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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장. 적사, 그리고 포식#2-
뱀이라는 동물을 먹는다는 행위를 할 때 씹지 않는다.
턱관절이 없기에 주둥이를 위아래, 좌우로 최대한 늘여 먹잇감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뱃속에서 서서히 소화 시킨다.
몸뚱이도 꽤 늘어나기에 제 몸통보다 큰 먹잇감도 무리 없이 삼킬 수 있다.
물론, 가끔은 감당할 수 없는 먹잇감을 삼키는 바람에 배가 터져 죽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환수이기는 하지만 적사도 뱀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먹이를 통재로 삼킨다.
그것도, 절대 물리적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먹잇감까지 소화할 수 있었다.
[포식]이라는 스킬이었다.
청랑, 흑호, 백효가 사용하는 [강식]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적사의 성장 스킬이었다.
[하, 하하! 미쳤다, 진짜.]
린디웨의 매우 솔직한, 그리고 인간적인 평가 메시지가 떠올랐다.
폭풍 같은 기세로 엘프들을 학살하는 준혁의 뒤로 곳곳에 시뻘건 뱀 허물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똬리를 튼 채 혓바닥을 낼름거리고 있는 놈은 거대한 붉은 구렁이였다.
몸통은 성인 남자 허리둘레쯤 되고, 몸 길이는 머리에서 꼬리까지 거의 10m에 육박했다.
린디웨가 괜히 미쳤다고 말한 게 아니었다.
정말 말 그대로 미친 듯한 성장이었다.
준혁이 처음 몰려오던 괴물들을 보며 훌륭한 성장 공급원이라고 말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첫 번째 웨이브를 건너뛰고 두 번째부터 먹이기 시작한 이유는 [포식]도 [강식]처럼 섭취 대상이 강할수록 성장 효율이 높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린디웨가 놀란 점은 또 있었다.
[야, 김준혁.]
-왜?
[저놈 저거 정상이냐?]
린디웨의 물음에 준혁이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이놈들 상태가 더 정상이 아닌 거 같은데?
엘프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억수처럼 쏟아지던 화살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이미 엘프의 절반이 준혁에게 학살당한 상태였다.
그리고 남은 절반의 엘프들의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얼굴로 상체를 한껏 뒤로 젖히고 있었다. 그런 반면 두 발은 주춤거리면서도 끊임없이 준혁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두 발마저 엘프들은 어떻게든 멈추려고 기를 쓰는 듯한 모습이었다.
[본능과 룰 사이의 괴리.]
-야.
[왜?]
-내가 머리가 나쁘지 않거든?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최소한 아는 용어로 이야기하자는 말이다. 시스템에 대해서 아는 건 너밖에 없거든?
그제야 준혁의 말을 이해한 린디웨가 빠르게 메시지를 띄웠다.
[쟤들은 일종의 복제품이야.]
-응? 아, 아아. 그래 복제품.
잠시 멈칫했지만 금세 이해한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트 너머의 던전에는 괴물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한 번 공략을 끝낸 던전도 흔히 리젠이라 불리는 현상 후에 들어가면, 똑같은 괴물이 재등장한다.
아마도 그걸 두고 복제품이라 말하는 것이리라.
[한 번 등장했다가 소멸한 게이트가 다른 곳에서 다시 생성되기도 하잖아?]
-그래서?
[이게 원본은 어딘가에 있고, 마나를 이용해 그 원본과 똑같은 괴물을 만들어내는 거야. 즉, 생명체의 형태를 취하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마나 덩어리라는 말이지.]
-그런데 그 원본은 어디 있는데?
[글쎄? 그것까지는 나도 알 수가 없는데?]
-아무튼, 그게 지금 이놈들 상태랑 무슨 상관이야?
[아, 그래. 마나를 이용해서 복제를 할 때 시스템은 그 복제품에 한 가지 절대적인 명령을 심어. 보통은 던전에 침입한 인간을 모두 죽여라. 뭐, 그런 식? 그게 룰이야.]
-그럼 혹시 이놈들한테 주입된 룰은 나를 죽여라, 그런 거?
[그렇겠지? 그런데 복제품이기는 해도 원본과 완벽하게 똑같으니 생명체로서의 생존 본능도 있는 거지. 그 괴리 때문에 그래.]
-듣고 보니 좀 불쌍한 거 같기도 하고?
[그래도 어쩌겠…….]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겠다는 말은 절대 아니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준혁이 몸을 날렸다.
싸울 의지가 없는 놈들이었다.
원래도 상대가 안 되는 놈들인데 의지조차 없으니 휘두르면 휘두르는 족족 죽어나갔다.
[인간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네.]
-웃기시네. 이것들이 마나로 빚은 복제품이라고 말한 건 너다.
[그래도 저렇게 움직이는데 불쌍해 보이지 않냐?]
-그대로 두면 다음으로 못 넘어가는 거 아냐?
[맞아.]
-근데 왠 시비?
[뭐, 그냥……. 아무튼 적사 저거 아직도 배고프다는데?]
-맞아. 그래서 내가 가끔 빨간 돼지라고 부르기도 하지.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준혁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엘프를 죽여 쓰러트리는 데는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후우!”
짧게 숨을 고르는 준혁을 향해 린디웨가 재차 질문을 띄웠다.
[그런데 적사 저놈은 배고프다면서 왜 안 먹냐?]
-이제 엘프들은 더 삼켜봐야 성장 못 하니까.
[쓸데없이 입이 짧은 놈이네.]
-큭,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인 거 같네.
짧게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또 한 번 지면이 울렸다.
3차 웨이브의 시작이었다.
쿠쿠쿠쿠쿵-!
그워어어억!
엘프 군대가 올 때의 정연한 발소기와 본질적으로 다른 중량이 느껴졌다.
-대가리 둘 달린 놈이네?
저 멀리서 아우성치며 달려오는 거대한 녹색의 괴물들이 있었다.
어깨 위에 두 개의 머리가 달린 투헤드 오거 무리였다.
직전에 맞닥뜨린 엘프 군대의 질서정연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두 쌍의 눈에 광포한 빛을 머금은 채 무작정 달려올 뿐이었다.
-가자, 돼지야!
하지만 적사는 준혁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키하아아아~
적사는 뭐가 그리 좋은지 기분 좋은 바람소리를 뱉으며 저만치 앞서 기어가고 있었다.
엘프보다 강한 먹잇감이 등장하자 흥분해서 냅다 몸을 날린 것이다.
-아오, 저 돼지새끼!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가?
준혁이 한탄을 터트리며 허탈한 표정으로 발을 멈췄다.
그리고 린디웨는 걱정스러운 듯 메시지를 올렸다.
[야, 왜 멈춰? 같이 가야지.]
-놔둬.
[저러다 당하면 어쩌려고?]
-괜찮아.
[쟤는 아직 성장도 별로 안 한……. 헉!]
꾸준히 올라오던 린디웨의 메시지가 갑자기 멈췄다.
키하아아~
기분 좋은, 포효 같지 않은 포효를 터트린 적사가 아가리를 쩍쩍 벌렸다.
그리고 광포하게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투헤드 오거들을 쉴 새 없이 꿀떡꿀떡 삼켜댔다.
한 마리 삼킬 때마다 적사의 몸뚱이에서 옅은 붉은 빛이 번쩍였다.
[허, 허허! 미쳤네, 미쳤어.]
린디웨의 시스템 메시지에 연달아 탄성이 맺혔다.
확실히 신기해 보이기는 했다.
적사의 몸통은 어른 남자의 허리둘레 정도였다.
그에 반해 투헤드 오거는 말 그대로 거인이다.
그런 거인을 쉬지 않고 집어삼키는데, 몸통이 부풀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그저 옅은 붉은 빛이 한 번 스치고 나면, 그 직후 적사는 또 다른 투헤드 오거를 삼킬 뿐이다.
처음 한 마리씩 마주칠때와 달리 적사는 어느새 투헤드 오거 무리에 싸여있었다.
펑, 퍼퍼퍼펑!
적사를 에워싼 투헤드 오거들이 쉴 새 없이 몽둥이를 내리쳤다.
서로를 향해 배틀 크라이의 포효를 터트리고, 순간적으로 양팔의 근육이 거대하게 부풀고, 몽둥이에는 짙은 오러까지 휘감긴다.
쉴 틈 없는 몽둥이 세례에도 불구하고 적사는 끊임없이 식탐을 부리며 아가리를 벌렸다.
쏟아지는 몽둥이질이 적사의 몸을 두드렸지만, 오히려 더욱 빠른 속도로 튕겨날 뿐이었다.
[우와, 우와!]
린디웨는 쉴 새 없이 감탄을 터트릴 뿐이었다.
망막에 맺히는 그 메시지들을 보던 준혁이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 감탄사들, 글자로 보니까 되에 어색한 거 아냐?
[그런가?]
-무슨 책 읽는 것도 아니고……. 음성 지원이 되는 것도 아니고.
[신경 끄셔. 그나저나 적사 저 녀석 볼수록 신기하네?]
한참을 투헤드 오거를 삼켜대던 적사의 몸에서 짙은 붉은 빛이 터져나왔다.
크우우우!
몽둥이를 휘두르던 투헤드 오거들이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치는 순간, 적사의 등판이 쩍하고 갈라지더니 순식간에 조금 더 길고 두꺼워진 적사가 튀어나왔다.
허물을 벗는 탈피를 순식간에 해버린 것이다.
-야, 근데…….
[응?]
-생각해 보니 넌 시스템이잖아.
[그렇지. 왜?]
-근데 환수에 대해서 왜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거 같으냐?
[모르니까.]
-응?
[모른다고.]
-왜?
준혁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시스템이 어떻게 자기 시스템에 속해 있는 환수에 대해 모른단 말인가?
[아, 네가 보기에는 이상할 수도 있겠네. 환계와 배면계는 전혀 별개의 차원이야.]
-뭐?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배면계에서 지낸 시간이 무려 10년이었다.
혼자 남아 고군분투하며 외로움에 치를 떨었다. 그러다 혼원급으로 올라선 7년 차에 청랑, 흑호, 백효, 적사와 계약을 맺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그 네 마리의 환수가 없었다면 그 절절한 외로움에 정신이 버티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랬는데 그 환계가 배면계와 별개의 차원이라니.
-그게 어떻게 가능한데?
[특별히 대단한 게 있는 건 아니고. 일종의 계약관계? 그런데 사실 혼원급이 거의 안 나와서 있으나마나한 그런 계약.]
-그렇군…….
[네가 유일하게 환계의 환수하고 계약한 케이스였어. 어찌나 신기하던지. 네가 청랑이 끌어안고 우는 거 보고, 당시는 그냥 시스템이었는데도 기분이 참…….]
-그렇지 그럴 때가 있었……. 어? 잠깐, 야.
[응?]
-너 설마 10년 내내 관음하고 있었던…….
[아, 갑자기 상태가 안 좋네. 좀 쉬고 올게.]
그것을 마지막으로 린디웨의 메시지가 더는 올라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시군요 하고 보내 줄 준혁이 아니었다.
-튀어 나와라.
-어이, 관음 시스템.
-당장 나와라, 관음 변태 시스템.
하지만 린디웨는 여전히 묵묵부답. 급기야 준혁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올 때까지 여기서 한 발짝도 안 움직인다.
그렇게 하면 준혁도 영원히 나갈 수 없지만, 준혁은 한다면 하는 성격이었다.
그 혹독한 배면계에서도 무려 10년을 버틴 독종이었다.
준혁이 팔짱을 낀 채 두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린디웨가 빠른 항복을 선언했다.
[야, 시스템은 원래 소환자들을 지켜볼 의무가 있거든?]
-그래서 잘 했다고?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지.]
사실 린디웨로서는 조금 억울할 만한 이야기였다.
시스템으로서 당연한 룰이었고, 그 룰대로 시스템이 반응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지금이야 아바타로서 린디웨와 인격이 섞여 있지만, 당시는 말 그대로 감정도 없는 ‘시스템’일 뿐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대고 관음이니 변태니 하는 것은 누명에 가깝다.
더군다나 그런 말에 반응하는 것 역시 인간의 인격과 섞여 있기 때문이다.
원래의 시스템이라면 이런 말에 반응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린디웨의 입장일뿐, 준혁의 입장은 또 다르다.
-그래서 잘 했다고?
[아니, 이건 그렇게 따질 문제가 아니라니까?]
-그렇게 어물쩍 넘어가겠다고?
[…….]
궁지에 몰린 린디웨는 메시지 창에 말줄임표까지 띄워 올렸다.
-또 말이 없네?
날카로운 준혁의 시선에 무거운 압박감을 느낀 린디웨가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미안.]
-알았다.
그리고 준혁은 거짓말처럼 사과를 받아들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조금 낯선 소리가 울렸다.
키히익!
겁먹은 듯한 적사의 외침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소형화로 작아진 적사가 기겁하며 이쪽을 향해 기어오고 있었다.
적사의 뒤쪽에는 다른 놈들의 두 배는 되는 거대한 투헤드 오거가 쫓아오고 있었다.
자신만만하게 투헤드 오거들을 먹어치우던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심지어 준혁의 몸을 바쁘게 타고 오르더니 준혁의 어깨 위에 똬리를 틀었다.
그리고 언제 혼비백산 도망을 쳤냐는 듯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입을 벌렸다.
키하아악!
린디웨가 메시지로 적사의 말을 번역했다.
[너네 우리 주인님한테 다 죽었어, 덤벼!]
부끄러움은 준혁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