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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장. 음모론#1-
지이이잉!
손바닥을 댄 부분에서 푸른 빛이 번지는가 싶더니 보이지 않단 문제의 벽이 둥글게 열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드러난,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낯선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기묘했다.
아니, 기묘하다는 단순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살면서 보고 들었던 수많은 단어와 문장, 비유, 수사(修辭) 그 무엇을 끌어들여도 ‘형언’할 수 없었다.
다만 하나의 분명한 느낌은 있었다.
‘우주.’
흔히 아는 물질적인 우주가 아닌, 사상적인 우주였다.
바꾸어 말하면 삼라만상(參羅萬像), 혹은 모든 세상의 ‘규칙’.
절대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 느껴졌다.
준혁의 두 눈이 살짝 몽롱하게 풀렸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뛰어들고 싶었다.
거대한 흐름에 몸을 맡기고 싶은 충동이 준혁의 마음을 자극했다.
[정신차려!]
눈앞에 불쑥 솟구치는 린디웨의 시스템 메시지.
하지만 그런 시스템 메시지 따위는 준혁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명확하게 망막에 맺혀있음에도 오로지 내벽 너머의 풍경만이 눈에 비쳤다.
스르륵!
준혁의 손이 내벽에 난 둥근 구멍 안으로 불쑥 밀고 들어갔다.
[야, 야! 김준혁!]
[정신차려!]
[당장 물러나!]
다급한 린디웨의 메시지가 쉴 새 없이 떠올랐지만, 준혁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키하아아악!
지금껏 가만히 있던 적사가 황급히 준혁의 주먹에 송곳니를 박았다.
“큭!”
갑작스러운 통증에 깜짝 놀란 준혁이 짧은 신음과 함께 손을 멈췄다.
“이거 뭐야?”
뒤늦게 자신의 몸이 절반 정도 내벽 너머로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일단 눈부터 감아.]
평소라면 장난이든 드립이든 던지며 애를 먹였을 준혁이 이번에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이런 건 장난칠 일이 아니다.
스스로 행동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어차피 눈을 감아도 시스템 메시지는 보이니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시스템의 내부는 일종의 ‘대원칙’이야. 어떤 종류의 것이든 우주가 움직이는 규칙이지.]
“그런데?”
[하위에 종속된 개체는 그 흐름을 접하는 순간 반항할 수가 없어. 작은 실개천이 큰 강물에 합류하면 그대로 섞여 버리는 것과 같지.]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데?”
[무아(無我).]
“무아?”
[육체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 대원칙의 일부가 돼. 그 과정에서 자아(自我)는 사라져. 그리고 ‘존재’는 무로 되돌아가.]
“이런 미친! 그런 건 미리 알려 줘야지!”
[이렇게 깜빡이도 안 켜도 들어올 줄 몰랐지.]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쉰 준혁이 황급히 몸을 틀어 내벽을 등졌다.
[적사 아니었으면 진짜 큰일 날뻔했다.]
“그러게.”
준혁의 손등에 이빨을 박아 넣는 일은, 사실 준혁의 스탯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청랑이나 흑호, 백효는 절대 불가능한, 오로지 적사만 가능한 일이었다.
적사와 계약을 맺을 당시 이러한 부분에 대해 합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즉, ‘규칙’의 하나로 준혁이 허용한 일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난 이제 뭐하면 되냐?”
[기다려.]
“응?”
[나 혼자 갔다 올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또 조심해야 할 건?”
[그냥 눈 감고 있어. 저기에 접촉하지 말고.]
“알았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옅은 바람 소리가 준혁의 귓바퀴를 스치는가 싶더니, 이내 사위가 정적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가자.]
검은 시야에 린디웨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끝?”
[끝.]
“여기 또 올 일은 없지?”
[후후후, 너는 없다.]
“응?”
[그런 게 있어. 나가자.]
“그래. 눈 떠도 돼?”
[떠야지.]
눈을 뜨니 어느새 게이트가 일렁이고 있었다.
준혁은 망설임 없이 게이트로 몸을 밀어 넣었다.
***
「이제야 접속이 되는군.」
5인 위원회의 시작은 항상 금색부터였다.
뒤이어 은, 적, 청, 녹색의 네 게이트가 빛을 밝히며 입장을 알렸다.
은색이 일갈을 터트렸다.
「놈은? 김준혁 그놈은?」
항상 차분한 말투에 극존대를 사용하는 은색이었다.
지난번 접속이 끊어지기 전부터 그러더니, 그 흥분 상태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은색, 뭐야? 평소에 그렇게 예의 바르더니 왜 그렇게 흥분하는 거야? 혹시 취향이 특이한 거 아냐?」
「그러게요. 저런 반응을 이해할 수가 없군요.」
청색과 녹색의 말에 은색이 버럭 화를 냈다.
「감히 우리 시스템에 직접 침입한 놈입니다! 주제도 모르고 그딴 짓거리 하는 놈을 두고 보잔 말입니까! 다들 지금 그렇게 여유로울 때냐 말입니다!」
존대는 유지하지만 흥분 상태는 가라앉지 않았다.
「내가, 내가 죽이겠습니다. 겁도 없이 시스템을 더럽힌 놈의 손발을 끊고, 모가지를 잘라서 세계가 볼 수 있도록 전시하겠습니다!」
속사포처럼 터지는 은색의 말에 나머지 넷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 회의를 주재하는 금색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게 감정적으로 볼 일이 아니지. 그 전에 따져 봐야 할 게 있으니까.」
「뭘 따진단 말입니까? 당장 놈을 쳐 죽여야 한단 말입니다!」
금색이 은색을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그 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단 말이다.」
「그게 뭡니까?」
「시스템의 이상 현상. 그게 어쩌면 김준혁이 한 짓이 아닐까?」
그 말에 모두들 감정이 동요한 듯 게이트의 불빛이 크게 일렁였다.
적색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하지만 시스템에 이상 현상이 생겼다고 말한 건 김준혁이 처음이 아니오?」
「그렇기 때문에 의심스러운 거지. 우리만 알고 있던 그 현상을 놈이 어떻게 알게 됐을까?」
녹색이 그 말을 받았다.
「즉, 범인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알 수 있었다는 말이군요? 그 사실을 먼저 밝힘으로써 오히려 의심받지 않는다. 그런 건가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쪽 시스템이 배면계라는 곳과 섞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없지. 또한, 이번에는 아예 시스템 내부에 침입까지 하지 않았나?」
「확실히 그럴 개연성이 보이기는 하네요. 그런데…….」
녹색이 잠시 말꼬리를 흐려 모두의 관심을 집중시킨 후 말했다.
「……어차피 결론은 똑같은 거 아닐까요? 이러나 저러나 놈을 막아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잖아요? 아니면 그냥 제거한다거나?」
또 다시 흥분한 은색이 소리쳤다.
「나한테 맡기란 말입니다! 당장이라도…….」
하지만 금색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건 조금 섣부른 결정일 수 있어. 또 하나의 가능성이 있잖아.」
이번에도 녹색이 말을 받았다.
「시스템을 섞으려는 주체가 김준혁이 아닐 가능성 말인가요?」
「그렇지.」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김준혁이 그 범인이거나, 그 범인과 아주 가까운 인물일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요?」
적색과 청색이 차례대로 녹색의 말에 긍정을 표시했다.
「맞소. 시스템이 우리를 긴급 소집한 것만 봐도 김준혁은 매우 위험한 인물이오!」
「그렇지. 그것도 생각 못 하는 등신이 이 위원회에 있지는 않겠지?」
잠시 고민하던 금색이 늘 하던 식으로 결론을 내놓았다.
「이번에도 다수결로 정하도록 하는 게 좋겠군. 이의 있나?」
나머지 넷은 침묵으로 긍정을 대신했다.
「좋아. 그럼 표결에 들어가지. 김준혁을 생포, 여의치 않다면 제거하는 데 동의하는 사람?」
은, 적, 청, 녹의 순서로 대답을 내놓았다.
「동의합니다!」
「찬성이오.」
「이건 나도 반대하긴 애매하네. 찬성.」
「좀 더 신중한 게 좋을 거 같지만……. 지금은 대세를 따르지 않을 수 없군요? 뭐, 내가 반대해도 어차피 결론은 났잖아요?」
신속하게 결정이 내려졌다. 금색은 특별히 결과를 말하지 않고 곧장 시행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럼 실행은 누가 하는 게…….」
「내가 하겠습니다! 당장. 지금 당장 놈이 있는 한국으로 날아가겠습니다!」
굳이 의논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5인 위워회의 긴급 회의가 마무리 되었다.
***
“린디웨!”
준혁이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가사 상태에 빠져있던 린디웨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보고 반갑게 외친 이는 리쉬옌이었다.
“아, 리쉬옌. 지키느라 고생했어.”
“네, 그런데…….”
리쉬옌이 못다한 말을 꺼내려 했지만, 그것을 눈치챈 린디웨가 급히 이야기를 꺼냈다.
“급하게 할 일이 있어서 그러니 중요한 거 아니면 나중에 이야기 하자.”
하지만 리쉬옌은 평소와 달랐다.
입술을 앙다문 채 고개를 휘휘 내젔는다. 두 눈에는 지금껏 내 보인 적 없는 고집이 단단히 매달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린디웨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안 돼. 정말 중요한 일…….”
그때 리쉬옌이 린디웨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약속해요.”
내성적이고 소심한 리쉬옌의 성격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좀 전에 린디웨의 말에 부정적인 의사를 내비친 것부터가 지금껏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무슨 약속?”
“급하다는 일이 끝나면, 나와 이야기하기로.”
리쉬엔이 얼마나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지 깨달은 린디웨도 이 일은 대충 얼버무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았어.”
“좋아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 리쉬옌이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 모습에 멈칫한 린디웨가 다시 물었다.
“린디웨?”
“저도 이제 사실을 알잖아요. 그러니 저도 상황을 알아 두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으음…….”
린디웨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데 준혁이 불쑥 끼어들었다.
“리쉬옌이 하는 말이 맞아. 이제 와서 배제하는 것도 웃기잖아? 그리고 가장 도움이 될 사람도 리쉬옌이고.”
혼원길드 내에서 준혁과 린디웨 다음으로 강한 사람이 리쉬옌이었다.
“흐음, 그렇긴 하지. 알았어. 그럼 둘 다 앉아봐.”
린디웨의 말에 준혁과 리쉬옌이 소파에 앉았다.
“일단 시스템에는 뒷문, 이른바 백도어를 만들어 놨어. 이제부터는 나 혼자서도 저쪽 시스템에 꾸준히 접촉할 수 있어.”
그 말에 준혁이 반가운 표정으로 반응했다.
“이야, 그럼 저 시스템 자폭시킬 수도 있는 거야?”
“그랬으면 좋겠지만……. 백도어를 만들어 놨다고 해도 볼 수 있는 정보는 한정적이고, 저쪽 시스템에 영향을 끼치는 건 불가능해.”
“별 소용도 없네.”
“흥, 앞뒤 안 재고 거기 빨려들 뻔한 사람이 어디의 누구시더라?”
린디웨의 핀잔에 준혁이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꼬리를 돌렸다.
“그래서 중요하게 말할 거라는 게 뭔데?”
“던전의 시스템은……. 후우!”
린디웨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듯, 중간에 심호흡을 한 번 한 후에 말을 이었다.
“따로 관리자가 있어.”
하지만 바로 이해하지 못한 준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관리자? 너도 시스템을 관리하잖아.”
하지만 린디웨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러니까 배면계 시스템은 그냥 시스템 자체가 알아서 움직이는 거야. 그런데 던전 시스템은 따로 관리자가 있어. 다섯 명의 ‘인간’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