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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장. 침입#2-
“어?”
갑작스레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에 리쉬옌이 반사적으로 린디웨를 보았다.
하지만 린디웨는 입을 여는 대신 시스템 메시지로만 말을 이어갔다.
[린디웨는 죽었다. 나는 배면계 시스템의 아바타.]
입을 열어 말을 했다가는 육체의 기억과 감정에 반응해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린디웨, 왜 그래요? 이거, 이 시스템 메시지! 이거 어떻게 된 거에요?”
하지만 린디웨는 얼굴이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눈물에 엉망진창이 되었으면서도 리쉬예능 직시하며 시스템 메시지를 이어갔다.
[린디웨의 죽음은…….]
“멈춰! 아니야!”
리쉬옌의 소극적인 반항이 터져나왔으나, 린디웨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진짜 린디웨의 운명과 현재의 상황이 모두 리쉬옌에게 전해졌다.
[지금까지 속여 온 점에 대한 사과를 먼저 하지. 거짓으로 마음을 아프게 만든 점, 미안하다.]
“…….”
[이렇게 불러서 사실을 말한 이유는 호법이 필요하기 때문이야.]
리쉬옌은 린디웨와 시선을 마주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린디웨도 대답을 기다린 게 아니란 듯 메시지를 이었다.
[저쪽 시스템에 물리적으로 접속하기 위해 나는 잠시 김준혁과 움직여야해. 그런데 그 시간 동안 내 육체는 가사 상태에 빠질 거야. 그걸 지켜줄 사람이 필요해.]
하지만 리쉬옌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것이 내성적인 리쉬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항의였다.
그리고 그 항의는 린디웨의 자아를 무겁게 뒤흔들었다.
“후!”
짧게 숨을 고른 린디웨는 급히 리쉬옌의 시선을 피해 준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가자.]
“뭐? 이렇게 바로?”
[준비해.]
괜히 시간을 끌어 봐야 감정의 동요만 커질 뿐이었다.
린디웨인 동시에 시스템 아바타이기도 한 ‘그녀’는 조금이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알았다. 가자. 뭐,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준혁은 그런 감정을 세세하게 신경 쓸 정도로 섬세한 성격이 아니었다.
지이이잉-!
옅은 울림과 동시에 방 한가운데 린디웨의 영력과 같은 푸르스름한 색의 게이트가 떠올랐다.
뒤이어 린디웨가 스르르 몸을 기울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누워 잠이 든 듯 움직임을 멈췄다.
[가자.]
그 대신 준혁의 눈앞에는 린디웨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미 시스템 아바타로서의 자아 대부분을 준혁의 상태창에 얹은 것이었다.
준혁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리쉬옌을 향해 말했다.
“갔다 올게.”
그리고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게이트 너머로 몸을 던졌다.
털썩!
일어선 채 장승처럼 굳어 있던 리쉬옌이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진 듯 소파에 몸을 묻었다.
뒤늦게 모든 사고 회로가 정상을 되찾고, 그에 따라 감정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리쉬옌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멈추지 않을 기세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그녀를 위로해 줄 사람은 없었다.
***
“저렇게 멘탈을 흔들어도 괜찮은 거냐?”
게이트를 넘어오자마자 준혁이 물었다.
[응?]
“호위하라고 불렀잖아. 그런데 저렇게 멘탈이 터졌는데 제대로 호위할 수 있겠냐고.”
준혁이 무신경한 성격이기는 하지만 상황을 읽는 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리쉬옌이 소심해 보여도 할 땐 하는 애거든?]
“그야 나도 알지.”
이는 준혁도 공감하는 바였다.
평소에는 한없이 소심한데, 싸움이 벌어지면 ‘주저함’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리쉬옌이었다.
그러니 호위하는 부분에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그렇게 멘탈을 산산조각낼 필요까지는 없었을 텐데?”
[말을 하기로 한 이상, 거짓말 쌓는 것보다는 아파도 진실을 알리는 게 나아.]
한번 거짓말을 하면, 그것을 덮기 위해 끝없이 더 큰 거짓말을 반복해야 하는 법이었다.
그렇게 덮다가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은 오히려 더 심각하게 정신적인 데미지를 줄 수 있었다.
차라리 충격을 받더라도 처음부터 사실을 말하는 게 나중을 위해서라도 좋은 선택이었다.
린디웨 본인이었더라도 그런 선택을 했으리라.
그래도 여전히 준혁의 마음에 걸리는 것 한 가지.
“표정이 영 안 됐더라.”
[니가 언제부터 그렇게 섬세했다고 걱정을 하고 있냐?]
“야, 나 알고 보면 따뜻한 남자거든?”
[따뜻한 게 아니라 100℃로 펄펄 끓는 남자겠지, 성질머리가.]
“와! 내가 살면서 이런 모욕은 처음이다. 야구하던 시절에 알고 보니 속이 따뜻한 반전 매력으로 유명했거든?”
[이미지 메이킹 잘했네.]
“내가 말을 말아야지 진짜! 야, 어쨌든 간에.”
준혁이 급히 말꼬리를 돌렸다.
[뭐, 또 할 말 있냐?]
“리쉬옌은 저렇게 둬도 괜찮다는 거지?”
[괜찮아…….]
[괜찮을 거야.]
[괜찮아야지.]
연이어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
린디웨가 상태창에 들어와 있는 탓일까?
씁쓸하고 안타까운 감정이 준혁의 가슴팍을 두드리고 지나갔다.
린디웨의 감정일까, 준혁 본인의 감정일까? 그도 아니면 린디웨의 영향을 받은 아바타의 감정일까?
준혁으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서둘러 고개를 털어낸 준혁이 린디웨를 향해 물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
[어쩌긴? 전진이지.]
“뭐, 그렇지. 적사, 힘내라.”
린디웨에게 대답한 직후 곧장 팍뚝에 감겨 있는 적사에게 말을 걸었다.
키하아!
새빨간 세모꼴의 머리 앞쪽 주둥이가 크게 벌어지며 묘한 바람소리가 울렸다.
“크흐흐, 그래 힘내자.”
왼손으로 오른팔에 감긴 적사의 머리를 쓰다듬은 준혁이 던전 안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근데 여기 분위가 되게 묘하네?”
준혁이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 준혁이 걷는 길은 동굴, 아니 일종의 복도였다.
직선으로 곧게 뻗은 형태가 아닌, 오른쪽으로 살짝 휘어져 있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 통로의 형태였다.
그리고 바닥은 물론 좌우 벽과 천장까지 표면이 마치 검은색 대리석처럼 반듯하고 윤이 났다.
일반적인 던전과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아직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래?”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냥 생각으로 이야기해. 여기서는 가능하니까. 소리는 안 내는 게 좋아.]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준혁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준혁의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이 하나 있었다.
-야.
[왜?]
-물리적인 접촉은 문 따고 들어가서 하드 열어 보는 거라며?
[그렇지.]
-그런데 왜 목숨을 걸 정도로 위험하다는 거야?
[잠긴 문이 알아서 열리냐? 컴퓨터 비밀번호는 자동으로 입력돼?]
-허, 비밀번호 두 번만 풀었다가는 요단강에서 잠수 대결 하고 있겠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엄살이냐?]
린디웨의 메시지에 준혁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미 시작한 것 같은데?
[무슨 말이야?]
준혁이 복도 정면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복도, 이상하지 않냐?
[응? 어떤 부분이…….]
-꽤 걸었거든?
[어?]
오른쪽으로 약간 휘어진 형태의 복도였다.
그리고 그 각도는 걷는 내내 한 번도 변하지 않고 유지되었다.
그리고 준혁이 이동한 거리를 따지면 이 통로는 하나의 거대한 원형 튜브의 형태였다.
즉, 이대로 걷기만 한다면 출구가 없는 튜브 속을 영원히 맴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또 있어?]
-이미 한 바퀴 이상 돌았는데 우리가 넘어온 게이트가 안 보여.
[그러네? 음, 이건…….]
린디웨가 메시지로 고민스러움을 표현하는 사이 준혁은 그 자리에 멈춰서서 천천히 다리를 풀었다.
[뭐 하려고?]
-테스트.
[테스트?]
-일단 몸으로 확인해 보자.
가볍게 다리를 푼 준혁이 금문묵룡비를 꺼내 분리한 후, 그 중 하나를 던졌다.
팍!
칼날의 절반 정도가 통로 벽면에 박혔다.
그리고 준혁이 냅다 달렸다.
무시무시한 스탯을 바탕으로 한 우악스러운 질주.
콰콰콱!
걸음을 디딜 때마다 바닥이 터져나갔다.
팍, 파팍!
달리는 중에 끊임없이 금문묵룡비를 주기적으로 벽에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다.
휜 통로의 곡률(曲率)을 생각하면 벌써 수십 바퀴는 족히 돌았다.
하지만 준혁이 만든 족적도, 벽에 던진 금문묵룡비도 보이지 않았다.
흥미를 느낀 준혁이 물었다.
-반대로 돌면 어떻게 될까?
[야, 함부로 그러지 마. 함정 같은 게 있을 수도…….]
하지만 준혁은 이미 방향을 틀어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걷지 않아 준혁이 발을 멈추며 말했다.
-하! 재밌네, 이거?
[심각한 거 아니고?]
반대로 걸었더니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첫 번째는 발자국이었다.
준혁은 조금 전까지 질주할 때 바닥을 으깨며 달렸다.
벽에 금문묵룡비를 던진 것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흔적을 남겨 튜브 형태의 통로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준혁이 지나온 길에는 그 족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준혁이 뒤로 돌았을 때는 당연히 그 발자국이 눈에 보였다.
거듭 말하지만 현재의 통로는 휘어져 있는, 튜브 형태의 공간이다.
그 탓에 시야에 담을 수 있는 범위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통로가 휘면서 시야를 막기 때문이었다.
처음 뒤로 돌았을 때는 시야에 담겼던 범위만큼만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눈에 담겼던 족적의 마지막 지점을 지나치자 거짓말처럼 발자국이 지워져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발자국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두 번째 변화.
처음 준혁이 걸었을 때 통로는 오른쪽으로 휘어져 있었다.
지금은 뒤로 돌았으니 당연히 왼쪽으로 휘어진 통로였다.
하지만 앞서 말한 시야 범위의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통로는 다시 오른쪽으로 휘어져 있었다.
멈춰선 준혁이 린디웨에게 물었다.
-이거……. 무조건 내가 전진하는 방향의 오른쪽으로 통로가 휘도록 만들어진 거지?
[그런 거 같은데?]
-그럼 우선은 이쪽도 한 번 달려봐야겠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준혁은 질주를 시작했다.
중간에 [전뢰보]까지 펼치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통로를 내달렸다.
역방향으로 내달린 것도 결과는 같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상한 점.
-야.
[왜?]
-내가 반대 방향으로 달린 거리가, 처음 들어왔들 때 달린 거리보다 훨씬 길거든?
[그런데?]
-게이트가 안 보였잖아.
[어? 그러네?]
-야, 너.
[왜?]
-여기 들어오자마자 완전히 바보가 된 거 같은데?
[말했잖아. 도움 안 될 거라고.]
처음 이야기했을 때의 기억을 더듬은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긴 했었지. 그런데 이렇게 바보가 될 거라고는 말 안 했잖아.
[지금 이곳은, 던전 시스템과 복제된 내가 융합되어있는 시스템 내부야.]
준혁이 홀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듣고 보니 그렇네.
[이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나와 내 복제품 사이에는 일종의 인력(引力)이 생길 수밖에 없어. 그리고 나는 거기에 저항해야 해. 네 상태창에 얹혀서 들어온 이유에는 그것도 포함돼 있어.]
-그러니까…….
[어, 거기에 저항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망할, 도움이 안 되네.
짧게 구시렁거려 준 준혁은 일단 아까 달릴 때 날렸던 금문묵룡비를 회수했다.
쉭, 쉬쉿!
생각에 반응한 금문묵룡비들이 차례차례 준혁의 손아귀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준혁이 뭔가를 생각하더니 린디웨를 향해 말했다.
-일단 한 가지는 확실하네.
[어떤 거?]
-이 통로는 무조건 내가 이동하는 방향을 기준으로 잡고 맞춰진다는 사실.
[그런가?]
-방금 금문묵룡비는 내 뒤에서 날아왔잖아.
[그랬지.]
-음……. 우리가 처음 지나온 게이트를 기준으로 치면 내가 금문묵룡비를 던졌던 시점은 게이트를 등지고 달렸을 때야. 그런데 지금 방향은 게이트를 마주 보는 방향이잖아? 그러면 내 앞쪽에서 돌아와야 하는데 뒤쪽에서 돌아왔다.
[아아, 무슨 말인지 알았다.]
-그러면 이제 실험해 볼 게 또 생긴 셈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