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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장. 복제품#3-
[대책이 없을 거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내가 저딴 짝퉁한테 당할 리가 없잖아?
준혁은 대답을 하며 왼팔을 들어올려 적사와 눈을 마주쳤다.
-준비됐냐?
준혁의 물음에 적사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더니 아가리를 쩍 벌려 뾰족하게 튀어나온 두 개의 송곳니를 준혁의 손등에 박았다.
콰콱!
쏴아아아아-!
동시에 적사의 몸이 붉게 빛나며 그 빛이 준혁의 몸속으로 빠르게 빨려 들어갔다.
준혁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이, 이거 뭐야? 영력?]
기겁한 린디웨가 물었고, 준혁은 때마침 쏟아지는 굉황의 공격을 피하며 대답했다.
-얘가 내 보조 배터리거든.
[헐, 보조 배터리…….]
-평소에는 그냥 돼진데, 이럴 때는 아주 쓸모가 많지.
“후웁!”
준혁은 크게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었다.
몸속 가득찬 영력이 그 어느 때보다 짙은 충만감을 준다.
굉황이 하늘에 뜬 채 준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화근을 잘라두는 것이 진짜 나에게도 좋겠지.
“할 수 있으면 해보던가.”
-훗!
“새끼, 쪼개기는…….”
준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변으로 무시무시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의 지면이 갑자기 쪼개지더니 산이 솟구쳤다.
숲이 펼쳐지고, 저 멀리 황무지가 나타나는가 하면, 그 너머로 넓은 바다가 펼쳐졌다.
하늘에는 짙은 먹구름이 자욱하게 깔리고 느닷없이 일어난 돌개바람이 몰려왔다.
콰앙-!
튀어나온 산꼭대기의 분화구에서 용암이 뿜어져나왔다.
시뻘겋게 흘러내리던 용암이 한 곳으로 뭉치더니 살아 있는 파도가 되어 준혁을 향해 달려든다.
하늘의 먹구름이 하나로 뭉쳐 거대한 새의 형상으로 준혁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속에 시퍼런 뇌전을 잔뜩 머금은 채였다.
바람이, 숲이, 땅이, 바다가.
하나같이 살아 있는 생명체로 변해 준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파지지직!
주변을 완전히 에워싼 채 뇌전을 방사하는 구름을 간발의 차이로 벗어났다.
“빙경낙월(氷鏡落月)!”
휘영청 떠오른 새하얀 만월의 차가운 빛살에 덮쳐들던 용암의 파도가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전뢰보]를 펼쳐 파도 아래로 달려 그 여파에서 벗어난 준혁을 맞이한 것은 돌개바람이었다.
휘이이잉-!
압축된 바람의 칼날이 사정없이 휘몰아쳤다.
매구탈이 머리를 보호하고, 면적을 넓인 묵린갑이 준혁의 온몸을 보호했다.
까가가가강!
날카로운 바람이기는 하나 준혁의 방호구를 뚫고 충격을 주지는 못한다.
-이 새끼 뒤가 없이 덤비네?
준혁의 투덜거림에 린디웨가 반응했다.
[그러게.]
-숫자만 몇 종류야?
[못해도 10종류는 넘는데?]
배면계의 괴물은 괴수(怪獸), 영수(靈獸), 신수(神獸)로 구분한다.
그중 가장 강력한 놈들이 신수였다. 그리고 그 강력한 신수 중에 더욱 특출하게 막강한 놈들이 있었다.
흔히 신수하면 떠오르는 용이나 호랑이, 봉황, 현무 등을 베이스로 신격화한 놈들이었다.
그 특출한 신수가 가지는 공통적인 권능이 바로 자연 자체를 움직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수는 신에 ‘가까운 짐승’이지 ‘신(神)’은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자연을 조작하는 권능에도 한계가 있었다.
준혁이 지금 저 짝퉁 굉황을 향해 뒤가 없다고 말한 이유였다.
진짜 신수들도 다섯 종류 이상의 자연 조작을 하지 않는다.
과부하가 걸리기 때문이었다.
인간과의 싸움으로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지만, 패하면 긴 시간 봉인을 당하기 때문에 여지를 두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저 짝퉁 굉황은 어차피 자신이 짝퉁이라는 걸 알기에 신경 쓰지 않고 권능을 남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쏟아지는 공격을 피해낸 준혁이 슬쩍 왼손을 들었다.
손등에는 적사가 여전히 송곳니를 박아 넣고 있었다.
그때 마침, 빙경낙월에 얼었던 용암의 파도가 다시 한 번 준혁을 덮쳤다.
하지만 준혁이 한 발 빨랐다.
콰앙!
[천천]으로 하늘 높이 솟구쳐 파도를 피한 준혁이 다시 한번 적사와 눈을 마주쳤다.
순간 적사의 눈동자가 격정적으로 흔들렸다.
하지만 준혁은 입가에 미소까지 지으며 말했다.
-가자!
더 이상의 반항은 없었다. 힘없이 시선을 떨군 적사의 두 눈에서 녹색의 불빛이 번뜩였다.
순간 준혁의 온몸에서 검은색의 영력과 함께 붉은색과 녹색이 뒤엉킨 영력이 함께 피어올랐다.
-선수 시절에도 도핑은 안 했는데 말이지!
퍼퍼펑!
점점 거세지던 빛이 급기야 살갗을 뚫을 듯한 기세로 터져나왔다.
그와 함께 준혁의 입에서 나지막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천신강림.”
준혁의 온몸이 풍선처럼 부풀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거인으로 변했다.
[야,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깜짝 놀란 린디웨가 물었지만 준혁은 대답 대신 주먹을 뻗었다.
콰아앙!
허공에 떠 있던 굉황의 거대한 몸뚱이가 크게 뒤흔들렸다.
무지막지한 충격에 머리쪽이 격렬하게 바닥에 처박혔다.
“빨리 끝내자!”
준혁은 검은 안개 같은 영력과 적녹의 빛에 휘감긴 거인의 형상으로 변해 있었다.
-이노옴!
쿵쿵쿵!
지면을 뒤흔드는 발소리.
거인과 거대한 용이 서로를 향해 격렬하게 돌진했다.
퍼엉!
거대한 용의 꼬리가 준혁의 등판을 후려쳤다.
격렬하게 비틀거리면서도 끝내 중심을 잃지 않은 준혁이 두 팔로 용의 몸뚱이를 움켜쥐었다.
부우우웅!
거인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크게 원을 그리며 땅으로 패대기쳐지는 용의 몸뚱이.
하지만 허무하게 당하기만 하지는 않는다.
콰앙, 빡!
준혁은 용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고, 굉황은 꼬리로 준혁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무시무시한 육박전이 펼쳐졌다.
손발을 휘두르고 패대기칠 때마다 바닥은 물론 대기가 뒤흔들렸다.
길고 거대한 용의 몸뚱이는 때로는 채찍처럼 준혁의 몸을 후려치고, 무시무시한 힘으로 두드렸다.
거인과 용의 처절한 육탄전.
그렇게 얼마나 공방을 주고받았을까?
주먹을 뻗던 준혁이 살짝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굉황은 그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꽈드드득!
거대한 용의 몸뚱이가 준혁의 전신을 휘감아 옥죈다.
쩍 벌어진 용의 아가리가 준혁의 머리를 씹어 삼킬 듯 덮쳐든다.
준혁이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굉황이 주둥이를 닫기도 전에 금색의 실타래가 먼저 날아들었다.
금문묵룡삭이었다.
꾸우욱!
순식간에 용의 모가지를 휘감는 먹색 무늬의 황금 동아줄.
=떨.어.져!
쿠웅!
터져나온 준혁의 용언에 굉황의 몸뚱이가 땅에 처박혔다.
그와 동시에 이미 칼날로 변한 무상곤이 굉황의 아가리에 틀어박혔다.
푸우욱!
피는 튀지 않는다.
이미 카이르무스의 몸뚱이를 짓이겨 만들어낸 상태. 제대로 된 혈관도 심장도 없다.
그저 영력에 의해 재구성된 용의 몸뚱이일뿐.
어느새 날아든 30자루의 금문묵룡비가 용의 몸뚱이 속으로 파고들었다.
몸속으로 파고든 금문묵룡삭이 맹렬하게 영력을 뿜어낸다.
이질적인 기운의 침습에 굉황의 영력이 가닥가닥 끊어져나갔다.
본체였다면 이 정도 공격에 이리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겠지만, 지금의 육체는 형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태였다.
-이번에도 실패구나. 역시 이 상태로는…….
이미 준혁에게 한 번 당한 경험이 있던 굉황이었다.
거듭된 기억은 고차원의 사고를 가진 존재에게서조차 감정의 동요를 이끌어 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직 끝이 아니다.
“닥치고, 그냥 뒈져!”
콰드드득!
굉황의 몸속에서 들리는 소리는 다름 아닌, 굉황의 아가리에 박힌 무상곤이 형태를 변화시키며 내는 소리.
그 무상곤을 쥐고 있던 준혁의 오른팔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쩌어어억!
호쾌한 소음과 동시에 굉황의 몸뚱이가 세로로 길게 쪼개지며 그 속에서 날카로운 검의 형태를 한 무상곤이 비집고 나왔다.
쿠우우웅!
마침내 힘을 잃은 굉황의 거대한 몸뚱이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후우!”
준혁 역시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신강림]을 풀었다.
털썩!
힘을 완전히 소진한 준혁이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오랜만에 힘 좀 썼네.”
생각으로 대화를 나누지 않고 육석으로 말을 뱉었다.
이 정도 난장판을 부려놓고 조심한답시고 소곤거리는 게 새삼 웃기는 짓 같았다.
[좀 오버한 거 같은데?]
“스트레스도 풀고 좋잖아.”
시스템 안으로 침입해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낯선 상황을 연달아 마주한 데다 굉황까지 등장하는 바람에 어느 정도 스트레스가 쌓였고, 그 탓에 약간 서두른 감이 있기는 했다.
[천신강림은 영력 소모도 극심하고 무리하게 유지하면 후폭풍도 만만찮을 텐데?]
린디웨의 걱정에 준혁이 왼손을 들어 올렸다.
“이놈이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었지.”
적사는 직전까지 준혁의 소진된 영력을 보충해주고, 지금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놈 참 신통하기는 하네. 마지막에 그건 뭐야? 도핑이라고 했던 거.]
“말 그대로 도핑이지. 유지하는 동안 스탯을 뻥튀기하는.”
[그런 것도 있구나.]
“그 전에 몰려왔던 웨이브 덕분이라고나 할까?”
적사를 한계까지 크도록 잘 먹인 덕분에 걱정 없이 증폭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준혁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
[응?]
“너 배면계에서 관음하고 있었잖아.”
[관음이 아니라고!]
“어쨌든. 그런데 어떻게 적사를 모를 수가 있냐?”
[응? 아, 그건…….]
린디웨가 슬쩍 말꼬리를 흐렸다.
“음? 뭐냐?”
[뭐가?]
“방금 딱 뭔가 느낌이 왔어.”
[메시지 읽으면서 느낌은 무슨?]
“어, 글자에서 딱 보여. 너 뭔가 움찔했다.”
하지만 린디웨의 메시지는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
물론, 그런다고 그냥 물러날 준혁이 아니었다.
“말하지?”
“하는 게 좋을걸?”
“어차피 여기서는 내가 갑인데?”
“또 앉을까?”
린디웨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사실은…….]
“사실은?”
[다음 각성자 추리느라 못 봤다.]
“그 얘기가 그렇게 어려운……. 아니, 잠깐!”
급히 말을 끊은 준혁이 잠시 뭔가 생각한 후 물었다.
“그 얘기는 설마 내가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다는 얘기냐? 그러니까 뒈질 거라고?”
[혼원급에 오를 때까지는 가능서이 있다고 봤는데, 그 후에 진도가 안 나가니까.]
“하, 그래. 뭐, 니가 내 친구도 아니고 그럴 수 있지. 시스템인데.”
시스템이라는 건 감정이 없다.
지금 함께 있는 린디웨는, 그냥 시스템 아바타가 아니라 린디웨의 인격과 결합한 상태였다.
그 영향으로 감정이라는 것이 내재되어 있을 뿐, 그 본질은 계산대로 돌아가는 시스템일 뿐이었다.
고차원적인 사고를 하는 신수와 일면 비슷한 면이 있는 셈이었다.
그럼에도 준혁의 마음속 한켠에는 왠지 섭섭한 느낌도 있었다.
시스템을, 단순히 시스템이 아닌 린디웨라는 인간으로 먼저 대했기 때문에 생긴 준혁의 감정 작용이었다.
탁, 탁탁!
갑자기 무언가가 준혁의 팔뚝을 때려댔다.
고개를 내려보니 적사가 팔뚝 위에 똬리를 튼 채 꼿꼿이 세운 머리로 한쪽을 끊임없이 가리켰다.
굉황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곳이었다.
“하아!”
그리고 준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돼지 새끼!”
그렇게 구박을 한 준혁이 적사를 어깨에 태운 채 굉황의 시체로 다가갔다.
그리고 준혁은 썰고, 적사는 끝없이 꿀떡꿀떡 삼키는 이상한 먹방이 꽤 긴 시간 이어졌다.
“됐다. 이제 가자.”
적사에게 굉황의 시체를 다 먹인 후 준혁이 말했다.
[정면으로 쭉 나가.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어.]
린디웨의 안내에 따라 걷기를 무려 한 시간.
턱!
걸어가던 준혁이 갑자기 어떤 벽에 부딪치며 발을 멈췄다.
“이건 뭐야? 설마 또?”
[아니, 도착했어.]
“응?”
[여기가 진짜 시스템이야.]
“그럼 우리가 지나온 건?”
[외벽?]
잘 이해하지 못하는 준혁의 반응에 린디웨가 간단하게 설명했다.
[밤송이를 생각하면 되겠네.]
“밤송이?”
[우리가 지금까지 지나온 길은 뾰족한 밤송이의 겉껍질이고, 지금 만난 이건 진짜 밤 껍데기.]
“그러니까, 벽이 두 개라는 말?”
[그렇지.]
곧장 대답하는 린디웨의 말에 준혁이 핀잔을 준다.
“왜 쉬운 설명을 놔두고, 어려운 비유를 하냐?”
[허, 그게 더 쉬운…….]
“됐거든요. 그래서 뭐 할까?”
[벽에 손바닥을 대. 그 후는 내가 할게.]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준혁이 보이지 않는 벽에 손바닥을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