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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장. 복제품#2-
-우리는! 아니, 나는 유일(唯一)의 존재다.
-나만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너희 또한 내가 분명하다.
-아무래도 그것 때문에 일어난 일인 것 같지 않은가?
4마리 굉황에게 다가가던 준혁이 저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
‘그것?’
뭔가 귀에 쏙 박히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렇다면…….
-그렇지. 우리는.
-모두가 유일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
-단순한 기억의 피조물.
-존재의 의의는 생각할 필요가 없겠군.
굉황‘들’이 내린 결론에 준혁은 실망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보통 짐승 새끼들은 아니라니까.’
지난번 재회했을 당시의 태도를 보건대, 굉황은 시스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굉황들이 단순한 시스템의 복제품에 불과하다 해도 상황은 바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준혁이 놀란 부분은 저들의 빠른 현실 수용 능력이었다.
자신들이 단순한 복제품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통해 조금의 정체성 혼란도 느끼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든 대단하긴 대단한 놈들이었다.
‘그것’이 어쩌고 할 때는 혹시 저놈들이 꾸미는 음모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지만, 세상 일이라는 게 그리 쉽게 풀리지는 않는 모양이다.
“후!”
짧게 숨을 고른 준혁이 굉황들을 향해 외쳤다.
“어이, 짝퉁들.”
굉황들의 시선이 동시에 준혁에게로 향했다.
-짝퉁이라?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짝퉁이라도 진짜와 생각이 다르지 않지.
“하아, 도발도 안 먹히네.”
이래서 고차원의 사고를 지닌 것들은 상대하기가 까다롭다.
굉황 같은 신수 놈들은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기에 ‘짝퉁’이런 말에 발끈해야 하는 데 그런 게 없다.
자신을 객관화하고 냉정하게 평가한 후 온전히 받아들인다.
조금의 정체성 혼란조차 겪지 않는다.
-도살자여, 너조차 짝퉁은 아니겠지?
“이것들이 날 뭘로 보고. 이 몸은 확실한 오리지날이지.”
-그렇다면 지금이 도살자를 죽일 절호의 기회로군.
“하아, 그래. 그냥 붙자. 이 짐승 새끼들아!”
가벼운 외침과 동시에 준혁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콰콰콰콰쾅!
준혁의 발자국을 따라 맹렬한 폭음이 쫓아간다.
빠르게 따라붙은 폭발이 마침내 준혁의 뒤꿈치를 붙잡으려는 그 순간.
[전뢰보]
한 줄기 뇌전이 된 준혁의 신형이 빛살처럼 굉황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자리를 잡고, 두 발을 모으고, 발돋움으로 허공을 향해 솟구치는 일련의 과정이 동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짧은 순간에 이루어졌다.
굉황들은 카이르무스의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 있고, 준혁은 놈들의 머리 높이까지 뛰어 올랐다.
손에 들린 것은 당연히 무상곤이었다.
풀 스윙으로 크게 휘두르는 그 짧은 순간에 무상곤이 거대한 몽둥이로 변했다.
뻐어억-!
손을 타고 올라오는 짜릿한 감각.
한 놈의 머리가 격렬하게 튕겨나가고, 충격을 못이겨 거대한 몸뚱이마저 휘청인다.
그 사이 금문묵룡비와 금문묵룡삭이 황상적인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나머지 세 마리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열 자루씩으로 편대를 이룬 금문묵룡비가 비늘로 덮인 놈들의 몸뚱이를 타고 달린다.
콰르르르르-!
단단한 비늘에서 맹렬하게 불꽃이 튀어 올랐다.
하늘을 나르는 뱀처럼 자유롭게 유영하는 금문묵룡삭이 빠르게 세 놈의 모가지를 묶고 휘두른다.
그 사이 준혁은 처음 후려친 놈의 머리 위에 올라탔다.
빡, 빠악, 빡!
두개골을 쪼갤 기세로 두드려대는 몽둥이질에 놈의 머리가 끊임없이 흔들린다.
-놈, 소용없다!
“기껏해야 귀신 놀이나 하는 것들이 아무튼 말은 잘도 하지!”
크워어어어-!
거대한 포효와 함께 놈의 몸뚱이가 허공으로 풀썩 솟구쳤다.
그와 함께 찾아온 것은, 처음 던전에서 굉황을 만났을 때의 그로테스크한 변형이었다.
꾸드드드득!
온몸의 뼈와 근육이 멋대로 뒤틀리고 짜 맞춰지며 놈은 순식간에 용의 형태로 변했다.
그리고 그것이 준혁이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금륜천전!”
외침과 함께 휘젓는 준혁의 손길을 따라 거대한 술식진이 떠올랐다.
그런데 하나가 아니다.
“금륜천전! 금륜천전!”
계속 같은 말을 외치며 연달아 5개의 술식진을 만든다.
술식진의 가득한 술식을 으깨며 등장하는 거대한 5개의 금륜.
콰르르르르!
5개의 금륜이 찬란한 금빛을 흩뿌리며 구르기 시작했다.
2개는 지금 상대하는 굉황의 등판 위를 굴렀고, 나머지 3개는 각각 하나씩의 굉황을 향해 굴러갔다.
직경 10m, 폭 5m의 거대한 금륜이 용의 기나긴 몸뚱이를 타고 끝까지 굴렀다.
-이놈!
버럭 소리를 내지른 굉황의 두 눈에서 빛이 번뜩였다.
짙은 회색의 영역일 뭉클 피어오르면 주변 일대를 뒤덮는다.
으적, 콰드득!
뒤이어 사방 곳곳에서 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으깨지는 소음이 울려퍼졌다.
무슨 소린지는 뻔했다.
나머지 3마리 굉황도 각자 제 몸뚱이를 용의 형태로 재조합하고 있는 것이다.
[야, 지금 공격해야지!]
린디웨가 다급하게 외쳤다.
-원래 변신할 때 공격하면 안 되는 거 모르냐?
[지금 농담이 나와?]
-걱정하지 마라, 내가 아무 생각도 없이 싸우는 놈이냐?
[아무 생각도 없이 싸우는 거 맞잖아.]
-어? 그런가?
그때 짙은 안개처럼 일대를 에워싼 회색 영력 사이로 거대한 존재감이 불쑥 떠올랐다.
4마리의 굉황이었다.
“후우!”
짧게 호흡을 가다듬은 준혁은 어느새 두 손으로 금문묵룡삭을 쥐고 있었다.
선제 공격은 굉황으로부터였다.
=너.는.움.직.이.지.못.한.다.
4마리의 굉황이 동시에 펼치는 [용언]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압력이 준혁의 온몸을 옥죈다.
기다란 몸을 수직으로 들어올려 준혁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는 4마리의 굉황.
[야, 야야!]
다급한 린디웨의 메시지가 준혁의 망막에 맺힌다.
-호들갑 떨지 말자.
[이게 지금 호들갑으로…….]
휘리리기!
준혁의 손에 들린 금문묵룡삭이 준혁의 오른쪽 팔뚝에서 어깨까지 촘촘하게 감겨들었다.
=나.한.테.용.언.따.위.가.안.통.하.는.데?
준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금문묵룡삭에서 피어오른 묵색의 영력이 다시 준혁의 온몸을 휘감고, 이내 준혁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금문묵룡삭에 장착되어 있는 스킬은 다름 아닌 [용언]이었다.
스스로에게 [용언]으로 언령을 발휘해 굉황이 펼치는 [용언]을 무력화시킨 것이었다.
-아무튼 마음에 안 드는 놈이야.
4마리 굉황이 동시에 중얼거린 직후,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단단하게 뭉친 회색의 영력이 준혁을 향해 쏟아졌다.
쿵, 쿠쿠쿠쿠쿵!
쉴 새 없이 바닥이 뒤흔들렸다.
떨어지는 영력 뭉치 사이로 준혁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움직인다.
빗발처럼 공격이 쏟아지지만 준혁은 단 한 번도 맞지 않고 그 모든 것을 피해냈다.
그런데 피하면서 움직이는 경로가 뭔가 이상했다.
머리 위에서 쉴 새 없이 영력 뭉치가 쏟아지는 상황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의 회피는 최단 거리,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본능적으로 설정해 움직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준혁의 움직임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오른쪽으로 한 걸음이면 피할 수 있는 것을 왼쪽으로 다섯 걸음을 움직인다.
떨어지는 영력 뭉치의 패턴을 보면 뒤쪽으로 물러나는 것이 효율적이지만, 오히려 앞으로 달려든다.
파파팟!
그러다 보니 준혁의 움직임이 한결 커지고, 현란하다.
그에 따라 하늘에 몸을 띄운 채 준혁을 공격하는 굉황들의 움직임도 복잡해졌다.
쩌저저적!
어찌나 두드렸는지, 폭우처럼 퍼붓는 영력 뭉치의 충격에 바닥에 균열이 달리기 시작했다.
급히 좌우로 발을 움직이던 준혁이 힐끔 허공을 보았다.
4마리 굉황이 허공에서 위아래로 켜켜이 교차하고 있는 탓에, 아래에서 보면 복잡한 실타래가 엉킨듯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지금껏 준혁이 비효율적으로 움직인 이유이기도 했다.
“영박!”
굉황들의 온몸에 있던 그림자들이 넓게 퍼지며 놈들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단순히 제 몸에 있는 그림자만이 아니다.
하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보니, 위에 있는 놈의 그림자가 아래쪽에 교차해 있는 놈의 몸뚱이에 그림자를 드리운 채였다.
그것이 넓게 퍼졌다.
꾸드드드득!
서로의 그림자에 엮이며 눈깜짝할 사이에 4마리가 모두 하나로 뭉쳐 얽혔다.
마치 엉킨 실타래를 두 손으로 잔뜩 비벼 둥글게 말아 놓은 듯하다.
하지만 영박은 조종하는 그림자의 면적에 비례해 영력을 소모하는 기술이었다.
무려 4마리나 되는 굉황의 거대한 몸뚱이를 묶었으니 그만큼 준혁의 몸에 있던 영력도 뭉텅뭉텅 빠져나갔다.
하지만 준혁은 멈추지 않았다.
[천천]을 펼쳐 허공을 높이 솟구친다.
-크으으!
-김준혁!
거대한 눈동자를 움직여 준혁을 쳐다보는 굉황의 눈동자에 살기가 어린다.
하지만 준혁은 이미 무시무시한 속도로 낙하하며 거대한 창을 앞세워 또 하나의 스킬을 전개했다.
[태산인]
거대한 창에 1,000관(3.75t)의 무게가 실린다.
풀썩 피어오른 영력이 창날에 뭉치며 결정을 형성하더니 급기야 단단하게 굳어 고체화 되었다.
-이놈-!
4마리 중 하나가 준혁을 보며 거대한 주둥이를 쩍 벌렸다.
폭발하는 화산처럼 솟구치는 것은 회색의 영력.
폭풍처럼 소용돌이를 그리는 회색의 영력이 준혁을 향해 쏘아졌다.
영력의 소용돌이와 묵색의 창이 부딪쳤다.
꽈르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영력의 파편.
그것을 뚫고 준혁이 창을 쥔 손을 크게 뒤로 젖혔다.
쑤아아앙-!
낙뢰처럼 내리박힌 한 자루 창이 한 놈의 머리를 그대로 관통했다.
그대로 머리가 터져나나고, 남아 있던 몸뚱이가 거칠게 요동치며 사방으로 짙은 영력을 퍼트렸다.
탁!
빠르게 지면으로 착지한 준혁이 무상곤을 회수하며 짧게 혀를 찼다.
“쯧, 영악한 놈들!”
퍼져나갔던 회색의 영력이 갑자기 역류하며 한 지점으로 빨려들어갔다.
준혁도 가만히 기다리지 않았다.
“화룡연무!”
어지럽게 두 손을 움직이며 바르게 스킬을 전개한다.
순식간에 10개의 술식진이 떠올랐고, 그 속에서 거대한 불길이 솟구쳤다.
화르르륵!
동시에 튀어나온 10마리 화룡이 무시무시한 열기를 품은 채 영력 속으로 파고 들었다.
경천동지할 굉음과 함께 거대한 열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그리고 영력의 안개 속에서 들리는 한 줄기의 음성.
-늦었다!
그 소리와 함께 안개 속에서 뭔가 거대한 것이 떨어져내렸다.
쿠우웅-!
준혁의 손에 죽은 놈의 몸뚱이가 새까맣게 탄 채 조각조각 흩어져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타난 놈은, 한 마리의 굉황이었다.
다만 그 크기가 원래 있던 놈의 딱 세 배 크기였다.
준혁의 태산인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넷 중 한 놈이 제 몸을 내어주고 다른 세 놈을 지킨 것이었다.
그리고 머리가 터져나가며 제 영력을 발산해 남은 세 마리에게 전해 주었고, 남은 세 마리가 아예 하나로 합쳐 버린 것이었다.
비록 복제품이기는 하나, 고차원이면서 똑같은 자아를 품고 있는 놈들이다 보니 빠르게 상황의 해결책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인간이라면 똑같은 놈이라도 그 짧은 시간 동안 희생할 자를 정할 수 없다.
인간 특유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놈들은 그런 게 없다.
그리고 제 자아를 죽이고 하나로 합쳐지는 것 또한 거리낌이 없다.
생명체이면서도 높은 차원의 사고 방식 때문에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결정이 가능한 것이다.
이는 마치 고도의 인공지능이 가장 효율적인 결론만을 도출하기 위해 사고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크다, 커.”
카이르무스의 몸뚱이를 재조합하고, 그 몸뚱이 3체가 합쳐졌으니 당연하다.
물론 굉황의 진짜 본체는 이보다 더 컸다.
지금의 크기는 어디까지나 카이르무스의 육체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었다.
육체의 기본 밀도와 질량은 변하지 않는 탓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
[야, 너 괜찮냐?]
린디웨가 급히 물었다. 준혁이 무릎을 부르르 떨고 있는 탓이었다.
[영박]과 [태산인], 그리고 10번의 [화룡연무]를 한꺼번에 쏟아낸 탓에 영력이 순식간에 고갈된 탓이었다.
린디웨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준혁의 얼굴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내가 말 안 했냐? 나 아무 생각없이 싸우는 놈 아니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