시체가 멀쩡했다.
던전 안이라도 인간의 몸은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으니 그 자체는 이상함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시이 카게루가 입고 있는 옷이 멀쩡하다는 게 이상했다.
정상적이라면 이시이 카게루가 입고 있는 옷은 가루가 되어야 하니까.
“뭐, 뭡니까? 이건?”
이시이 카게루가 멍청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긴? 넌 미끼의 역할을 다한 거지.”
“네? 저는 아직…….”
“내 미끼 말고, 저쪽 미끼. 서천회라는 너희 조직의 미끼.”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만?”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도 준혁이 모든 내용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이시이 카게루였다.
“쯧! 눈치 없는 건 약도 없지.”
“네?”
이시이 카게루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흑호!”
준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몸을 숨기고 있던 흑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허어어엉!
눈치 빠르게 소형화를 푼, 거대한 호랑이의 모습으로 우렁찬 포효까지 내뱉었다.
“으어어억!”
흑호를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었지만, 거대한 호랑이가 코앞에서 입을 쩍 벌리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공포 그 자체다.
“아, 이 새끼! 지렸네.”
코를 찌르는 지린내에 준혁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실제로 이시이 카게루의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장난치지 말고, 저놈 감시하고 있어라.”
흑호가 김샜다는 듯 금문묵룡삭에 묶여 있는 운전기사에게 어슬렁거리며 다가갔다.
이시이 카게루는 혼이 나간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느새 상황 파악이 됐는지 멍하니 준혁을 쳐다보았다.
“설마 모두 보고 있었던 겁니까?”
“그럼 내가 보험도 없이 널 그냥 놔뒀겠냐?”
“음흉한 쵸…….”
빠악, 쿵!
가볍게 날린 준혁의 주먹에 이시이 카게루의 몸뚱이가 격렬하게 바닥을 굴렀다.
“한 번만 더 총총거렸다가는 평생 죽만 먹게 만들어 주지.”
“끄윽!”
“알아들었냐?”
“아, 알겠습니다!”
“그럼 하나 묻자. 너 왜 옷이 멀쩡하냐?”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여기 던전이잖아.”
“던전? 여기가요?”
“차 바스러지는 것 보고도 모르냐?”
“그렇군요. 던전, 던전이라……. 그런데 옷이 멀쩡……. 음…….”
한참을 고민하던 이시이 카게루가 갑자기 뭔가에 생각이 닿은 듯 제 손을 불쑥 내밀었다.
“이 반지. 반지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호텔 방에서 자유를 준 첫날 저 반지를 꺼내 꼈었다.
“이게 뭔데?”
“그러니까……. 던전이나 헌터와 관련한 모든 것을 차단해 주는 효과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름은 ‘고립의 반지’라는 것으로 조직에서 준 아이템입니다.”
“흐음, 그래?”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조직에서 버려진 것이 되었습니까?”
“그 정도는 니가 알아서 판단해야 할 것 같지 않냐?”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준혁이 흑호를 향해 말했다.
“교대.”
흑호가 냉큼 방향을 틀어 이시이 카게루에게 껑충 뛰어갔다.
크허어어엉!
“으아아악!”
흑호의 포효에 이시이 카게루가 자지러질 듯 비명을 질러 댄다.
아무리 봐도 흑호는 저놈을 놀리는 데 재미를 붙인 모습이었다.
한 소리 할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냥 오랜만에 좀 풀어 주는 것도 좋겠다 싶어 그냥 두기로 했다.
준혁은 도깨비 보따리에서 구련환을 꺼내 운전기사의 목에 채웠다.
금문묵룡삭의 용언을 이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신문을 할 때는 구련환이 더 편했다.
잠깐 구련환이 효과를 발휘하는 과정이 끝나고, 준혁이 질문했다.
“자, 이 게이트에 대해서 말해 봐.”
“모릅니다.”
“응?”
“제가 받은 명령은 첫째, 당신을 이곳으로 유인하는 것. 둘째, 이시이 카게루를 제거한 후 자결하는 것입니다.”
“하아!”
준혁은 저도 모르게 격한 한숨을 뱉었다.
“이 새끼들은 정신머리가…….”
모든 일이 자살로 귀결되는 놈들이랑 싸운다는 생각을 하니 왠지 모르게 한숨부터 나왔다.
준혁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게이트 쪽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나가는 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게이트가 있던 터널 중간에 마치 투명한 벽이 가로막고 있는 듯했다.
쾅, 콰콰쾅!
주먹으로 두드리고, 무상곤으로 때리고, 술법까지 동원해 보았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들어왔던 게이트로는 못 나가는 것 같고, 일단 가던 길을 가 볼까?’
상황만 따지면 게이트에 갇힌 것 같지만 준혁에게는 흑호가 있었다.
흑호의 ‘도약’으로 이곳을 빠져나가는 건 언제든 가능했다.
하지만 이 게이트는 일반적인 게이트와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무언가 놈들에 대한 단서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
“흑호, 이리 와.”
준혁의 부름에 흑호가 껑충 점프해 그 앞에 착지했다.
그리고 준혁은 냉큼 흑호의 등에 올라탔다.
크헝, 크허어엉!
흑호가 갑작스레 고개를 뒤흔들며 격렬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청랑과 달리 등에 준혁을 태우는 걸 이상하게 싫어하는 흑호였다.
하지만 지금 청랑을 부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얌전히 태우고 가자. 응?”
스산한 준혁의 목소리에 흑호가 대번에 얌전해지며 터벅터벅 걸음을 옮긴다.
“따라와.”
준혁의 말에 구련환에 제압당한 운전기사와 이시이 카게루가 서둘려 옆으로 따라붙었다.
“근데 넌 이름이 뭐냐?”
“마츠다 오가(松田 大翔)입니다.”
“알았다. 가자.”
“네!”
흑호를 탄 준혁이 앞장서고, 그 뒤로 마츠다 오가와 이시이 카게루가 따라 걸었다.
“네놈이 건방지게 날 죽이려 했단 말이지?”
이시이 카게루가 인상을 구긴 채 마츠다 오가에게 으르렁거렸다.
거듭 말하지만, 구련환은 이지(理智)를 제압하지 않는다. 그저 육체의 움직임을 제압할 뿐이다.
그러니 준혁이 관여하지 않으면 저런 식으로 자유로운 움직임이 가능하다.
“상부의 명령이었소.”
“신뢰 따위 없는 놈들!”
“당신도 서천회의 일원이지 않소? 조직이 그렇게 결정했다면 명예로운 죽음을 택해야 하는 것이 옳소!”
“내가 조직에 얼마나 헌신했는지 네놈이 아느냔 말이다!”
“그 정도 마음으로 조직에 투신했던 것이오?”
말싸움이 격렬해지자 준혁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병신들, 지랄하네. 그냥 닥치고 따라와라.”
“넵!”
“하이!”
‘이제 슬슬 본 게임 시작인가?’
30분 정도 이동하자 마침내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다.
일본의 시골과 같던 주변 풍경이 칼로 자른 듯 끝이 나고, 난데없는 협곡이 나타났다.
폭이 1.5미터 정도에 불과한 좁은 길 좌우로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 하늘을 뚫을 기세로 솟구쳐 있었다.
‘역시 그냥 게이트 너머에 가두는 것으로 끝나지 않네.’
딱 봐도 함정이라고 외치는 풍경이었다.
‘어디 한 번 볼까? 예지.’
혹시나 싶어 ‘예지’를 펼쳤다. 하지만.
[재사용까지 대기 시간이 23시간 20분 남았습니다.]
‘음?’
스킬 설명에도 없던 쿨타임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23시간 20분? 대략 하루에 한 번 정도 쓸 수 있겠네?’
예지를 사용하지 못해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좌우는 깎아지른 암벽이고, 갈 수 있는 길은 좁은 협곡 하나, 되돌아갈 길은 없었다.
물론 준혁은 그 의도대로 움직여 줄 생각이 없었다.
게이트에 들어온 것은 혹시나 모를 단서를 잡기 위해서였지만, 이런 것까지 일일이 당해 줄 마음은 없었다.
준혁은 흑호의 등에서 내려 협곡의 입구가 아닌, 그 옆의 반듯한 암벽을 마주 보고 섰다.
“흑호야, 저 새끼들 끌고 와.”
대답을 듣기도 전에 준혁은 ‘천천’을 펼쳤다.
쉐에에엑!
수직으로 쏘아 올린 로켓처럼 솟구친 준혁의 신형이 순식간에 구름이 떠 있는 높이에 도달했다.
그런데 아직도 암벽은 끝이 나지 않았다.
탁!
암벽을 가볍게 발로 찬 후 또 한 번 ‘천천’을 펼친다.
그리고 절반쯤 솟구쳤을 때, 마침내 암벽이 끝났다.
그리고 준혁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저 멀리, 협곡의 출구쯤으로 보이는 반대쪽 끝 편의 암벽 위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준혁은 소리도 없이 암벽 위에 내려섰다.
인위적으로 만든 공간인지, 암벽 위는 거대한 암석을 가로로 평평하게 잘라 놓은 듯한 모양이었다.
‘관찰.’
거의 1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데도 ‘관찰’ 스킬이 적용되었다.
하지만 떠오른 정보가 이상했다.
[?]
[?], [?]
[상태창]
근력:[?] 순발력:[?]
지구력:[?] 감각:[?]
마나:[?]
‘뭐지?’
이름과 클래스, 그리고 모든 스탯이 ‘?’로 보였다.
‘관찰’로 확인할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저런 정보로도 한 가지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클래스가 표시되어야 할 부분이 다른 헌터와 달랐다.
클래스 항목이 두 개였다.
게다가 ‘관찰’로 볼 수 없는 스탯과 이름.
이게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던전 관리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준혁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찾았다, 개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