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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장. 머리를 보다#3-
“선물?”
“응.”
“무슨 선물……. 아니, 그 전에 그게 로건 그놈이랑 무슨 상관?”
게다가 직전에 했던 로건 베런즈의 영력 감지 여부에 대한 질문도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음, 이건 이야기가 좀 거슬러 올라가는데…….”
“어디까지?”
“일단 어렴풋이 생각이 미친 건 좀 됐는데, 시작한 건 어제.”
“어제? 아, 선물 얘기를 어제 했었지.”
준혁은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자는 생각에 맞장구를 쳤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게 뭐든 연관이 있으니 말을 꺼냈으리라.
“놈들은 배면계 시스템을 복제한 후, 던전 시스템에 얹어서 두 시스템을 합치려고 해.”
“그렇지.”
“이 두 개의 다른 시스템의 융합. 이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제가 필요해.”
스스로가 시스템의 아바타이면서, 시스템을 제삼자처럼 대하는 린디웨의 태도는 준혁에게 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것도 린디웨의 인격 때문인가?’
이 정도면 린디웨를 시스템과 관련 없는 하나의 객체로 보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어떤 전제?”
“두 시스템의 근간은 같다.”
“응?”
“사실 공통점은 꾸준히 보였지.”
준혁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확실히 린디웨의 말대로 은근히 공통점이 꽤 보였다.
준혁이 그중 하나를 입에 담았다.
“등급.”
배면계 시스템은 상태창에 등급의 이름까지 명시하는 데 반해 던전 시스템은 명시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공통점이 있었다.
“등급을 나누는 기준.”
“어, 그거.”
특히 최유나가 S1등급에 오르면서 확실해 졌다.
그 순간에 찾아오는 변화나 현상들이 배면계와 쌍둥이처럼 똑같았다.
리쉬옌이 등급이 오르는 순간 찾아올 변화를 예상했을 정도였다.
린디웨가 또 한 가지 공통점을 말했다.
“상태창.”
“아, 맞아. 그것도 똑같지.”
특히 스탯의 공통점이 있었다.
마나와 영력을 같은 개념으로 두고 보면 완벽하게 똑같다.
“그래서 생각했지.”
“뭘?”
“나는 던전 시스템을 엿볼 수 없는가?”
“어? 그러게? 그래서 결과는?”
“가능.”
린디웨의 짧은 대답에 준혁이 눈을 번뜩였다.
“그러면 시스템 융합도 막을 수 있고, 신수 새끼들이 넘어올 일도 없는 거잖아. 그런 건 진작 말해줬어야지. 그럼 내가 이렇게 개고생 할 일도…….”
“간섭은 못 해.”
“응?”
“찔끔찔끔 엿보는 게 한계야.”
“아니, 왜?”
“이게 설명을 하려면 꽤 복잡한데 뭐라고……. 아! 그래, 방화벽.”
혼자 횡설수설하는 듯한 린디웨의 모습에 준혁이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았다.
“거 좀 알아듣기 쉽게…….”
“컴퓨터든 서버든 하나의 시스템은 외부의 공격을 막기 위해 방화벽이 있잖아.”
“그렇지?”
“비슷해. 배면계의 시스템에도 던전 시스템에도 그런 방화벽 같은 역할을 하는 게 존재…….”
“아!”
준혁이 갑자기 탄성을 내질렀다.
“왜 그래?”
“생각났다. 예전에 유 길드장이 처음에 나한테 [지휘권] 사용했을 때 그런 메시지가 떴다고 했어. 방어 시퀀스 어쩌고…….”
“어, 그래 그거. 처음 엿보려고 시도했을 때 그거에 걸렸어.”
“뚫을 방법은 없고?”
“이미 두 시스템 융합이 절반 이상 진행된 탓에 내가 어떻게 할 여지가 전혀 없어. 그거 피해서 조금씩 엿보는 게 전부야.”
“쯧, 아쉽네. 그런데……. 이 이야기 그 선물 때문에 꺼낸 거 아니었어? 선물 한 번 받는데 알아야 할 것도 많네.”
“하아, 아무튼 섬세함이 없어, 섬세함이…….”
린디웨가 한탄을 터트렸지만, 애초에 준혁은 고민해도 답을 낼 수 없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잠깐의 침묵 후, 린디웨가 술석을 손바닥 위에 놓고 굴리며 말했다.
“내가 그 망할 시스템을 엿보면서 간신히 알아낸 것.”
“뜸 그만 들이고.”
“알았다, 이 자식아. 각성이다, 각성.”
“각성?”
“이걸 쓰면 던전 시스템의 각성을 한 번 더 한다고.”
순간 준혁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미 배면계 시스템으로 각성한 사람이, 던전 시스템을 통해 또 한 번 각성을 한다.
생각지도 못한 발상이었다.
“엇!”
뒤이어 갑자기 훅 다가든 한 가지 깨달음에 준혁은 비명에 가까운 탄성을 터트렸다.
“로건 그 자식 설마?”
천강급이면서 혼원급인 준혁과 비슷한 수준의 스탯, 준혁이 알지 못하는 스킬, 스킬 사용시 준혁이 영력을 감지하지 못한 점.
로건 베런즈가 두 시스템의 각성을 모두 했다면 설명되지 않던 의문점을 모두 설명할 수 있었다.
“더블 각성? 듀얼 각성? 뭐, 명칭이야 어쨌든 간에 그놈이 그런 거라고?”
“90%는 그렇다고 봐야지. 그리고 그 가정이 맞는다는 전제하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그놈이 이 시스템 융합의 주체라는 점.”
“하!”
준혁이 한숨인지 탄식인지 알 수 없는 소음을 흘렸다.
조금도 실체가 보이지 않던 이해 못 할 전개의 실체가, 암약하는 무명회 놈들의 머리가 이제야 조금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 로건 그 새끼만 조지면 다 막을 수 있다는 뜻이지?”
“그렇지. 그런데……. 잡을 수 있겠어?”
요원한 일이었다.
당장 놈의 행방도 알지 못한다.
미국의 정보망을 동원한다 해도 수시로 얼굴을 바꿀 수 있는 놈을 쉬이 잡아 낼 수는 없었다.
모든 정보를 끌어모아 종합적으로 분석해야만 실낱 단서라도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일단, 로건 베런즈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정보는 미국에서 수집을 할 것이고…….”
준혁이 저도 모르게 말꼬리를 길게 늘어트렸다.
다른 하나는 무명회 회원들을 파는 것이다.
아래에서 위로 더듬어 올라가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다시 두 가지 옵션이 존재했다.
원래 계획해 놓았던 국내 무명회 회원들을 잡아들이는 것이 첫 번째였다.
그리고 두 번째 옵션은 광화문 광장이었다.
로건 베런즈 주변에 있던 배면계 귀환자들이 있었다.
준혁은 그중 최소 서너 명은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은, 도로는 곳곳에 CCTV가 설치돼 있고 대부분 자동차가 블랙박스를 달고 다니는 나라였다.
시간을 들여 쫓아가보면 놈들의 행적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지금은 그 중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를 선택할 때.
“역시나 광화문 쪽인가?”
로건 베런즈와 동행했던 놈들이라면 측근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그때 린디웨가 불쑥 끼어들었다.
“근데 이야기가 옆으로 샌 거 같지 않냐?”
“응?”
“이거.”
린디웨가 다시 내민 것은 문제의 술석이었다.
“아, 그래. 각성. 그러니까 네 말은 나도 한 번 더 각성할 수 있다 이런 말이지?”
“그렇지.”
“그런데 미완성이라며?”
“그래서 제안 하나 할까 해. 원래는 시간이 들더라도 혼자 하려고 했는데, 로건 베런즈가 듀얼 각성 상태라면 우리도 서둘러야 할 거 같아서.”
서둘러야 한다는 말에 준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놈 나보다 약한데?”
“지금이야 그렇겠지.”
“나보다 더 세질 거라는 얘기?”
“당연한 거 아니냐?”
“왜?”
준혁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린디웨가 다시 설명을 해야했다.
“D급이 C급 되는 것과 S급이 S1급이 되는 것. 어떤 게 쉬워?”
“그야 당연히 D급이 C급. 아, 그 얘기군.”
간단한 이야기였다.
로건 베런즈는 배면계의 천강급, 던전으로 따지면 S4등급이었다.
그런데 던전 시스템을 통해 최소 S1급까지만 올라갈 수 있다면, 스탯의 총합은 준혁을 넘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이미 천강급까지 성장한 경험이 있는 로건 베런즈였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던전 시스템의 각성 등급도 빠르게 올릴 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했다.
그러니 준혁도 그에 대비해야했다.
“그래서 무슨 제안?”
“이 술석을 완성하지 못한 이유는 아직 제대로 저쪽 시스템을 파악하지 못한 탓이야.”
“파악하려면 어떡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한 것처럼 꾸준히 잠입해서 엿보는 방법이 첫 번째.”
“두 번째는?”
“시스템에 물리적으로 침입해서 직접 확인하고 오는 방법.”
준혁이 또 한 번 멈칫했다.
“뭐라고?”
“물리적으로 침입해서 직접 확인한다고.”
“그게 무슨?”
준혁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분야의 이야기였다.
어울리지 않게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준혁의 모습에 린디웨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내가 엿보는 게 온라인을 통한 해킹이라면, 물리적 침입은 쉽게 말해서 서버실에 침입해서 직접 열어보는 거지.”
“아니……. 그러니까 어떻게?”
준혁은 여전히 이해를 못 한 얼굴이었다.
린디웨의 설명을 이해 못 한 것이 아니었다.
일종의 인지 범위의 문제였다.
린디웨는 보는 것을 준혁은 보지 못하기에 생기는 차이였다.
“게이트.”
“응?”
“내가 던전 시스템에 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게이트를 열면, 네가 그 게이트를 통해서 직접 뚫고 들어가는 거야.”
“그런 게 가능해?”
“가능하니까 이야기 하겠지?”
“그런데 나 혼자 들어가는 건 소용 없잖아.”
준혁은 시스템에 손을 댈 능력이 없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에 대해서는 린디웨가 답을 갖고 있었다.
“나는 네 상태창을 통해서 접속하면 돼.”
“상태창 안 열리는데?”
“내가 시스템 아바타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그럼 지금까지는 왜 안 했는데?”
“쉽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무리한 작업을 해야 하니 나한테도 부담이 꽤 커.”
“말하는 분위기가 어째…….”
준혁이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고개를 외로 꼬아 린디웨를 보았다.
“그 게이트 너머가 꽤 위험할 거 같은데?”
“몰라.”
“응?”
린디웨가 강조하듯 고개까지 내저으며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게이트를 여는 것 까지야. 그 너머에는 뭐가 있을지 알 수 없어.”
“위급할 때 탈출할 방법은?”
“당연히 있지. 단!”
“단?”
“한 번 실패하면 두 번 다시 접속할 수 없을 거야. 통로를 아예 끊어버리거나 더 강한 보안 대책을 만들어 놓을 테니까.”
“어지간하면 목숨 걸고 뚫으라는 말이지?”
“역시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까?”
“이런 눈치는 안 빠르고 싶다.”
“이미 늦으셨습니다.”
“그래. 가자.”
“그런데 하나 더 말할 게 있어.”
거듭된 단서 조항에 준혁이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또 뭘?”
“거기 들어가면 나는 별다른 도움이 안 될 거야.”
“난 또 뭐라고. 애초에 별로 기대도 안 했어. 그런데 그 전에 한 가지만.”
“응? 뭐?”
“상태창 제대로 열 수 있으면 환계도 가능하지?”
린디웨가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부담이 가서 그렇지 가능하긴 해. 왜?”
“그럼 지금 잠깐 열자. 목숨 걸고 가야 한다는데 나도 어느 정도 대비는 해야지.”
“응?”
“환수 중에 아직 안 꺼낸 놈이 하나 있거든.”
“아아, 알았어. 그럼 환계와의 연결만 잠깐 열어 놓을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준혁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일시적으로 시스템이 회복됩니다.]
메시지가 떠오르는 동시에 준혁이 영소적을 꺼내 불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공간이 일그러지고 붉은 색의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한 마리 뱀이었다.
50cm정도 길이의 온몸이 붉은색으로 물든 뱀.
그사이 번쩍 눈을 뜬 린디웨가 가쁜 숨을 토해냈다.
“크헉, 헉!”
배면계 시스템을 움직이는 데 부담이 크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모양이었다.
한참을 숨을 고른 린디웨의 시선이 향한 곳은 준혁의 발치에 똬리를 틀고 있는 문제의 붉은 뱀이었다.
붉은 뱀을 본 린디웨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그거 이름은 ‘적사’냐?”
“어? 어떻게 알았냐?”
“헐, 당신의 네이밍 센스를 생각해 보시죠?”
“괜찮지 않아?”
“어이구, 말이나 말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린디웨가 차분하게 숨을 뱉으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남은 건…….”
그런데 말끝을 흐리는 린디웨의 얼굴에 사뭇 비장한 표정이 떠올랐다.
적사를 불러들여 오른쪽 팔목에 감은 준혁이 린디웨의 표정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일단 내 방으로 가자.”
여기서 말하는 방은, 혼원길드 사옥에서 내준 린디웨의 숙소였다.
“그런데 너 표정이 갑자기 좀?”
“나도 나름 각오할 일이 있어서.”
“각오?”
“가 보면 알아.”
그렇게 말을 끝낸 린디웨가 앞장서서 걸었고, 준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