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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장. 적사, 그리고 포식#1-
짙은 어둠에 잠긴 공간에 다섯 개의 게이트가 동시에 떠올랐다.
각각 금, 은, 적, 청, 녹색의 빛을 머금은 다섯 개의 게이트였다.
가장 처음 명멸하며 버럭 소리를 지른 것은 금색 게이트였다.
「정해진 시간도 아닌데 이리 갑자기 불러내면 어쩌자는 거냐!」
남은 네 개의 게이트에서도 거의 동시에 성토가 튀어나왔다.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겁니까?」
「긴급한 소집이 필요할 때를 위해 콜사인을 만들지 않았소?」
「그렇지. 그게 약속이지. 약속 따위 개나 주라는 그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참 행복하게 살겠네.」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죠. 그 어떤 급한 일이 있던, 이 일부터 따져야 한다고 봐요.」
다섯 모두가 서로를 향해 성토를 쏟아낸다.
하지만 그 순간 다섯 개의 게이트 사이에 예의 그 홀로그램 같은 지구본이 떠올랐다.
「음?」
「뭐죠? 이건 또 누가?」
「가만, 잠깐 지켜봐요.」
다들 놀라는 가운데 홀로그램의 형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지구라는 행성의 형태가 흐릿해지고 뭔가 복잡한 어느 장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교하게 설계된 기계장치인가 싶으면, 끊임없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생명체의 내부 깊숙한 곳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이거 혹시?」
「시스템 내부인 거 같은데?」
「그럼 우리를 강제로 부른 게 시스템이란 말이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상황이 될 리가 없잖아요.」
홀로그램은 그 복잡한 광경의 한 지점을 끝없이 확대해나가기 시작했다.
확대, 다시 확대를 반복한 그 마지막.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던 다섯 게이트에서 동시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니!」
[저자는?」
「이게 가능한 일인가요?」
「믿을 수가 없군…….」
「김준혁!」
홀로그램 속의 준혁은 약간 휜 형태의 통로를 달리고 있었다.
한 손에는 금색에 먹색의 무늬가 들어간 밧줄을 쥐고 있었고, 통로를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다 준혁이 갑자기 멈춰서더니 손에 든 시커먼 몽둥이로 벽을 후려쳤다.
벽이 터져나가고, 김준혁이 그 뚫린 벽으로 몸을 날린 그때 홀로그램이 스위치라도 내린 듯 픽 하고 꺼져버렸다.
그리고 정적이 맴돌았다.
각각의 색깔을 지닌 다섯 개의 게이트는 느리게 명멸할 뿐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금색이었다.
「시스템의 요청이라……. 좋은 생각 있는 사람 있나?」
대답은 청색이 했다.
「좋은 생각? 있을 리가 없잖아. 우리도 접속할 수 없는 시스템 내부에 침입했는데, 우리는 시스템에 손조차 댈 수 없다는 걸 몰라? 도대체 생각을 안 할 거면 머리는 왜 달고 다니는 거야? 쓸데없이 무겁기만 할 텐데 이참에 떼고 다니지 그래?」
「이것이 감히! 그러니 다른 방법이 없는지 묻고 있는 거잖나!」
「본인이 생각을 하고 방법을 내보라고. 묻기만 하지 말고.」
「도저히 안 되겠군. 김준혁을 떠나 당장 네년 모가지부터 따야겠다. 어디냐? 내 당장 달려가지!」
「흥, 년인지 놈인지 어떻게 알고 ‘네년’이라는 건데? 그러니 머리가 없지. 여기에 자기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이가 누가 있다고?」
「이 년이 그래도 끝까지!」
목소리 변조에 대해 말했음에도 금색은 청색을 여자로 칭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항상 그런 목소리로 등장하니 인식이 고착된 탓이다.
황급히 싸움을 말린 이는 녹색이었다.
「그만 해요. 우리끼리 싸워서 어쩌자는 거에요?」
뒤이어 은색과 적색도 한마디씩 하며 과열된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맞습니다. 이런 분열은 좋지 않습니다.」
「지금 상대해야 할 자는 김준혁인데 왜 우리끼리 싸운단 말이오?」
녹색, 은색, 적색의 중재에 금색과 청색의 언쟁은 빠르게 소강상태로 접어 들었다.
이번에도 침묵을 깬 이는 금색이었다.
자칭 ‘5인 위원회’라 불리는 이 모임의 다섯 중 가장 중립적인 이가 금색이었고, 그런 이유로 항상 주도하는 편이었다.
「그럼 지금 논의하자. 청색은 입닥치고 있다가 마지막에 말하고, 나머지가 말해 봐.」
다만, 반말에 공격적인 말투라 습관처럼 빈정거리는 청색과는 사이가 극도로 나빴다.
다만 청색도 이번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의 반응을 보인 이는 은색이었다.
「김준혁 이놈이 감히!」
항상 극존칭으로 차분하게 말하던 은색의 목소리에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
이는 다른 네 명조차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은색, 왜 그러죠? 평소답지 않게 많이 흥분했는데요? 개인적인 원한이라도…….」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게이트 다섯 개의 빛이 급하게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또 무슨 일…….」
「시스템에 이상이라도…….」
모두들 급하게 한 마디씩 하려 했으나, 각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섯 개의 게이트가 동시에 불이 꺼졌다.
닫혀 있던 눈꺼풀이 열리며 짙은 녹안이 빛을 번뜩였다.
“하, 이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리는 이는 다름 아닌 로건 베런즈였다.
“우리도 불가능한 시스템 침입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상황만 제대로 유도하면 꽤 재미있겠어.”
몸을 일으킨 로건 베런즈가 방향을 틀며 말했다.
“미스터 스미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면 짙은 갈색 머리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네, 치프.”
“지금 시간부로 탐색을 제외한 모든 임무를 중지합니다.”
“네!”
“그리고 모든 가용인원을 탐색 임무에 투입합니다.”
“알겠습니다!”
스미스라 불린 남자는 찰나의 틈도 없이 대답을 하고는 뛰듯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로건 베런즈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한층 깊어졌다.
***
쏴아아아-!
시원하게 퍼붓는 소나기 소리가 주변을 가득메웠다.
확실히 그것은 소나기였다.
다만,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은 화살 비라는 것이 여느 빗소리와 다를 뿐이었다.
하늘을 향해 사선으로 쏘아낸 화살은 일정 지점까지 상승했다가 하강곡선을 그리며 사선으로 쏟아지는 것이 당연한 물리 법칙이다.
하지만 지금 하늘을 뒤덮은 화살은 그 당연한 물리 법칙을 완전히 무시했다.
갑자기 물고기라도 된 듯 화살깃을 파르르 떨며 급격히 방향을 전환해 수평으로 긴 회전을 그린다.
떨어지던 화살이 거꾸로 솟구쳤다가 수직으로 낙하하는가 하면, 한 개의 화살이 대여섯 개로 증식하기도 했다.
심지어 땅속으로 파고들었다가 발밑에서 솟구치는 화살까지 있었다.
그 화살은 우주 공간으로 연출돼 육안으로는 그 지면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까지 뒤섞여 더욱 극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하, 누가 엘프 아니랄까봐!
준혁이 상대하는 1천의 군세는 엘프 군대였다.
그런 군대의 정체성을 반드시 보여주고 말겠다는 의지인지 1천이라는 병사가 모두 십여 발 이상의 화살을 날렸다.
1천 곱하기 10.
단순 계산만 해도 무려 1만 개에 달하는 화살들이 준혁을 노리고 움직이는 셈이었다.
물론, 그중 단 한 대도 준혁에게 닿은 화살은 없었다.
탁, 타타탁!
30자루의 금문묵룡비가 빛살과 같은 속도로 날며 날아드는 화살을 쳐냈다.
금문묵룡삭은 한계까지 길이를 늘여 준혁의 주변을 감싸듯 휘돌고 있었다.
1만 대의 화살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해 보이는 전력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부분의 화살을 막아내고 있었다.
가끔 그 촘촘한 방어벽을 뚫고 들어오는 화살이 있었지만, 마지막은 준혁의 무상곤이었다.
물론, 준혁이 입고 있는 묵린갑과 매구탈만으로도 화살에는 충분한 방어력을 보인다.
마지막으로 준혁의 몸뚱이가, 겨우 화살 따위에 상처를 입을 수준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공격을 일일이 막는 이유는, 정말 만의 하나를 대비해서였다.
마나라는 것이 어떤 작용을 할지 알 수 없는 탓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런 것을 걱정하지 않았지만, 로건 베런즈와의 싸움을 겪은 후로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것이다.
양측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금묵묵룡비와 금문묵룡삭의 보호막 속에서 준혁은 거대한 활의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준혁의 손목을 타고 흘러나온 영력이 어느새 단단한 화살로 빚어져 시위에 얹혔다.
-그거 아냐?
[뭘?]
-우리 조상님들은 현실 세계 엘프였어.
[뭔 헛소리야?]
-조선은 글 읽는 선비의 교양과목이 활쏘기였던 나라거든.
[자꾸 이상한 소리 할래?]
-그런데 겨우 몬스터 따위에 활로 질 수는 없잖아?
[허!]
퉁, 투투투퉁!
영력으로 빚은 시커먼 화살들이 허공을 날았다.
날카롭게 허공을 꿰뚫은 화살들이 눈깜짝할 새 엘프들의 전열을 들쑤셨다.
푹, 푸푸푹!
“크악!”
삽시간에 비명이 몰아쳤다.
준혁이 쏘아낸 화살은 총알이라도 되는 듯 한꺼번에 대여섯 명을 꿰뚫으며 사방에 핏줄기를 뽑아 냈다.
그러는 동안에도 준혁은 쉴 새 없이 영력으로 화살을 빚어 날렸다.
-크으, 내가 아기살 쏘는 법만 알았어도!
[아주 혼자 쇼를 하세요.]
심드렁한 린디웨의 대꾸에도 준혁은 신이 나 화살을 날려댔다.
순식간에 엘프 군대 전열의 한 축이 와해 되었다.
-가자!
파앙-!
땅을 박찬 준혁의 신형이 날카로운 바람을 안고 날아갔다.
“물러나!”
“전열을 다듬어!”
엘프들의 외침이 준혁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이건 [영화] 때문에 쟤들 말을 알아듣는 거냐?
[아마도?]
-이런 건 참 가성비 좋단 말이지.
[싸우기나 하시지?]
-이미 하고 있거든?
어마어마한 군세에 포위당했어도 준혁은 한담을 나눌 정도로 여유로웠다.
실제로 린디웨와 말을 주고받으며 어느새 활에서 언월도로 형태를 바꾼 무상곤이 거센 피바람을 휘몰고 있었다.
스걱, 스걱!
“끄아아악!”
“컥!”
난무하는 것은 날카로운 절삭음과 단말마의 비명뿐이었다.
엘프들은 종특을 십분 발휘해 어마어마한 속도전으로 덤비고 있었지만, 준혁에게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리게 보였다.
엘프들은 난전 와중에도 준혁을 향해 송곳처럼 정교하게 화살을 날려보냈다.
허공에서 스스로 방향을 바꾸는 것은 당연하고, 심지어 눈에 보이지 않는 화살까지 뒤섞였다.
하지만 준혁에게는 그저 어린애들 장난으로만 보이는 수준.
부우웅-!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언월도의 길이를 조금씩 늘인 탓에 칼날의 길이가 어느새 10m에 달하는 기형적인 무기로 변했다.
당연히 늘어는 칼날의 길이만큼 한 번에 썰려 나가는 엘프의 숫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진짜 무쌍을 찍고 앉았네.]
린디웨가 심드렁한 감정을 잔뜩 담아 메시지를 띄운다.
키하아아-!
그리고 준혁의 손목에 감겨 있던 적사가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내뱉었다.
반응을 보인 쪽은 린디웨였다.
[쟤 왜 저래? 이 와중에 배고프다고 난리네?]
시스템의 아바타이기에 주인인 준혁보다 환수의 말을 더 잘 알아듣는 린디웨였다.
물론 준혁도 대강의 감정은 당연히 알아듣는다.
-그래, 많이 참았다. 이제 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적사가 준혁의 손목에서 튀어 나갔다.
적사가 향한 곳은 준혁의 뒤쪽 넓은 공간에 널려있는 엘프의 시체들이 있는 곳이었다.
[저, 저거 설마?]
린디웨의 당황한 메시지가 준혁의 시야를 한가득 메웠다.
한 엘프의 시체 앞에 멈춘 적사가 아가리를 쩍 벌렸다.
겨우 50cm 길이의 몸뚱이에 비해 말도 안 될 정도로 벌어진 아가리가 엘프의 시체를 그대로 넙죽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