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받고 각성 더!-107화 (107/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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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장. 복제품#1-

[영화]는 자동 통역 스킬이다.

배면계 시스템은 다양한 인종과 언어권의 사람들을 한곳에 소환한다. 서로 힘을 합쳐야 하는 사람들의 의사소통은 필수요소.

그런 이유로 기본 장착되는 스킬이었다.

하지만 [영화]가 영향력을 발휘하는 범위는 소리로 내는 ‘말’에 한정한다.

손으로 쓰는 ‘글자’를 번역해주지는 않는다.

그런 탓에 리쉬옌이 유민섭 등에게 문자로 질문을 하라고 했던 것은 결코 성립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러니까 저도 이론을 알겠어요. 그런데 솔직히 이론을 아는 것과 이론을 실제로 구현하는 건 완전 별개잖아요. 안 그래요?」

스마트폰 스피커에서 강이찬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문자로는 절대 불가능한 탓에 다자간 음성 채팅 앱을 설치해 그것으로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메신저 앱의 단체방과 비슷한 형태로 화면에는 참가자들의 이름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다만, 한글을 모르는 리쉬옌은 조금도 구분하지 못했다.

원래는 강이찬이 영상 통화를 하자고 제안했지만, 카메라 울렁증이 있는 리쉬옌이 한사코 거부했다.

그 카메라와 영상 통화는 다르지 않으냐고 강이찬이 밀어붙여 보았지만, 리쉬옌은 완강했다.

그때 또 한 명의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는 되는데요?」

양태군이었다.

지금 이 다자간 음성 채팅 앱에는 마법사들은 물론, 최유나에게 훈련 받는 이들까지 모두 참가한 상태였다.

린디웨가 꺼냈던 무의식적인 필터링이라는 것이 꽤 그럴싸했기에 모두에게 적용될 거라 본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되니 안 되니 하는 이야기는,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양태군은 이미 자신의 마나를 감지할 수 있는 덕분인지 심장 박동 소리도 들린다고 했다.

리쉬옌이 짚은 지점이 의외로 이 훈련의 핵심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일 수도 있었다.

다만, 그것이 꼭 좋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아, 되는 사람은 빠져요. 그냥, 할 거 하시라니까?」

강이찬이 시기심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긴, 기본 우리가 마법사하고는 좀 다르니까…….」

「쳇! 부러워 죽겠네.」

강이찬 답지 않게 말투가 꽤 뾰족했다. 훈련에 진전이 없다 보니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꽤 쌓인 탓이었다.

「그럼 우리는 일단 빠지겠습니다.」

양태군이 그 말과 함께 참가했던 육체 계열 헌터들이 단체방에서 우르르 퇴장했다.

그리고 채팅방에는 마법사들만 잔뜩 남아 있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참석한 데 반해 대화는 없었다.

진전이 없으니 논의할 주제조차 없는 탓이었다.

게다가 사실은 리쉬옌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우울한 표정의 리쉬옌은 가사 상태에 빠진 린디웨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강이찬의 영상 통화 제안을 거절한 데는 이 상황도 영향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이 광경을 보여주는 것도, 자신의 우울한 얼굴을 드러내는 것도 싫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어? 가만!」

강이찬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뭐? 왜 그래요?」

뒤이어 유민섭이 잔뜩 기대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 뭔가 방법을 찾은 거 같은데? 아, 일단은 저도 퇴장합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강이찬이 단체방에서 나갔고, 다른 이들도 뒤따라 퇴장했다.

그리고 홀로 남게 된 리쉬옌도 자연스레 다자간 음성 채팅앱을 종료했다.

‘린디웨…….’

주변이 조용해지자 리쉬옌의 얼굴이 한층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배면계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서로를 의지했던 두 사람이었다.

서로 목숨을 구한 일만 해도 일일이 세는 게 힘들 정도였다.

친자매보다 더 깊은 관계인 두 사람이었다.

조금 과장하면 리쉬옌 삶의 버팀목이 린디웨였다.

그런데 갑자기 린디웨는 죽었고, 자신은 시스템의 아바타라는 말을 하니 그 충격이야 오죽하겠는가.

“후우~”

짙은 한숨이 리쉬옌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사실 리쉬옌의 두 눈에는 아직도 불신의 불씨가 남아 있었다.

린디웨가 직접 게이트를 열고, 시스템 메시지를 띄우는 모습까지 보았는데도, 그 사실은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린디웨가 흘린 눈물 때문이었다.

진짜 린디웨가 죽었다면 그 눈물을 뭐란 말인가?

한편으로는 붙들고 있는 기대만큼 불안감도 덩달아 커졌다.

그녀가 시스템을 조종할 수 있다는 점은 명백히 눈으로 확인한 탓이었다.

“하아!”

또 한 번 짙은 한숨이 리쉬옌의 입가에 머물다 흩어졌다.

그때 리쉬옌의 전화벨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催柔娜’, 최유나였다.

“여보세요?”

「유나예요.」

“네, 유나 씨. 무슨 일이라도?”

그런데 정작 전화를 걸어온 최유나가 말이 없다.

하지만 리쉬옌은 신경 쓰지 않았다.

최유나가 단순히 무뚝뚝한 것이 아니라 대화를 나누는 것에 어색해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먼저 전화를 걸고도 한참을 말을 하지 않는 경우도 여러번 겪었었다.

한참만에 최유나가 입을 열었다.

「괜찮나요?」

뜬금없는 물음에 리쉬옌이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최유나가 이렇게 안부를 물을 정도로 살가운 성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목소리, 힘들어 보여요.」

“아…….”

지금, 이 순간 리쉬옌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최유나였다.

린디웨를 빼면 같은 배면계 출신이 준혁이 가장 접점이 많았지만, 행동파인 데다 매사에 거리낌이 없는 준혁의 스타일과 리쉬옌의 소심한 성격은 둘 사이에 가까워지기 힘든 벽으로 존재했다.

그에 반해, 최유나의 훈련을 도맡아 한 사람이 리쉬옌이었다. 항상 붙어 지낸 것이나 다름 없었다.

거기에 더해, 소심한 리쉬옌과 무뚝뚝하고 말을 잘 못하는 최유나의 성격이 묘하게 잘 어울렸다.

그렇기에 최유나는 리쉬옌의 목소리에서 평소와 다른 무언가를 읽을 수 있었고 이렇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괜찮……아요.”

리쉬옌이 힘겹게 대답을 했다.

「네, 그래요.」

최유나의 대답은 여전히 무뚝뚝했다. 하지만 리쉬옌은 그 속에서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이만 끊어요.」

“잠깐!”

통화를 마치려는 최유나를 리쉬옌이 급히 붙들었다.

「네?」

“고마워요.”

「아! 네……. 끊어요.」

그렇게 말을 마친 최유나가 먼저 통화를 마무리했다.

***

-야, 변태.

[허, 그거 좀 그만하지? 내가 왜 변태냐?]

-변태를 변태라 했는데, 왜 변태냐고 물으면…….

[웬 고릿적 드립이냐?]

-아무튼, 이 방향이 맞기는 맞는 거지?

[믿어라, 쫌!]

린디웨의 짜증에 준혁은 입을 다물기는 했으나 찌푸린 표정을 풀지는 못했다.

몬스터의 웨이브는 준혁이 투헤드 오거 무리를 쓰러트린 후에도 무려 세 차례나 더 밀려왔다.

준혁으로서는 별로 도움 될 것도 없는 싸움이었지만, 적사를 급격하게 성장시킬 수 있었던 기회이기도 했다.

한껏 먹고 무식할 정도로 몸집을 불린 적사는 지금 소형화한 채 준혁의 왼쪽 팔뚝에 감겨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었다.

그렇게 웨이브를 모두 없앤 후 준혁은 린디웨가 알려주는 방향으로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벌써 일곱 시간째였다.

-그냥 뛰자니까?

[안돼. 너무 빨라서 방향 틀어진다니까?]

“하아!”

급기야 길게 한숨을 내뿜었다.

터덜터덜 걷던 준혁이 슬쩍 팔뚝을 들어 잠든 적사를 보며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어지간히 거세게 팔을 흔들어도 적사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잠만 자고 있었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짐승이 따로 없……. 아, 짐승은 짐승이지.

[드립이라고 친 거?]

-진심이거든?

[이제 얼마 안 남았어.]

-허허, 그거 아냐?

[뭐?]

-다 와 간다. 끝나간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응?]

-이게 내가 제일 안 믿는 말이라는 거. 거의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와 동급이지.

[아무튼 성격하고는.]

그때였다.

팔뚝에 감겨 얌전히 자고 있던 적사가 갑자기 거칠게 몸부림쳤다.

-뭐야? 왜?

키악!

짧은 소음에 린디웨가 곧바로 번혁을 했다.

[뭔가 온다는…….]

“이거 뭐야!”

린디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준혁이 허리춤의 무상곤을 뽑아 들었다.

주변의 풍경에 변화가 찾아온 것도 그때였다.

쿠르르르릉!

묵직한 진동과 동시에 배경처럼 사방에 떠 있던 행성들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왜 그래?]

준혁의 상태창에 갇혀 있는 거나 다름없는 린디웨는 느끼지 못하는 무언가.

-짐승 새끼들이 왜?

[뭐라고?]

기겁한 린디웨의 시스템 메시지가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준혁이 ‘짐승 새끼’라고 지칭하는 존재는 한 부류 밖에 없었다.

배면계, 그곳의 괴물들이었다.

-신수급!

[이런 미친!]

급기야 배경에서 흔들리던 행성들이 갑자기 낙하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 또한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바로 머리 위에 떠있는 행성들이 한꺼번에 낙하하는데, 실제적인 충격이 없었다.

준혁이 서 있는 배경은 우주 공간의 한 가운데.

떨어지는 것은 머리 위의 행성들 만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지면 밑의 행성들까지도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주변의 모든 배경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였다.

하늘 위의 공간이 거대하게 일그러지더니 무언가가 일그러진 공간을 찢고 튀어나왔다.

“씨발!”

육성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하늘의 일그러진 공간은 모두 4개 였고, 튀어나온 무언가도 모두 4마리였다.

“굉황?”

-김준혁? 엽사, 도살자 김준혁인가?

굉황이었다.

게이트 돔 내부에 발생한 게이트 너머에서 만났던, 골드 드래곤 카이르무스의 몸뚱이를 뒤집어 쓴 굉황이었다.

그것도 4마리 모두가 문제의 그 ‘굉황’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너는 나인가?

-어떻게 내가 또 있을 수 있지?

카이르무스에 빙의한 4마리의 굉황이 서로를 보며 당혹스러운 음성으로 묻는다.

준혁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토론에 들어갔다.

그 광경을 본 준혁이 곧장 린디웨에게 물었다.

-야, 이거…….

[그래, 데이터 복제.]

-이게 가능해?

[전에 말한 카이르무스에 빙의한 굉황 맞지?]

-맞아.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린디웨는 메시지를 멈췄다가 곧장 이었다.

[그 당시 카이르무스의 상태 데이터를 시스템이 갖고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말이 안 되지. 던전 시스템이 어떻게 영력을 다뤄?

[잊었냐? 여기 시스템은 80% 이상 배면계 시스템이랑 융합됐어.]

-아, 그렇지. 근데 사실, 이러나 저러나 저 짐승 새끼들은 쳐죽여야 하는 거잖아.

[혼자? 4마리를?]

-어차피 본체가 온 것도 아니잖아. 걱정하지 마.

말을 마친 준혁이 4마리 굉황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오른손으로 왼 팔뚝의 적사를 쓰다음으며 물었다.

“준비됐냐?”

그런데 적사의 반응이 이상했다.

슬그머니 준혁의 시선을 피하더니 이내 대가리를 팔뚝에 탁 붙이고 두 눈을 감는다.

물론, 눈을 감아도 뱀의 투명한 누꺼풀 탓에 눈감은 티가 조금도 나지 않았다.

“하, 이게 빠져가지고. 비협조적으로 나오겠다 이거지?”

으름장을 놓는 듯한 준혁의 말에 적사가 기다란 몸을 움찔 떨었다.

하지만 여전히 준혁의 시선을 외면한 채 버티고 있었다.

“이 돼지 시키, 이딴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적사는 그제야 고개를 준혁쪽으로 살짝 틀었다. 하지만 여전히 시선은 먼산을 보았다.

“그냥 환계로 돌려보낼까? 아, 아니지. 한 달쯤 굶겨버려?”

키하아아악!

갑자기 고개를 번쩍 치켜든 적사가 저 멀리 토론을 진행 중인 4마리 굉황을 향해 울부짖었다.

“아무튼 이 돼지 진짜…….”

키학, 키하악!

“가자, 돼지야.”

4마리 굉황에게로 향하는 준혁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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