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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장. 각자의 전투#2-
“위는 버려요! 철저하게 무릎 아래만 노립니다! 2번, 3번 틈 벌려!”
리딩이 떨어지는 즉시 약속이라도 한 듯 정확하게 두 명의 탱커가 거리를 벌렸다.
“근딜, 발목!”
“합!”
2선에 있던 백호진이 기합과 함께 앞으로 튀어 나가며 살라두크의 발목에 칼을 날렸다.
“브로큰 스매쉬!”
“3번 붙어!”
깡, 까아앙!
백호진의 칼이 살라두크의 발목을 두드렸다.
순간적으로 휘청거리던 살라두크가 빠르게 중심을 잡는 동시에 발치에 있는 백호진의 머리를 버클러로 내리쳤다.
하지만 그곳에는 리딩에 따라 앞으로 나선 3번 탱커, 안유정이 방패를 준비하고 있었다.
쾅!
강렬한 충격에 안유정이 비틀거린다.
하지만 양태군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리딩을 이어 갔다.
“1번 후측방으로 돌아! 원딜들은 어깨 노려! 2번 접근해서 시야만 가려! 근딜 퇴진!”
속사포처럼 터져 나오는 양태군의 리딩에 백호 길드원들은 기계처럼 정확하게 명령을 이행했다.
순간적으로 몰아친 공격에 살라두크가 비틀거리며 밀려나기 시작했다.
“전원 퇴진!”
기세가 올라 공격을 몰아치려는 순간, 공대장이 흐름을 끊었다.
보통은 흐름을 탄 순간 조금이라도 망설이기 마련이지만, 백호 길드원들은 그런 게 없었다.
리딩과 동시에 행동한다.
콰앙!
방금까지 백호 길드원들이 있던 지면이 산산이 터지며 땅이 움푹 파인다.
그 위에는 거대한 반투명의 전투 망치가 떨어져 있었다.
살라두크가 펼친 스킬이었다.
퇴진이 조금만 늦었으면 최소 중상, 최대 사망에 이를 뻔한 위험한 순간이었다.
“탱커 자리 지키고, 근딜은 호흡 조절 및 탱커 지원, 원거리에서 딜 다 퍼부어!”
양태군은 타고난 공대장이었다.
등급은 D급이라 그렇지 타고난 감각은 그 어떤 공대장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비록 자신이 접할 일이 없을지라도 늘 습관처럼 던전 데이터베이스를 뒤지며 다양한 괴물에 대해 공부해 왔었다.
살라두크도 그중 하나였다.
인도의 어떤 공격대가 공략을 하고, 그에 대해 업데이트한 자료를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영민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반면 백호 길드는 애매하기는 해도 국내에서 충분히 상급에 랭크되는 길드였다.
약간 부족한 길드원 스펙과 부족한 성과 때문에 저평가받는 그런 길드였다.
그 부족한 성과의 원인 중 하나가 제대로 용병술을 발휘할 공대장이 없다는 점이었다.
안유정이 맡고는 있었지만, 그녀 역시 그쪽에 재능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부족한 부분을 서로 보완해 줄 수 있는 완벽한 파트너를 만난 상황이었다.
1 더하기 1의 결과를 2가 아닌 3 이상으로 만들 수 있는 시너지가 발생하는 순간이었다.
콰콰콰쾅-!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폭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양태군의 용병술은 완벽 그 자체였다.
그 완벽한 용병술을 받쳐 주는 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리딩에 따르는 백호 길드의 뛰어난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차근차근 살라두크에게 데미지가 쌓였다.
처음에는 방패가 터져 나갔고, 그다음은 입고 있는 풀 플레이트 아머가 깨졌다.
그 후부터 놈의 질긴 붉은 피부 위로 이질적인 핏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상해.’
최유나의 애검이 두꺼운 가죽을 갈랐다.
하지만 가죽의 두께가 워낙 두꺼워 한 번 베어 낸 정도로 속살에 닿지 못했다.
‘기사의 신념’으로 날카로운 바람을 끌어안은 채 연거푸 수평의 궤적을 그려 냈다.
촤아아악!
가죽 너머로 드러난 속살이 쩍 벌어지며 세찬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최유나는 이미 그 자리를 피했기에 핏물을 뒤집어쓰는 일은 없었다.
속살이 드러난 자리에 새파란 뇌전이 파고들었고, 천둥소리에 버금가는 괴성이 울려 퍼졌다.
그 시간 최유나는 달리고 있었다.
수직으로 솟은 성벽을 타고 오르듯, 발을 디딜 때마다 겅중겅중 높이 솟구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양손에 거대한 뱀을 한 마리씩 쥐고 있는 거인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중이었다.
몸이 가벼웠다. 그만큼 마음도 가벼웠다.
이렇게 상쾌했던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정신과 육체 두 가지 모두 최상의 컨디션이었다.
그럼에도 최유나의 머릿속에 똬리를 튼 채 사라지지 않는 위화감이 있었다.
‘이상해.’
골드 드래곤 카이르무스를 죽였고, 그다음에는 이름도 모르는 레드 드래곤을 한 마리 잡았다.
그리고 지금이 세 번째 전투였다.
키가 20미터에 달하는 거인이었는데, 드래곤에 필적하는 강함을 지닌 놈이었다.
물론 거인을 사냥하는 일 또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아!’
최유나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위화감의 원인을 깨달았다.
전투를 거듭할수록 몸의 컨디션이 좋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던 최유나가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컨디션이 상승하는 게 아니었다. 몸놀림이 좋아지고 있었다.
이유도 깨달았다.
갑작스러운 상승으로 인해 제대로 체화하지 못했던 S1등급의 스탯을 이제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덕분이었다.
“스피어 스트라이크!”
나지막한 외침과 함께 최유나의 검끝에 강렬한 마나가 방출되었다.
마치 작살처럼 발사된 반투명한 창 한 자루가 거인의 뒷덜미를 세차게 찍었다.
크워어어!
생각지 못한 충격에 거인은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한 채 그대로 땅바닥을 향해 엎어졌다.
최유나는 기울어지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선 채 아래를 살폈다.
린디웨와 리쉬옌을 향한 시선이었다.
감성적인 면이나 눈치가 매우 둔한 최유나였다.
하지만 그런 최유나라도 지금처럼 명확한 상황을 모를 수는 없었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스탯을 체화할 수 있게 된 이유가 저 두 사람 덕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린디웨와 리쉬옌이 최유나가 움직일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최적의 공격을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기획했으며, 모든 위험을 사전에 막아 주었다.
쿠우우웅-!
거대한 먼지구름이 풀썩 피어오르고, 그 위로 린디웨의 술법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거인의 등판에 올라선 최유나와 청랑 또한 미친 듯이 날뛰며 차곡차곡 데미지를 쌓았다.
그어어어.
마침내 거인의 입에서 실낱같은 신음이 새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마저도 멎었다.
거인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린 최유나가 린디웨와 리쉬옌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그리고 늘 그랬듯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백호 길드의 전투 역시 마무리되고 있었다.
마침내 하나의 탑이 무너지듯 거대한 오크의 몸뚱이가 허물어졌다.
털썩, 털썩!
“헉, 허억, 헉!”
동시에 백호 길드원과 양태군이 쓰러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다듬었다.
부상자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지독하게도 힘들고 어려운 전투였다.
하지만 지금의 성과는 쾌거라고 할 만했다.
살라두크는 S급 1명 이상 포함된 공격대의 경우 20분이면 죽일 수 있는 몬스터였다.
그에 반해 백호 길드는 무려 한 시간에 가까운 장기전 끝에 사냥에 성공했다.
그럼에도 이번 전투는 아주 훌륭한 성과였다.
S급이 없으면 잡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몬스터이기 때문이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숨을 진정시킨 양태군이 말했고, 다들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저 멀리서 묵직한 굉음과 함께 거대한 몬스터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행들이 급히 고개를 돌려 보니 드래곤 한 마리가 거대한 머리를 땅에 박은 채 죽어 있었다.
그 앞에 선 사람은 준혁이었다.
“역시 괴물은 괴물이네.”
“올 스탯 1,999면 뭐…….”
백호진과 안유정의 짧은 대화를 끝으로 종로 거리 일대를 초토화한 괴물의 기습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재앙 같은 그 전투의 끝 무렵, 괴물의 시체를 넙죽넙죽 집어삼키는 거대한 붉은 뱀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떠돌았다.
***
“일어나.”
준혁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여자는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구련환을 통해 내리는 명령은 절대적이다.
구련환에 묶인 대상이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몸이 그에 반응하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준혁을 쳐다보는 여자의 얼굴에 분노가 가득했다.
하지만 표정만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준혁은 여자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 따위 가뿐하게 무시한 채 의자를 끌고 와 그 앞에 앉았다.
이세연과 지유는 유민섭에게 부탁해 완벽하게 안전이 보장되는 곳으로 옮긴 후였다.
종로 거리의 전투는 끝이 났지만, 준혁의 전투는 지금부터였다.
“어디 소속이냐?”
이 상황에서 통성명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 여자의 소속과 목적이었다.
‘괴물들의 기습도 관련이 있겠지.’
이세연과 지유를 공격하려던 순간 갑자기 게이트가 열리고 괴물들이 등장했다.
그 기가 막힌 타이밍을 우연으로 치부하는 건 생각이라는 걸 안 한다는 방증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사실을 엮으면 나오는 또 하나의 정황이 있었다.
‘던전 관리자 놈들 짓이겠지.’
던전 관리자의 존재를 모를 때는 아무리 이상한 타이밍이라도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관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상, 이는 명백하게 의도된 일이라고 봐야 했다.
그러니 어쩌면 던전 관리자라는 비밀스러운 존재와 직접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그 마지막은 놈들의 죽음이었다.
그 어떤 명분을 가져다 대더라도 가족을 노린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세연과 지유는 당연한 이야기고, 또 하나의 가족이라 할 수 있는 혼원 길드까지 노렸으니 죽여야 할 이유만 해도 두 가지였다.
그러면서 다른 한 가지 가능성도 여전히 남겨 두었다.
‘백효, 감시는 잘하고 있지.’
또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리다 보니 자연스레 궁금해져서 백효에게 물었다.
백효는 잠시 볼런트 라일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준혁이 생각한 또 하나의 가능성은 던전 관리자들 사이의 관계 문제였다.
이들 다섯이 어쩌면 협력 관계가 아닌 경쟁 관계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모른다.”
“음?”
“알지 못한다.”
준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 여자가 구련환을 차고 있는 한 이 말이 거짓일 리는 없었다.
즉, 이 여자는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이름을 모른다.
“무슨 일을 하는 곳이지?”
“청부.”
“이세연과 김지유를 공격한 이유는 뭐냐?”
“납치.”
“납치 후에는?”
“지정된 장소로 데리고 가는 것.”
준혁은 여자를 노려보며 잠시 숨을 골랐다.
‘그다지 아는 건 없는 것 같고…….’
이름도 모른다면 철저하게 베일에 싸인 집단이라는 뜻이다.
이 여자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다면 이 여자의 상관 혹은 청부를 사주한 자를 찾아가는 게 일의 진행이 수월할 터였다.
문제의 ‘지정된 장소’를 확인한 준혁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여자를 향해 말했다.
“넌 지금부터 잠자고 싶을 거야. 하지만 잠들 수 없다.”
구련환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이제부터 이 여자는 지독한 수면 욕구와 그만큼 지독한 불면증 사이에서 괴로워하게 될 것이다.
준혁은 가족을 공격한 적에게 여유를 줄 만큼 관대한 성격이 아니었다.
-흑호, 그놈은?
준혁의 물음에 곧장 시야에 하나의 광경이 겹쳐졌다.
한 남자가 호텔 방에 앉아 시계를 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준혁 앞에 있는 여자와 마주쳤던 남자였다.
흑호가 이 남자에게도 ‘표식’을 붙여 놓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감시 잘해라.
간단하게 명령을 내린 준혁이 신음을 흘리는 여자를 뒤로한 채 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