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45장. 서천회#1-
『갑자기 건물이 무너집니다. 사라진 건물 대신 서 있는 건 게이트 안에서나 볼 수 있다는 무서운 괴물, 드래곤입니다. 하나가 아닙니다. 연이어 여러 마리의 드래곤이 나타난 것은 물론 또 다른 괴물들도 등장합니다. 불과 2시간 전 종로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TV 화면에는 난장판이 된 도심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곁들여 흘러나오는 기자의 목소리도 심각하게 떨리고 있었다.
뉴스의 한 꼭지가 끝난 후 등장한 앵커가 정면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재앙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다행스러운 점은 사상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인데요. 여기에는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혼원 길드의 빠른 대처가 있었습니다. 이진경 기자가 현장에 나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누군가 휴대폰으로 촬영한 듯한 영상이 흘러나왔다.
게이트용 아이템을 온몸에 착용한 헌터들이 튀어나와 사람들을 대피시킨다.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과 무언가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음, 사람들의 비명이 배경에 깔리고, 그 위에 헌터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괴물 사태 당시 현장에 있던 시민이 휴대폰으로 촬영한 영상입니다. 당황하는 일반 시민들을 보호하고 대피를 돕는 이들은 대한민국의 무훈 길드, 백호 길드, 미국의 팀 히어로 소속 헌터들입니다. 세계 굴지의 헌터 길드답게 당황하지 않고 신속하게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또 다른 화면이 나왔는데, 이번에는 사람들을 덮치는 괴물을 막아서고 공격하는 헌터들의 모습이었다.
『이 헌터들이 때마침 혼원 길드에 있었던 이유는, 혼원 길드에서 실시한 헌터 트레이닝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러운 사태를 생각하면…….』
핏!
갑자기 TV 화면이 꺼졌다.
“칙쇼!”
누군가 짓씹듯 뱉어 낸 욕설이 고요한 공간에 울려 퍼진다.
“하필이면…….”
소파에 앉아 까맣게 암전된 TV 화면을 노려보는 이는 매끈한 정장을 차려입은 40대 장년의 남자였다.
남자는 슬쩍 시간을 확인한 후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연락이 올 때가 됐…….”
와장창!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리로 된 전면 벽이 터져 나가며 그림자 하나가 득달같이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끅!”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눈 깜짝할 새 사지를 제압당한 남자가 두 눈을 크게 떴다.
갑작스레 온몸이 황금색의 밧줄에 묶인 남자의 휘둥그레진 두 눈에 한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이랏샤이마세!”
뜬금없는 말을 던진 남자는 다름 아닌 준혁이었다.
“지금 뭐라는 겁니까?”
당황한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들이닥쳐 공격해 놓고 뜬금없는 환영 인사는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어? 이거 아닌가? 내가 빌어먹을 일본 놈 말 따위 알 게 뭐야! 씨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놓고, 혼자 화를 낸다.
게다가 일본어 따위 알 게 뭐냐고 말하는데, 남자의 귀에 들리는 준혁의 말은 아주 유창한 일본어였다.
물론 준혁의 ‘영화’가 만들어 낸 동시 통역 효과였다.
뒤늦게 준혁의 얼굴을 알아본 남자가 기겁한 표정으로 외쳤다.
“다, 당신은 김준혁?”
“그래. 내가 김준혁이지.”
“왜 이러십니까?”
“모르냐?”
“무, 무슨 말씀이신지…….”
“그럼 알게 해 줘야지. 흑호!”
준혁의 외침이 끝나는 동시에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거대한, 그리고 새까만 털을 가진 호랑이 한 마리.
소리도 없이 등장한 흑호가 그대로 겅중 뛰어올라 준혁과 남자를 덮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남자는 자신이 생전 처음 보는 장소에 자빠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 여기는?”
“질문이 틀렸어.”
“네?”
남자가 준혁의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준혁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맞은편을 가리켰다.
“질문도 틀렸고, 방향도 틀렸다. 저쪽 봐.”
남자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리고 무언가를 확인한 남자의 두 눈에 짙은 그늘이 내려앉았다.
“칙쇼!”
버럭 욕을 내뱉는 동시에 입을 크게 벌렸다가 온 힘을 다해 턱을 다물었다.
텁!
하지만 이빨 사이에 뭔가 뭉툭한 것이 끼어드는 바람에 턱을 제대로 다물지 못했다.
“병신아, 욕하기 전에 독단부터 깨물었어야지.”
희번덕거리며 움직인 남자의 눈동자가 준혁에게로 향했다.
준혁이 입가에 잔뜩 비웃음을 매단 채 말을 이었다.
“이것들이 수틀린다 싶으면 일단 독부터 깨물고 보네?”
준혁의 맞은편에는 나란히 놓인 의자에 다섯 명의 남녀가 묶여 있었다.
남자가 욕을 뱉기 전 보았던 광경이기도 했다.
다섯 명 속에는 처음 이세연과 지유를 납치하려 했던 여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준혁은 여자에게서 시작해 한 단계씩 윗선의 인물들을 잡아들인 끝에, 방금 끌려온 남자 ‘이시이 카게루(石井 翔)’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준혁은 남자의 목에 구련환을 씌운 후 입을 열었다.
“네가 한국 지부장쯤 되는 놈이지?”
눈앞의 이시이 카게루는 ‘이시이 중공업’의 한국 지사장이며, 이시이 그룹의 오너 일가인 이시이가(家)의 셋째 아들이었다.
준혁이 직전까지 잡아들였던 이들은 대부분 그냥 ‘개인’이었다.
유학생 신분, 회사의 연구원, 여행객 정도의 위치였다.
그런데 갑자기 굵직한 기업의 지부장이 튀어나왔다.
게다가 지금까지는 모두 각성자였는데 이시이 카게루는 그냥 일반인이었다.
각성자를 수하로 거느린 일반인. 더불어 기업의 지부장이라는 사회적 위치.
이런 배경이라면 중간 책임자 정도는 된다고 보아야 했다.
“끄윽, 끄으으윽!”
구련환이 작용하면서 생기는 공통적인 부작용을 겪은 후, 이시이 카게루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준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훌륭하네. 너는 뭔가 좀 아는 게 있겠네. 그래, 일단 너희 그 멍청한 조직 이름부터 좀 들어 보자.”
앞서 끌고 왔던 다섯은 자신이 속한 조직의 이름조차 몰랐다.
하지만 관리자 정도의 위치면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서천회(曙天會).”
“서천회? 무슨 뜻이냐?”
“새벽……. 하늘…….”
“새벽하늘? 뭔 의미냐?”
“욱일(旭日)을 준비한다는 의미입니다.”
“욱일?”
준혁이 반사적으로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준혁은 한국인이었고, 한국인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반감부터 가질 수밖에 없는 단어가 튀어나온 탓이었다.
‘이거 설마?’
문득 몇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독도에 발생한 10급 게이트 공략을 두고 일본이 도발을 한 사건이 있었다.
심심하면 던지는 독도 망언의 하나였다.
일본 영토의 게이트를 왜 한국의 던전 관리청이 관리하느냐는 개소리를 했었다.
10급 게이트에서 채굴할 수 있는 자원이나 아이템의 가치가 높기 때문에 발생한 분쟁이었다.
일본 정부는 군사 행동도 불사하겠다며 일본 해상자위대까지 움직이는 유례없는 도발을 감행했었다.
한국 역시 해군 최강 전력인 제7기동전단을 독도 인근 해역으로 급파했다.
다행스럽게도 해상자위대가 한국의 영해를 침범하지는 않았지만, 작은 실수만 생겨도 전쟁으로 번지는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갔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한일 관계는 극단으로 치달았었다.
실질적인 무력 도발까지 감행했으니 당연한 전개였다.
그리고 그 당시에 한국 내에서 퍼지던 음모론 중 하나가 일본에 존재하는 비밀결사였다.
일본을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체제로 회귀시키려는 극우 성향의 비밀결사가 존재한다는 내용이었다.
TV 프로그램이나 개인 스트리머들이 수많은 음모론을 꺼내 떠드는 바람에 대한민국에 그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대한민국 해군과 일본의 해상자위대가 바다에서 대치하는 동안 독도에서는 몇 개의 길드가 연합해 빠르게 게이트를 공략했다.
최대한 빨리 게이트 공략을 마무리하기 위한 던전 관리청이 내놓은 해결책이었다.
대한민국 해군과 일본 해상자위대가 대치하는 긴장 상황은 게이트가 소멸될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던 음모론은 게이트 소멸 이후 거짓말처럼 힘을 잃고 사라졌었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뇌리에 극우 성향의 비밀결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욱일’이라는 자극적인 단어와 비밀스러운 조직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준혁도 자연스레 그 일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거……. 엮여도 엄청 더럽게 엮인 느낌인데?’
극우의 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조직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조직이 던전 관리자와 연관되어 있는 듯한 정황이 나타나고 있었다.
즉, 엄청난 힘을 가진 또라이를 상대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던전을 관리하는 힘을 지녔는데, 막후에서 일본 정부를 움직일 수 있는 권력까지 가진 놈들이었다.
보통 사람, 아니 높은 등급의 헌터라 해도 가질 수 없는 힘이었다.
‘하, 근데 가만 생각하니 빡치네?’
골치 아픈 건 아픈 거고, 화가 나는 건 또 다른 관점의 문제였다.
준혁이 이시이 카게루의 멱살을 잡아 허공에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래서 이세연과 김지유를 납치하려던 이유는 뭐냐?”
“자세한 이유는 모릅니다. 다만, 당신과 관계가 있다는 것밖에는.”
“그 정도는 지나가던 개도 짐작할 수 있거든? 가족 납치는 당연히 협박용일 거고, 그래서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준혁이 급히 말꼬리를 흐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하다 보니 뭐가 이상한데?’
무언가 일을 벌이려 했다면 진작 벌였어야 정상이다.
일본 내에서의 극우 성향은 기본적으로 과거 일본 제국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 집단이 상상도 못할, 던전 관리라는 힘을 손에 넣었다.
이미 크게 일을 벌였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별다른 일을 벌이지 않았다.
이는 함부로 일을 벌일 수 없는 제약이 있다는 뜻이다.
현재 준혁이 알고 있는 정보들을 바탕으로 생각하면, 그런 제약이 생길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다섯 명. 던전 관리자 놈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인데?’
다섯 명의 던전 관리자가 서로 협력 관계가 아닌 견제하는 관계라고 볼 수 있었다.
게이트를 발생시키는 일을 한 사람의 독단으로 처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종로에 생긴 게이트는?’
그 상황에 변화가 생겼다.
한국에 갑자기 게이트가 마구 생성되며, 거기에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무더기로 튀어나왔다.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다섯 명의 관리자가 합의했거나, 독단으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손에 넣었거나.’
준혁의 느낌으로는 전자였다.
지금까지 멀쩡히 돌아가던 다섯 명의 상호 견제 구조가 갑자기 무너지기는 힘들 것이다.
준혁의 상념은 자연스레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다섯 관리자가 합의하에 게이트를 한곳에 몰아넣을 만한 이유가 도대체…….’
한참을 궁리하던 준혁의 머릿속에 번뜩하고 떠오르는 한 가지가 있었다.
‘설마 시스템 침입?’
준혁은 린디웨를 통해 시스템에 직접 침입했었다.
만약 던전 관리자들이 그 사실을 알았고, 그것을 심각한 위협으로 생각했다면?
당연히 준혁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일 것이다.
까드드득!
준혁이 한층 거세게 이를 갈아붙였다.
“개새끼들! 아무리 그래도 가족을 건드리는 건 좀 아니지.”
나지막이 중얼거린 준혁이 여전히 멱살을 잡아 허공에 들어 올리고 있는 이시이 카게루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너희 본진은 정확히 어디냐?”
“모릅니다.”
“이 새끼들은 아는 게 하나도 없네? 중간 관리자면 그래도 뭐 아는 게 있어야 정상 아니냐?”
“그것이…….”
“됐고, 그럼 네 윗선은 누구냐?”
“알지 못합니다.”
준혁은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가려는 주먹을 애써 멈췄다.
“만나는 방법 정도는 알지?”
“그렇습니다.”
“뭐냐?”
“그것이……. 제가 직접 연락을 해야 하고, 본토로 건너가야 합니다.”
이시이 카게루의 말에 준혁이 싸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참에 일본 가서 푸닥거리 한번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