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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장. 머리를 보다#2-
존 넬슨이 손을 들어 사람들의 말을 멈추려 할 때였다.
삐리리리-
갑자기 회의실 내선 전화가 울기 시작했다.
회의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도 전화가 울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는 뜻.
존 넬슨이 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무슨 일인가?”
「국장님, 백악관으로부터 메일이 한 통 왔습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리처드 파웰 ISA 사무차장이었다.
“메일?”
「지금 인트라넷으로 국장님께 보냈습니다. 확인해 보시죠.」
테이블 위의 모니터를 보니 오른쪽 아래에 무언가 알림이 반짝이고 있었다.
급히 열어보니 들어 있는 것은 한 장의 사진, 아니 그림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사진으로 착각할 정도로 매우 정교하게 그려진 그림이었다.
‘이 정도면 하이퍼 리얼리즘 경향의 초상화?’
부지불식간에 실없는 생각이 떠오를 정도로 정교한 초상화였다.
“이 초상화가 혹시?”
「네, 로건 베런즈의 얼굴이라고 합니다.」
순간 저도 모르게 울컥한 존 넬슨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런 초상화를 그릴 정도면 차라리 사진을 보내라고 해! 왜 이런 쓸데없는 일로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거야?”
그만큼 보내온 그림의 퀄리티가 대단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공까지 표현됐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정교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저도 그것까지는…….」
흑호를 통해 화가의 머릿속에 이미지를 심어 주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낸 과정을 모르니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아무튼 알았어. 각 기관장에게 해당 파일을 보내도록 하게.”
「네, 국장님.」
통화를 마친 존 넬슨이 화면 속 얼굴들을 하나하나 살핀 후 입을 열었다.
“지금 파일을 하나 보냈습니다. 일단 확인하시죠.”
그리고 돌아온 반응은 역시나 존 넬슨 만큼이나 격정적이었다.
“이 정도면 안면인식 프로그램으로 추적이 가능하겠는데?”
“뭡니까, 이 쓸데없는 퀄리티는?”
“ISA가 각 기관의 기를 죽이려했다는 말은 최소하도록 하죠.”
하지만 존 넬슨은 오직 한 곳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로건 베런즈의 이름을 듣고 뭔가 생각에 잠겼던 남자, 윌리엄 카인셀 CIA 국장을 보고 있었다.
‘역시 뭔가 있군.’
존 넬슨의 촉은 정확했다.
윌리엄 카인셀은 두 눈 가득 짙은 의구심을 품은 채 모니터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낯빛마저도 퍼렇게 질려 있었다.
“카인셀 국장.”
“네, 말씀하십시오.”
“아는 사람입니까?”
“알고 있습니다.”
윌리엄 카인셀은 숨기는 것 없이 순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다음 말을 듣는 순간 존 넬슨도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죽은 친구입니다.”
충격적인 내용인데도 회의실의 누구도 놀라지 않는다.
첩보 계통에서 죽은 사람이 부활하는 기적은 여사로 일어난다.
회의에 참가한 이들의 면면을 보라. CIA, FBI, DEA, NSA 등 미국의 정보공동체 소속 기관의 국장들이었다.
이쪽 계통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인 만큼 이 정도 일에 놀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의혹을 품고 있는 윌리엄 카인셀이 이상하게 보일 일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는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제 앞에서 죽었고, 시신 수습도 제가 했습니다.”
보통 죽음에서 부활하는 기적은 서류상의 죽음, 정보의 비틀림, KIA(작전 중 사망), MIA(작전 중 실종)의 경우에 일어난다.
이렇게 직접 목격하고 시신 수습까지 했는데 기적이 일어나는 예는 없다.
그러니 이 경우는 진짜 ‘기적’이거나 준혁의 착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흐음…….”
잠시 고민하던 존 넬슨이 결정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일단 이건 우리가 고민할 일이 아닙니다. TH의 요구는 어디까지나 로건 베런즈를 찾아달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충실하면 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입장이었다.
정보를 다루는 사람에게 정보는 곧 무기다.
정보기관을 통괄하는 부서의 장이 이런 정보를 그냥 지나치는 건 자격을 의심해 봐야 할 일이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헌터 중 가장 강한 사람이 준혁이었다. 그런 사람이 찾는 인물이라면 분명 무언가 있다.
무덤을 파헤쳐서라도 로건 베런즈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CIA는 로건 베런즈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모든 기관에 정보 공유 하십시오. 그리고 지금 이 시간부터 모든 기관은 로건 베런즈를 파헤칩니다.”
그렇게 ISA의 첫 번째 공식 케이스가 시작되었다.
***
“죽은 사람이라고요?”
준혁이 벽돌처럼 생긴 휴대폰에 귀를 댄 채 물었다.
정확하게 5분 전에 CIA 한국 지부에서 왔다는 남자가 건네준 휴대폰이었다.
그리고 1분 전 걸려온 지금의 통화 상대는, 자신을 ISA의 존 넬슨 국장이라고 소개했다.
준혁의 반문에 존 넬슨은 매우 정중한 태도로 설명을 부연했다.
「네, 미스터 김. 그는 CIA 소속의 특수 요원이었으며, 던전 등장 초창기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사망 사실을 조작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카인셀 CIA 국장은, 로건 베런즈는 당시 임무 수행 중 자신의 눈앞에서 사망했으며 시신 또한 직접 수습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군요.”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사실이 동시에 나타났다. 둘 중 하나는 반드시 거짓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준혁은 자신이 본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로건 베런즈는 단순히 준혁이나 한국에 한정하는 위협요소가 아니었다.
세계적인 혼란을 준비하는 인물이었다.
이런 놈에 대한 정보는 공유하고, 한시라도 빨리 잡아야 했다.
「그럼 이제 로건 베런즈라는 인물에 대해 알려주시겠습니까? 조사의 방향을 정해야 제대로 된 정보 수집이 가능합니다.」
존 넬슨의 말에 준혁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미국에 외상값 지불 할 때가 되기는 했지.’
준혁, 정확하게는 혼원길드가 미국과 맺은 계약이 있었다.
1년에 4번, 미국에 있는 게이트 돔을 공략해 주는 일이었다.
‘그 일도 팀 히어로가 성장하고 나면 마무리 해야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성장하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까지는 충실하게 계약을 이행할 필요가 있었다.
‘조만간 들리기는 해야겠군.’
생각을 정리한 준혁이 존 넬슨에게 말했다.
“우선 틀린 점을 정정하겠습니다. 로건 베런즈는 죽지 않았습니다.”
「네? 하지만 카인셀 국장이…….」
“목격했다고 해도 그는 살아 있습니다. 절대 죽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조사를 해 주십시오.”
「그가 도대체 누굽니까?」
존 넬슨의 물음에 준혁은 자신이 쓰고 있는 휴대폰의 모양을 확인 한 후 말을 이었다.
“이 휴대폰, 보안 휴대폰이라고 했죠?”
「네, 모든 통화 내용을 암호화해서 송수신합니다.」
“제가 주장했던 시스템의 융합에 관한 이야기, 알고 있죠?”
「물론입니다.」
“그 일의 주동자.”
「네?」
“시스템을 융합하려는 집단의 수장, 수장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 그 집단의 핵심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의 생존을 그렇게까지 확신하는 근거가 뭡니까?」
“그를 목격했습니다.”
준혁의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존 넬슨은 잠시 침묵한 후 질문을 던졌다.
「미스터 김이 착각했거나, 잘못 봤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CIA의 카인셀 국장은 그의 죽음을 목격했다고 말했습니다. 아,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로건 베런즈는 배면계의 귀환자입니다. 그리고 저와 같은 ‘엽사’라는 클래스죠.”
「그렇다고…….」
“아직 말 안 끝났습니다. 배면계의 엽사가 만들어 쓸 수 있는 아티펙트에는 얼굴을 완전히 변형할 수 있는 물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씌울 수도 있지요.”
「아!」
존 넬슨은 곧장 준혁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카인셀 국장의 증언은 정보의 오류로 보고 배제하는 쪽이 옳겠습니다.」
“네.”
「일단 저희가 모을 수 있는 정보는 모두 모아보겠습니다. CIA가 보관하고 있던 자료는 모두 메일로 발송했습니다. 암호화된 메일이니 패스워드를 입력해야 합니다. 패스워드는…….」
기나긴 패스워드를 받아 적은 후 준혁이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정보 수집에 박차를 가해주십시오.”
준혁이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존 넬슨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아, 그런데 미스터 김!」
“네?”
「백악관에서 언제쯤 방문할 예정인지 묻더군요.」
“아, 그러고 보니 외상값을 갚을 때가 되기는 했군요.”
생각해 보니 미국에 한 번 들릴 때가 되기는 했다.
1년에 4개씩 미국에 있는 게이트 돔을 공략해 주는 계약을 맺었었다. 그런데 지난번에 하나 공략한 후 방문을 안 한 상태였다.
「이른 시일 안에 일정을 잡았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여기 급한 일 마무리 하는 대로 연락 드리죠.”
「네, 부탁합니다.」
통화를 마친 준혁은 CIA에서 받은 휴대폰을 도깨비 보따리에 집어 넣었다.
CIA에서 보낸 물건이니 도청장치나 위치 추적기 정도는 기본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그러니 그것들을 원천 차단하는 건 당연했다.
그런 후 자신의 메일함을 열어 미국에서 온 파일을 그대로 린디웨에게 전달했다.
“메일 하나 보냈어.”
“무슨 메일?”
“로건 베런즈과 관련한 모든 정보가 담긴 메일. 패스워드는 이거.”
메모지를 건네는 준혁의 모습에 린디웨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직접 하지 그래?”
“나 할 거 많은데?”
“또 뭘?”
“로건 베런즈, 그놈 똘마니들이 있었거든. 그것들을 훑어야지. 아니면, 네가 갈래?”
준혁의 말에 린디웨가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이 정보나 훑어보고 있을게.”
그 모습에 준혁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린디웨의 행동이 평소와 달랐다.
‘아까도 그랬지?’
린디웨의 평소 성격이라면 몸을 움직이는 일에 빠질 리가 없었다.
그런데 할 일이 있다며 움직이지 않으려 했었다.
“너 뭔 일 있냐?”
“아니, 할 일이 있다니까?”
“할 일? 선물 어쩌고 했던 그거?”
“그래, 그거.”
“흐음…….”
저 말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 듯해 보였다.
다만, 본인이 말하기를 원치 않는데 억지로 말하기를 강요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일.
준혁은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용건을 이어갔다.
“그러고 보니 로건 베런즈, 그놈 말이야.”
“응?”
“천강급이지?”
“그랬지. 왜?”
“스탯만 따지자면 나하고 비슷한 수준이었거든.”
린디웨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게 뭔 소리야? 말이 돼?”
“그러니까 얘기를 꺼내지.”
“음…….”
천강급에서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었다.
천강급도 급이 맞는 적이 있고, 꾸준히 싸우며 훈련을 하면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던전 시스템에서 그런 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천강급이 성장이다.
아니, 천강급은 고사하고 천원급만 되어도 무척이나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런데 천강급이 혼원급 수준의 스탯으로 성장을 했다는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고민하는 린디웨를 향해 준혁이 설명을 더했다.
“그리고 뭐랄까? 좀 낯선 기술을 쓰던데?”
“낯선 기술?”
“어, 엽사 기술은 아니었어.”
준혁의 설명이 끝나는 동시에 린디웨의 표정이 한층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한 후 조심스레 물었다.
“그 기술 쓸 때, 로건 베런즈 영력 감지 안 됐지?”
“어? 어떻게 알았냐?”
“역시나…….”
“뭔데?”
잠시 침묵하던 린디웨가 결심이 선 듯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거.”
린디웨가 내민 것은 어른 주먹만한 크기의 술석이었다.
“이게 뭔데?”
준혁의 물음에 린디웨는 조금은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아직 미완이기는 한데, 내가 준비하고 있는 선물.”