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받고 각성 더!-104화 (104/240)

-104-

-38장. 침입#3-

[실험? 어떤거…….]

린디웨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준혁은 행동에 들어갔다.

어느새 꺼내든 무상곤이 짙은 영력을 머금은 채 공간을 갈랐다.

꽈앙-!

굉음과 동시에 준혁의 왼쪽 벽이 터져나가며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튜브형 통로를 생각하면, 원의 바깥쪽으로 난 구멍이었다.

-별로 들어가 보고 싶지는 않네?

터져나간 벽 바깥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어두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무(無)의 공간, 빛은 고사하고 어둠조차 존재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들어가 볼까?

[뭐? 이런 미친! 그랬다가 무슨 일이 생길 줄 알…….]

-짐 덩어리 조용.

일단 부딪치고 본다.

준혁은 원래 그런 인간이었다.

배면계에서 홀로 남아 신수라는 거대한 존재들과 싸웠을 때 스스로 쌓아 올린 성향이었다.

던전, 괴물, 헌터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가 없는데도 ‘골드 드래곤의 레어’에 무작정 밀고 들어간 것도 그런 이유였다.

여기서도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망설임 없이 뚫린 벽을 향해 한 걸음 밀어 넣었다.

변화는 일순간 찾아왔다.

주변의 풍경이 먼지처럼 사라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준혁의 앞에 예의 그 통로가 펼쳐져 있었다.

마치 눈앞에서 사진을 바꿔치기하는 것 같은 변화였다.

[후우!]

무슨 일이 생길까 조마조마하던 린디웨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준혁의 테스트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바깥쪽이 아닌 안쪽 벽을 무너트려 보고, 바닥과 천장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결과는 마찬가지.

천장이나 바닥을 뚫고 들어갔을 때는, 전체 광경이 갑자기 수직으로 전환되는 그 감각이 경이로움 마저 느낄 정도였다.

-달리는 것도, 부수는 것도 결과는 똑같다는 건데…….

그때 한 동안 잠자코 있던 린디웨가 불쑥 메시지를 띄웠다.

[조건과 결과.]

-응?

[어떠한 조건을 제시했을 때, 결과를 보여주도록 설계된 공간이야. 문제는 조건이 무엇이든 똑같다는 결과가 나온다는 점. 그런 식으로 일종의 보안 체계를 만들어 놓은 거 같아.]

잠시 린디웨의 말을 곱씹은 준혁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가 말한 조건이 내가 특정 방향으로 이동한다는 거고, 무조건 이동하는 방향의 전방에 오른쪽으로 휜 통로가 생성되는 결과가 나온다는 거지?

[오, 똑똑한데?]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은 이 장소를 빠져나가는 게 먼저였다.

-그런데 너 그걸 어떻게 아냐?

[아, 나름대로 좀 알아봤지.]

-무슨 수로? 제정신 유지하는 것도 힘들다며?

[짐 덩어리라며!]

-허, 발끈 하셨나봐?

[됐다!]

-그런데……. 만약 두 명 이상이 들어와서 각자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경우는 어떻게 되는 건데?

[각자가 별개의 조건이 돼.]

-즉, 서로 떨어져서 완전히 고립된다 이말이지?

[맞아.]

-그러면 그 조건에 혼란을 주면 되겠네.

[그게 무슨?]

이해를 못한 린디웨의 메시지가 준혁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실체가 있었다면 분명 고개를 갸웃거렸으리라.

그러거나 말거나 준혁은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허리춤의 금문묵룡삭을 풀더니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적사.

키하아아-

대답과 함께 준혁의 손목에 감겨 있던 붉은 뱀이 갈라진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스르륵 준혁의 발치로 내려와 똬리를 틀었다.

준혁은 금문묵룡삭의 한쪽 끝을 자신의 손목에 묶고, 반대쪽 끝을 늘어트려 적사의 꼬리로 향했다.

사라라락!

가벼운 소음과 함께 적사의 꼬리와 금문묵룡삭의 끄트머리가 얽혀들며 단단히 고정되었다.

키하아아악!

적사가 제 꼬리에 얽힌 밧줄이 마음에 안드는 듯 신경질적인 소리를 냈지만, 준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 그거 설마?]

-자, 이 상태로 적사와 내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면 그 조건은 어떻게 될까?

[글쎄? 그래도 결국 각각의 객체로 인식하지 않을까?]

-해보지 뭐.

말을 마친 후 준혁과 적사는 서로를 등진 채 나아갔다.

적사가 온몸을 바쁘게 구불거리며 빠르게 바닥을 기어나갔고, 준혁 또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채 100m도 움직이지 않아 반응이 왔다.

쿠쿠쿠쿵!

통로 전체가 잘게 흔들리며 소음이 울려퍼졌다.

[어라?]

예상치 못한 전개에 린디웨가 놀란 탄성을 터트린다.

준혁이 슬쩍 뒤를 돌아보니 통로에 이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준혁과 적사 사이의 통로의 휜 방향이 오른쪽과 왼쪽으로 쉴 새 없이 교차되고 있었다.

떨림과 소음은 그 여파였다.

-이거네.

[그러네. 예상치 못한 조건을 주니까 오류가 일어난 거야.]

-봤냐, 나의 위대함을?

[허!]

이제 남은 일은 하나였다.

성큼성큼 걷던 준혁의 두 발이 곧장 질주를 시작했다.

콰콰콰콱!

달리는 준혁의 뒤로 으깨진 바닥의 족적이 길게 남았다.

준혁 혼자만 달렸다면 당연히 어느 순간 사라질 흔적이지만, 지금은 적사와 이어져 있는 상태라 발자국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류를 더해준 것이었다.

콰르르르릉!

통로 전체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격렬한 흔들림에 금방이라도 통로가 무너질 것 같았다.

거기에 준혁이 결정타를 넣었다.

콰아앙-!

무상곤으로 벽을 뚫어 그 속으로 지체없이 뛰어들었다.

-됐다!

원래대로라면 눈앞에 통로가 생성되어야 했다. 하지만 벽의 구멍 너머에 있던 무의 공간은 변하지 못했다.

‘음!’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준혁은 발바닥을 통해 지면의 촉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변화가 준혁을 중심으로 찾아왔다.

휘이이잉-!

거센 바람이 갑자기 준혁의 온몸을 휘도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아무것도 없는 그 공간이 터져나가고, 눈앞에 새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어느새 돌아온 적사가 팔에 감기는 사이 주변을 살핀 준혁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던전 맞냐?

준혁이 직접 경험한 던전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던전과 헌터, 던전 부산물이 문명의 중요한 축 중 하나인 세상이니 기본 상식은 갖고 있었다.

모든 던전은 인간이 익히 알고 있는 자연환경을 갖고 있다.

괴물이 존재하고 생태계를 이루는 동식물의 형태는 다를지언정, 지표의 기본은 지구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땅과 물이 있고, 하늘 또한 존재하며 당연히 해와 달이 뜨고 구름이 끼며 눈과 비가 온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그런 요소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준혁은 지금 우주 한 가운데 서 있었다.

분명 발바닥에 지면을 밟고 있다는 느낌이 있는데 실제로는 우주 한가운데 떠 있었다.

머리 위로도, 발아래로도 끝없는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그때였다.

두두두두두-!

보이지도 않는 지면이 격렬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진동의 진원을 향해 시선을 돌린 준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던전 맞네.

[그러게. 그런데 좀 많지 않아?]

-많네. 하지만 저것은 훌륭한 성장 공급원이죠.

[무, 무슨 철 지난 소리를…….]

이번에도 린디웨의 메시지가 채 끝나기도 전에 준혁은 땅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저 멀리, 땅바닥도 없는데 뿌연 먼지를 피워올리며 달려오는 어마어마한 몬스터의 군세를 향해.

-이거 시스템이 꼬인 거지?

준혁이 달리는 와중에 물었다.

[무슨 소리야?]

-갑작스러운 우주 배경하며, 보이지도 않는데 단단한 바닥, 저 먼지, 그리고 머리 위에 저거 까지.

[응?]

린디웨는 현재 준혁의 상태창에 자신의 의식을 동화시킨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변을 살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 정상은 아니네.]

머리 바로 위에 미니어처 태양이 떠 있었다.

이글거리는 형태나 쉴 새 없이 명멸하는 플레어가 딱 봐도 태양이다.

하지만 조금도 뜨겁지 않았고, 거기서 퍼져나오는 빛은 그림자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 모든 현상이 이 공간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방증했다.

린디웨가 여력을 모두 소진해 현재의 상태를 살폈다.

[역시.]

-왜?

[네가 한 짓 때문에 시스템에 과부하가 일어났어. 그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이 거대한 시스템일 단숨에 엿먹이는 거 보면 아무튼 대단하긴 하다.]

-내가 원래 좀 하지.

[어이구, 말이나 못하면……. 나는 좀 쉰다.]

시스템을 살피기 위해 힘을 소진한 탓인지 린디웨는 더 이상 메시지를 띄우지 않았다.

그리고 준혁과 몬스터 군세가 마침내 맞닥트렸다.

차차차차창!

허공으로 떠올라 분열을 시작한 금문묵룡비가 30자루의 비수로 변해 준혁의 머리위에 편대를 짰다.

쉭, 쉬쉬쉿!

날카롭게 바람을 가른 30자루의 금문묵룡비가 연달아 괴물들을 꿰뚫기 시작했다.

푹, 푸푸푸푹!

쉴 새 없이 허공을 누비는 30자루의 비수는 준혁의 의지에 따라 쉴 새 없이 괴물들의 몸에 바람구멍을 뚫었다.

오크의 눈으로 파고든 비수가 두개골을 뚫었고, 오거의 목에서 굵은 핏줄기가 뿜어져나왔다.

사족 보행을 하는 동물형 괴물들이 다리를 꺾으며 바닥을 굴렀고, 뒤따라 달려오던 괴물들이 거기에 걸려 넘어지며 아우성을 지른다.

먼지에 이어 자욱하게 피어오른 피의 안개가 일대를 가득 뒤덮었다.

준혁은 금문묵룡삭도 아끼지 않았다.

사르르르륵!

제 스스로 둥금 매듭을 지은 금문묵룡삭이 허공을 날았다.

리자드맨의 목을 걸고 나면, 또 하나의 고리 매듭이 지어지며 그 옆에 있던 고블린의 목을 걸어 올린다.

꾸웩, 끄르륵!

억눌린, 혹은 가래끓는 소리와 함께 몬스터의 몸뚱이가 마치 구슬을 꿰듯 금문묵룡삭의 고리에 연달아 매달렸다.

마치 교수형을 당한 시체 다발을 이리저리 흔드는 듯 괴이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가장 무서운 이는 준혁이었다.

준혁의 손에 들린 무상곤이 어느새 언월도로 그 형태를 바꾸었다.

“후웁!”

짧게 숨을 고른다.

탁!

가볍게 바닥을 박찼다.

부우우우웅-!

가볍게 휘두른 언월도가 무직하게 바람을 끌어안자마자 수십 개의 잘린 목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무시무시한 살육전의 시작이었다.

크워어어어-!

오거가 배틀 크라이의 포효를 내지른다.

주변에 있던 모든 괴물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더니 급기야 초점을 잃고 날뛴다.

하지만 그래봐야 준혁의 언월도를 막을 수 있는 괴물은 없었다.

붉은, 혹은 시커멓거나 급기야 푸르기까지 한 각양각색의 핏줄기가 허공을 찬란하게 물들인다.

서걱, 서거걱!

준혁의 언월도는 단 한 차례의 막힘도 없이 너무도 수월하게 커다란 원을 그려냈다.

머리, 목, 몸통과 팔다리. 그 무엇이든 거대한 언월도의 칼날에 걸리는 것은 여지없이 잘려나갔다.

그 뒤에 남는 것은 아직 죽지 못한 괴물의 몸부림과 거기에 휩쓸린 괴물의 시체들뿐.

그 어마어마하던 몬스터의 군세가 순식간에 시체의 산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1차 군세에 지나지 않았다.

척, 척척척!

질서정연한 발소리와 함께 2차 군세가 나타났다.

두 번째 군세를 확인한 준혁의 입꼬리가 살포시 말려 올라갔다.

“재밌겠는데?”

육성으로 말하지 말라던 린디웨의 말마저 무시한 채 이쪽으로 다가오는 군세, 아니 군대를 바라보았다.

화려한 투구와 갑옷을 입은 그 군대는 다름 아닌 엘프의 군대였다.

물경 1천은 될 법한 대군.

그 앞에 혈혈단신 홀로선 준혁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이거 딱 그거 같은데?”

들어주는 이는 없지만, 그와 상관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만큼 신이 나 있었다.

“디펜스 게임.”

딱 그런 느낌이었다.

1차 웨이브가 끝나니 두 번째 웨이브가 몰려오는 느낌.

콰앙!

거세게 땅을 박찬 준혁의 신형이 총구를 벗어난 탄두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때 잠자코 쉬고 있던 린디웨가 불쑥 메시지를 올렸다.

[디펜스는 무슨, 무쌍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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