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받고 각성 더!-125화 (125/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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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장. 랜딩#2-

“멍청한 춍 같으니라고!”

이시이 카게루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걸렸다.

일본으로 귀국한 지 벌써 일주일째였다.

그동안 이시이 카게루는 호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상부와의 접촉을 위해서였다.

상급자에게 면담을 요청하는 신호를 보냈고, 지금은 그 답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가 속한 서천회는 음지에서 활동하는 은밀한 집단이었다.

이런 단체들은 공통으로 편집증적인 조심성을 갖고 있다.

일주일이나 흘렀는데도 이시이 카게루에게 연락이 오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였다.

“이 정도도 생각을 못한단 말인가? 매사에 급하고 감정적인 놈들이라 어쩔 수 없구만!”

이시이 카게루는 그렇게 독백을 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매만졌다.

‘고립의 반지’.

그것은 반지 형태를 띤 아티팩트였다.

던전, 그리고 각성자와 관련한 초월적인 현상을 차단해 주는 아이템으로 서천회에서 중간 관리자급 이상에게 지급하는 물건이었다.

‘효과 좋군.’

이시이 카게루는 손목에 채워진 구련환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멍청한 춍은 이것만 믿고 있겠지만……. 크흐흐! 소용없다, 춍 녀석.’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팔찌는 이상한 물건이었다.

머릿속으로는 절대 아니라고 하는데, 몸이 놈에게 복종하게 만드는 치가 떨리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고립의 반지를 착용한 이후 그 효과가 완전히 사라졌다.

일주일 전 그가 상부에 보낸 신호는, 사실은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신호였다.

조직 전체에 경보를 발동한 것이었다.

그것으로 고립의 반지의 성능은 확인되었다.

만약 이 팔찌의 효과가 계속 작용하고 있었다면, 경보 발동을 하려 할 때 몸이 먼저 거부했으리라.

‘몸이 꽤 달았을 테니 슬슬 진행되는 것도 보여 줘야겠지?’

안 그러면 저 성질 급한 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휴대폰을 꺼내 잠겨 있던 모드를 풀고 몇 번의 인증 절차를 거친 후 숨겨 놓았던 메신저 앱을 열었다.

「CAC82A1:상황을 알고 싶습니다.」

‘CAC82A1’은 이시이 카게루가 서천회 내부에서 부여받은 고유 코드였다.

「A81C4:잠은 잘 잤는가?」

「CAC82A1:배가 고픕니다.」

「A81C4:저녁 식사는 술이 좋겠군.」

「CAC82A1:사케는 사양합니다.」

메신저로 몇 번의 뜬금없는 대화가 오고 갔다.

이 역시 본인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인증 절차였다.

그렇게 신중한 검토 후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CAC82A1:현재 김준혁은 같은 호텔에 방을 잡고 저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A81C4:이런 대화가 괜찮나?」

「CAC82A1: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립의 반지를 끼고 있습니다.」

「A81C4:그렇군. 임무를 하달하겠다.」

「CAC82A1:네.」

메신저 대화를 이어 가는 이시이 카게루의 입가에 한층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멍청한 춍 자식! 그때의 치욕은 반드시 갚아 주마!”

배면계 각성자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기술인 ‘영화’는 매우 뛰어난 통역기다.

시간의 오차조차 거의 제로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성능을 자랑한다.

만약 ‘영화’의 성능을 구현한 통역기가 개발된다면 세계의 언어 장벽을 단번에 무너트릴 것이다.

이 ‘영화’의 뛰어난 점은 대화를 나누는 양자 간의 문화적 특성, 언어의 발전 방향, 지역적 특성까지 모두 고려해서 통역해 준다는 점이었다.

보통 통역이나 번역을 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 말끔하게 해소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해의 여지없이 상대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있다.

심지어 욕이나 은어, 비속어조차 통역할 수 있었다.

정확한 대치어가 있는 것은 대치를 하지만, 그것이 없는 경우에는 원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대신 그 속에 깃든 감정을 명확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 준다.

지금 이시이 카게루가 거듭 중얼거리는 ‘춍’이라는 말이 그렇다.

준혁은 ‘춍’이라는, 한국인에 대한 멸칭이 가지는 뉘앙스까지 그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당연히 준혁으로서는 빡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이 새끼가 자꾸 춍춍거리네?’

이시이 카게루는 모르지만 준혁은 흑호를 통해 그의 모든 행동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시이 카게루가 흑호를 본 것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도약’으로 끌려왔을 때 딱 한 번이었다.

그러니 흑호의 은신 능력도, 흑호가 자신을 24시간 밀착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길이 없었다.

구련환이 작동을 안 한 것도 준혁이 풀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첫날, 호텔 방에 들어가자마자 반지를 하나 꺼내 끼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무슨 짓을 하는지 보려고 구련환의 제약을 풀어 놓았다.

그랬더니 일주일 만에 뭔가 일을 꾸미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준혁은 일본어와 일본 글자를 모른다.

‘영화’는 입에서 나오는 ‘말’을 통역하지, ‘글자’를 번역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흑호를 통해 메신저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지만 내용은 조금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내용 따위 몰라도 상관없었다. 아마 함정을 파고 있으리라.

‘미끼가 피아식별이 가능하면 그게 어떻게 미끼겠냐.’

준혁이 던진 미끼가, 오히려 준혁을 잡는 미끼가 되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꼴이 너무 우스웠다.

‘이 새끼들은 제 놈들만 똑똑한 줄 안다니까?’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준혁이 통신기를 켜 말을 걸었다.

“아직 연락 없냐?”

(아, 마침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 너도 의심받을 텐데?”

(물론입니다. 하지만 준혁 님께서 기다려 주신 덕분에 어느 정도 의심이 풀렸습니다.)

“뭐라고 말했는데?”

(임무는 실패했고, 역으로 잡혀갔었다. 하지만 함께 끌려간 조직원들의 헌신으로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잘했네. 그럼 이제 어떻게?”

(아직 조금 더 기다려야 합니다.)

“알았다. 잘해라. 응?”

(넵! 맡겨만 주십시오!)

계속 이렇게 속아 넘어가는 척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저 멍청한 놈이 더욱 기고만장해질 테니까.

“빌어먹을 조센징!”

물론 흑호를 통해서 보는 저 거슬리는 꼴을 참아 줘야 한다는 게 문제기는 했다.

준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창 쪽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어휴, 너희도 참 고생이다.”

호텔과 꽤 거리가 떨어진 건물에 10여 명의 남자가 모여 있는 사무실이 있었다.

호텔과 해당 건물 사이에 여러 채의 건물이 서 있었지만, 준혁의 방이 거의 최상층에 있기에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어 육안으로 확인이 되는 장소였다.

준혁을 감시하는 놈들이었다.

놈들이 움직인 첫날부터 준혁은 그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로건 베런즈의 무명회가 들러붙을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놈들의 위치까지 특정해서 알 방법은 없기 때문이었다.

무명회 놈들은 모두 배면계 귀환자들이니, 영력이 감지되면 그때 반응을 보이면 되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쪽이 신경 쓰였다. 특별히 어떤 징후가 있거나 시선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던 게 아니었다.

단순한 ‘느낌’이었다.

지천급, S1급이 되면서 얻는 육감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쪽이 뭔가 이상한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슬쩍 살펴보니 놈들의 행동이 이상했다.

사무실 직원인 척 행동하고 있는데 조금도 사무를 보지 않았다.

그래서 이시이 카게루가 잠든 틈을 타서 흑호를 보내 놈들의 정체를 파악한 것이었다.

흑호를 시켜 ‘표식’을 달아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처음 느꼈던 그 느낌, 그 촉은 어쩌면 두 번째 각성의 영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찰자’라는 클래스를 얻으면서 얻게 되는 아주 초월적인 무언가가 작용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근데 그 자식이 안 보이네?’

다만 한 가지 신경이 쓰이는 것은 로건 베런즈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분명 일본에 있을 텐데?’

그때 귓속 통신기에서 이시이 카게루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혁 님, 상부와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어떻게 됐냐?”

(상부에서 사안이 심각하다고 여기고 저와 직접 면담을 하겠다고 합니다. 30분 후에 호텔 앞으로 차를 보내겠답니다.)

“좋아. 안 들키게 잘해라.”

(네. 맡겨 주십시오!)

씩씩하게 대답한 후 입가에 비웃음을 매달은 모습이 흑호를 통해 선명하게 보였다.

‘즐길 수 있을 때 즐겨라.’

***

이시이 카게루를 태운 고급 세단은 도쿄를 벗어난 후로도 한참을 쉬지 않고 달렸다.

-야, 보고해라.

이시이 카게루는 머릿속에서 울리는 준혁의 목소리에 와락 인상을 구겼다.

하지만 차량에 탑승하는 동시에 전파 방해로 통신기를 쓸 수 없었다. 연락을 주고받을 방법은 이것뿐이니 어쩔 수 없는 일.

-따라오고 계십니까?

-물론이지.

-잠시 후, 지방도로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10킬로미터를 더 가면 일단 지역 본부로 이동합니다.

-지역 본부?

진짜 목소리가 아닌 머릿속으로 스며드는 ‘생각’일 뿐인데도 목소리에 날카롭게 날이 서 있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이시이 카게루가 황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어쩔 수 없습니다. 저의 보안 등급으로는 여기까지가 한계입니다. 조직에서는 너무 쉽게 수뇌부에 닿으면 의심받을 수 있으니 이 정도가 적당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생각되어집니다.

-생각이 되어지는 건 뭐냐? 그냥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면 될걸.

-죄, 죄송합니다.

-됐다. 아무튼 똑바로 해라.

그 말을 끝으로 머리가 약간 묵직하던 느낌이 사라졌다.

이시이 카게루는 일반인이었지만, 준혁이 하도 ‘감응’을 사용한 탓에 그 순간의 느낌을 인지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더러운 센징, 이 길이 네놈의 저승길이 될 것이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이시이 카게루의 뒤편.

세단의 뒷좌석 머리 뒤, 뒤쪽 창문 사이의 좁은 공간에 소형화한 흑호가 식빵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물론 은신을 한 채였다.

그리고 준혁은 두 발로 달려 이시이 카게루가 탄 차량을 쫓고 있었다.

‘어우, 이 자식은 뭐 이렇게 독백을 많이 해? 연기하냐? 아니면 그 나이에 중2병?’

돋아나는 닭살을 간간이 털어 주며 여유롭게 뛰었다.

차는 어느새 왕복 2차선의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고 사위가 어둑해질 무렵, 차도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양도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해가 완전히 넘어간 후, 가로등도 없는 도로에는 이시이 카게루가 탄 차의 전조등 불빛만이 유일한 빛이 되었다.

이상한 ‘촉’이 찾아온 것도 그때였다.

‘뭐지?’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은 무명회의 감시자들을 찾았을 때와는 또 다른 형태였다.

특별히 어딘가가 의심스럽다기보다는 다가올 위험을 알려 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 이럴 때 쓰는 거지.’

준혁은 곧바로 스킬을 펼쳤다.

‘예지.’

순간 준혁의 머릿속에 지금 순간부터 10분 후의 미래가 마치 주마등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10분 동안 일어날 일을 본 것이지만, 실제로 그것을 보는 데 걸린 시간은 찰나.

그리고 준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 준비한 함정이 겨우 그 정도?’

너무 가소로워 웃음도 나지 않았다.

때마침 자동차가 터널로 들어서고 있었다.

준혁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함정이 준비된 터널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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